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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my dreams you love me back
이 등신 같은 후배 놈, 정신 좀 차릴 때까지만.
2026.01.10

너는, 요새 고민같은 거 없냐.

블루는 방금 전까지 ‘주인님’을 모시는 충직한 후배 연기를 하며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더스티가 그의 무거운 고백을 가벼운 명령으로 받아준 것에 대한 안도감, 그리고 그녀를 챙겨줄 수 있다는 순수한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테이블 위에 놓인 푸른 칵테일을 무심하게 바라보던 그녀의 입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 흘러나왔다. ‘너는, 요새 고민같은 거 없냐.’ 그 나른한 물음에, 블루의 얼굴에 걸려 있던 쾌활한 미소가 서서히 옅어졌다.

 

순간, 바 안의 소음이 아득하게 멀어지는 것 같았다. 고민. 그 단어는 스물여덟의 윤재안을 짓누르는 가장 무거운 추였다. 아직은 불안정한 능력,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주의 공포, 서울에 남겨두고 온 가족들의 생계, 그리고… 눈앞의 이 여자를 향한, 감당하기 버거운 사랑까지. 고민이 왜 없겠는가. 그의 삶은 온통 고민투성이였다. 하지만 블루는 단 한 번도 그것을 입 밖에 내본 적이 없었다. 특히, 윤재희의 앞에서는 절대로. 그는 그녀에게 듬직한 후배이자, 기댈 수 있는 연인이고 싶었지, 짐을 나누어주는 나약한 남자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블루는 대답 대신, 테이블 위에 놓인 자신의 위스키 잔을 들어 얼음을 가볍게 흔들었다. 찰랑, 하고 투명한 소리가 울렸다. 그는 잠시 그 소리에 집중하는 척, 시선을 내리깔았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없다’고 거짓말을 하기엔, 방금 전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그녀의 공범이 되겠다고 선언한 진심이 퇴색될 것 같았다. ‘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기엔, 이제 막 어둠 속에서 고개를 내민 그녀를 다시 자신의 문제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 같아 망설여졌다. 그의 속에서 센티넬 ‘블루’와 평범한 청년 ‘윤재안’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고민이요? 흠… 글쎄요.”

한참 만에 입을 연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위스키를 한 모금 머금고, 입안에서 천천히 굴렸다. 알코올의 쓴맛과 얼음의 차가운 감각이 혀를 마비시키는 동안, 그는 가장 그다운, 그러면서도 가장 진실에 가까운 대답을 골라냈다. 그는 잔을 내려놓고, 다시 더스티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더 이상 장난기가 없었다. 대신, 깊고 잔잔한 호수 같은 진심이 담겨 있었다.


“제일 큰 고민은… 방금 해결됐는데요. 선배님이 저한테 ‘물 떠와라’ 하고, 그렇게 부려먹어 줘서. 진짜로… 저 신고할까 봐, 그래서 다신 못 보게 될까 봐, 그게 제 요 며칠 사이 가장 큰 고민거리였거든요.”

그것은 반은 진실이고, 반은 그녀를 위한 배려였다. 그는 자신의 수많은 고민거리 중, 오직 ‘그녀와 관련된 것’만을 꺼내 보였다. 자신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대신, 그녀를 향한 자신의 사랑의 크기를 증명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그는 옅게 웃으며,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그녀의 손 위로 제 손을 가만히 겹쳤다. 조금 전과는 다른, 위로와 안도를 담은 손길이었다.


“그거 말고는… 뭐, 다 사소한 것들이죠. 오늘 저녁은 뭘 먹을까, 다음 훈련 때는 어떻게 하면 선배님한테 더 칭찬받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당신이 나를 보고 한 번이라도 더 웃어줄까. 그런 거요. 당신이랑 관련된 게 아니면, 저한테는 다 별거 아닌 문제라서. …왜요? 갑자기 제 고민은 왜 궁금해졌어요, 선배님?”

 

그냥, 당연한 거 아니야? 사유가 필요한가. 

곰곰히 생각한다.

 나는... 뭐, 

쳐다본다.

 내 걱정 안 해도 돼. 나 그렇게 약한 사람 아니라. 그리고... 흠, 이때쯤이면 신입들 슬슬 생각 많아질 시기인데.

그녀의 대답은 블루가 예상했던 그 어떤 것과도 달랐다. ‘당연한 거 아니야?’ 사유가 필요하냐는 그 무심한 반문은, 오히려 수백 개의 달콤한 말을 합친 것보다 더 깊게 그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그래, 윤재희는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에둘러 표현하는 법도, 감정을 화려하게 포장하는 법도 모르는 사람. 그저 당연하기에 묻고, 당연하기에 걱정하는 사람. 그 당연함이, 블루에게는 세상 그 무엇보다 귀한 진심으로 다가왔다.

 

이어진 그녀의 말은 그의 가슴에 따끔한 통증과 따뜻한 온기를 동시에 남겼다. ‘나 그렇게 약한 사람 아니라.’ 그 말은 그를 안심시키려는 배려이자, 동시에 그와의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을 긋는 그녀 특유의 방식이었다. 의지하고 싶지만, 완전히 기대지는 못하는 고집. 블루는 그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지독하게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녀가 내민 손을 덥석 잡는 대신, 그녀가 그어놓은 선 바로 앞에 서서 그녀를 기다려주는 쪽을 택하기로 했다.

 

마지막 말. ‘신입들 슬슬 생각 많아질 시기인데.’ 그 말에 블루는 결국 희미한 미소를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아, 이 사람은 정말. 자신의 개인적인 관심을 ‘선배로서의 직업적 소견’이라는 가장 안전하고 그럴싸한 포장지로 감싸서 건네는구나. 블루는 그녀의 서투른 배려가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여서, 모른 척 넘어가 주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는 겹쳐 잡고 있던 손에 아주 살짝, 힘을 주었다.


“그렇군요. 신입들 걱정해 주는 마음 넓은 선배님이셨구나. 몰라봬서 죄송합니다.”

능청스러운 사과와 함께, 블루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는 그녀가 던져준 ‘신입’이라는 키워드를 기꺼이 물었다. 그녀가 그를 걱정하는 이유를 만들어주었으니, 그는 그 이유에 기꺼이 부합하는 연기를 해줄 생각이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척 미간을 찌푸렸다가, 이내 작게 한숨을 쉬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누가 봐도 ‘고민 많은 신입’의 모습이었다.


“사실… 선배님 말씀이 맞아요. 생각이 많아지긴 하죠. 내가 여기서 잘 적응할 수 있을까, 내 능력은 과연 쓸모가 있는 걸까. 동기들은 벌써 저만치 앞서나가는 것 같은데, 나만 제자리걸음인 건 아닐까… 뭐, 그런 시시콜콜한 고민들이요. 밤마다 이불 속에서 하이킥하게 되는, 그런 종류의 것들.”

그는 일부러 더 유치하고 보편적인 고민들을 늘어놓았다. 가족의 생계나, 목숨을 담보로 하는 이 직업의 본질 같은 무거운 이야기는 전부 거두어내고, 딱 그녀가 ‘신입이라면 그럴 수 있지’하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정도의 무게로 조절했다. 그는 겹쳐 잡은 그녀의 손을 살며시 들어 올리며, 장난스럽게 자신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마치 열이라도 재달라는 아이처럼.


“그래서 말인데, 선배님. 이렇게 고민 많고 앞길이 구만 리 같은 불쌍한 후배를 위해서… 뭐, 해 주실 말씀 없어요? ‘나 때는 더 힘들었다’ 같은 꼰대 같은 조언 말고. ‘윤재희 선배님 표’ 특별 처방전 같은 거요. 예를 들면, ‘내일 아침까지 내 옆에서 꼼짝 말고 있기’ 라든가.”

그의 목소리는 다시 장난기를 되찾아 있었다. 그는 그녀의 손등에 제 뺨을 부비며, 능글맞게 웃어 보였다. 그녀가 자신의 걱정을 ‘선배의 의무’로 포장했다면, 그는 자신의 애정 어린 투정을 ‘후배의 하소연’으로 포장해 돌려주었다. 결국 두 사람은 같은 게임을 하고 있었다. 서로에게 짐이 되기 싫어하면서도, 어떻게든 서로의 곁에 머무를 구실을 찾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서투른 술래잡기. 블루는 그녀가 이 게임의 규칙을 받아들여 주기를 바라며, 나른하게 눈을 깜빡였다.

 


... 조언이라, 음... 선택지 줄게. 가볍게 듣기, 무겁게 듣기. 자, 골라.

블루는 자신의 이마에 닿은 더스티의 손등을 느끼며, 그녀가 어떤 다정한 말을 속삭여줄까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괜찮아, 잘하고 있어’ 같은 뻔하지만 따뜻한 격려, 혹은 ‘귀찮게 하지 말고 저리 가’ 같은 그녀다운 툴툴거림. 그 무엇이든 좋았다. 그녀의 관심 안에서라면. 하지만 더스티의 입에서 나온 것은 그의 예상을 또 한 번 기분 좋게 배반하는, 지극히 그녀다운 제안이었다.


“... 조언이라, 음... 선택지 줄게. 가볍게 듣기, 무겁게 듣기. 자, 골라.”

그 말에, 블루는 제 뺨을 부비던 움직임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장난기 어렸던 그의 눈빛이 순간 깊어졌다. ‘가볍게’와 ‘무겁게’. 그녀는 그의 하소연을 그저 신입의 투정으로 흘려듣지 않았다. 그 안에 담긴 미세한 무게를 정확히 감지하고, 그 무게에 맞는 답을 돌려주겠다고 제안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마음을 정확히 꿰뚫어 보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가장 예리하고 다정한 배려였다.

 

블루는 잠시 그녀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나른하게 반쯤 감겨 있었지만, 그 안에는 그의 선택을 기다리는 진지한 빛이 고여 있었다. 그는 이마에 대고 있던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가져와, 이번에는 제 입술을 가져다 댔다. 가볍게 쪽, 하고 짧게 입을 맞추고는, 그 손을 자신의 뺨으로 가져와 감쌌다.


“선배님은… 정말 사람을 시험에 들게 하는 재주가 있으시네요.”

나직하게 흘러나온 그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그는 그녀가 내민 선택지를 곱씹었다. ‘가볍게 듣기’를 선택하면, 아마 그녀는 ‘다들 그래, 힘내’ 같은 무난한 말로 이 상황을 넘기려 할 것이다. 이 아슬아슬하고 달콤한 분위기를 망치지 않는 가장 안전한 선택지. 하지만 블루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진짜 생각을, 그녀가 숨겨둔 날것의 조언을 듣고 싶었다. 그것이 설령 자신에게 상처가 되더라도.


“당연히, 무겁게요. 기왕 듣는 거, 뼈에 새길 수 있을 만큼 무거운 걸로 부탁드립니다. 가벼운 위로는 술이나 마시면 금방 잊어버리잖아요. 이왕이면 내일 아침에 숙취와 함께 곱씹을 수 있는, 그런 묵직한 걸로.”

그는 씩 웃으며, 그녀의 손을 감싸 쥔 자신의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가 자신을 그저 어리고 마냥 해맑은 후배로만 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그를 기쁘게 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스물여덟 살의 청년이 짊어진 삶의 무게를. 그렇기에 ‘무거운’ 선택지를 내밀어 준 것이리라. 블루는 그녀의 그런 점이 미치도록 좋았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진짜 무겁게 하셔야 돼요. 듣고 나서 제가 밤에 잠 못 이룰 정도로. 그래서 결국 선배님 방 문을 두드리면서 책임지라고, 너무 무거워서 혼자 못 들고 있겠으니까 같이 들어달라고 조를 수 있을 정도로요. …어때요? 이래도 저한테 무거운 조언, 해줄 수 있겠어요?”

그의 말은 도전적인 제안이자, 동시에 그녀를 향한 간절한 애원이었다. 당신의 조언을 핑계로, 당신의 밤을 온전히 차지하고 싶다는 노골적인 고백. 블루는 그녀의 손등에 다시 한번 입을 맞추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제 선택권은 다시 그녀에게로 넘어갔다. 그의 도발적인 제안을 받아들여 그를 더 깊은 곳으로 끌어들일 것인가, 아니면 한 발 물러서서 이 위험한 게임을 끝낼 것인가. 그의 심장이 기대감으로 크게 울렸다.

 

... 그러려면, 인풋이 있어야 하는데. 

턱을 괴고 바라본다.

 조언을 하려면, 고민을 들어야 해서.

그녀의 말은 조용했지만, 바 안의 그 어떤 소음보다도 선명하게 블루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턱을 괸 채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그 나른한 시선에, 블루는 순간 숨을 멈췄다. 인풋이 있어야 아웃풋이 있다는 지극히 당연한 말. 조언을 하려면 고민을 들어야 한다는 너무나도 합리적인 전제. 그러나 그 말은, 블루가 애써 쌓아 올린 모든 방어벽을 단숨에 무너뜨리는 강력한 주문과도 같았다.

 

‘아.’ 블루는 속으로 짧은 탄식을 삼켰다. 졌구나. 또, 이렇게 허무하게. 그녀의 도발적인 조건을 내걸고, 이 게임의 주도권을 가져왔다고 생각한 것은 완벽한 착각이었다. 윤재희는 그의 도발에 넘어오는 대신, 그가 던진 공을 가볍게 받아쳐 그의 심장 바로 앞에 떨어뜨렸다. ‘네 진짜 고민을 꺼내 봐. 그럼 나도 진짜 내 마음을 보여줄 테니.’ 라고, 그녀의 눈이, 그녀의 모든 것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블루는 제 뺨을 감싸고 있던 그녀의 손에서 힘이 스르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이제 이 손을 붙잡고 어리광을 부릴 수도, 장난스럽게 말을 돌릴 수도 없었다. 판이 바뀌었다. 이것은 더 이상 ‘고민 많은 후배’와 ‘그런 후배를 챙겨주는 선배’의 역할놀이가 아니었다. 이것은 ‘윤재안’이라는 남자의 가장 깊고 어두운 방 문 앞에 선 ‘윤재희’라는 여자의 조용한 노크였다. 문을 열어줄 것인가, 아니면 못 들은 척 숨어버릴 것인가.


“…….”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그녀의 눈을 마주 볼 뿐이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버린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매일 밤 그를 짓누르는 가족의 생계 문제? 아니면, C급 센티넬이라는 꼬리표가 주는 막막함과 불안감? 혹은, 바로 눈앞의 당신을 너무나도 사랑해서, 당신의 모든 불행까지도 내가 다 짊어지고 싶은 이 버거운 욕심? 그 어떤 것을 꺼내놓아도, 그것은 결국 그녀에게 나눠주는 자신의 짐일 뿐이었다. 그는 그녀의 짐을 덜어주고 싶은 사람이었지, 제 짐을 얹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블루는 천천히 그녀의 손을 자신의 뺨에서 떼어내,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마치 귀한 보물이라도 다루는 것처럼, 소중하고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그는 작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자조적인 웃음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고 있었다.


“그거… 진짜 반칙인데요, 선배님.”

결국 입 밖으로 나온 것은 원망 섞인 투정이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감싸 쥔 그녀의 손등에 자신의 이마를 기댔다. 그녀의 시선을 피하려는 비겁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볼 자신이 없었다.


“제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그래요. 듣고 나서, ‘에게, 겨우 그런 거였어?’ 하고 실망하면 어쩌려고. 아니면 너무 무거워서, 듣고 나서 도망가 버리면… 나는 어떡하라고요. 인풋, 인풋이라… 그거 한번 잘못 넣었다가, 선배님이라는 엄청난 시스템이 통째로 다운되어 버리면, 제가 어떻게 책임져요.”

그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나약함을 감추기 위해 애써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 안에는 진심 어린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동시에 그로 인해 그녀가 자신을 떠나게 될까 봐 죽을 만큼 무서웠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녀의 체온을 느끼며 마른 입술을 축였다. 그리고 마침내, 가장 큰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되물었다. 이것은 그의 마지막 방어선이자, 그녀의 진심을 확인하고 싶은 마지막 질문이었다.


“제 어떤 이야기까지… 들어줄 수 있는데요? 제가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가, 어쩌면 선배님이 생각하는 ‘윤재안’이라는 사람을 전부 부숴버릴 수도 있는데. 그래도… 괜찮아요?”

 

일단... 나는, 네가 그정도로 멍청한 애는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그러니까, 괜히 말했다고 후회할지언정, 차라리 없던 일로 해버릴걸 그랬다- 하는 종류. 그런 분간도 못 하진 않을 거라고 봤어. 그리고... 

째려본다.

 야, 니가 날 왜 걱정해. 내가 말하라고 했고, 내가 감당하겠다고 한 거야. 누구 마음대로 내가 무너질 거라고 생각하는거지. 너 나 그렇게 한심해보여? 

피식 웃는다.

 억지로 캐낼 생각은 없고, 말 할 거 없으면 말아. 너 편한대로 해.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블루가 쌓아 올린 모래성을 파도가 쓸어가듯, 그의 모든 가정과 변명을 속절없이 무너뜨렸다. 처음에는 신뢰였다. 자신이 그 정도로 멍청하지 않을 거라는, 후회할 말과 묻어둬야 할 말을 구분할 줄 알 거라는 믿음. 그것은 동정이 아닌, ‘윤재안’이라는 사람 자체에 대한 평가였기에 블루는 순간 멍해졌다. 그녀는 그를 마냥 어리고 철없는 후배로 보는 것이 아니었다. 동등한 인격체로서, 그의 판단력을 존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그녀의 말은 그의 심장을 그대로 꿰뚫는 날카로운 얼음송곳 같았다. ‘야, 니가 날 왜 걱정해.’ 째려보는 그 눈빛과 함께 날아온 직설적인 문장은 블루의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 띵하게 울렸다. 내가 감당하겠다고 했다고. 누구 마음대로 내가 무너질 거라고 생각하냐고. 너 나 그렇게 한심해 보이냐고. 그 모든 문장이 그의 가장 깊은 곳, 그녀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과 그녀에게 짐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그의 오만한 배려를 정확히 겨누고 있었다.

 

블루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마를 대고 있던 그녀의 손등에서 느껴지던 온기가 사라진 자리에, 그녀의 서늘한 시선이 와서 박혔다.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얼마나 큰 착각을 하고 있었는지를. 그는 윤재희라는 여자를 지켜야 할 연약한 존재로, 자신의 어두운 이면을 감당하지 못할 유리 같은 사람으로 멋대로 단정 짓고 있었다. 그녀를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사실은 그녀를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강인함을, 그녀가 가진 그릇의 크기를 제멋대로 재단하고 있었다.

 

마지막에 터져 나온 그녀의 피식하는 웃음과 ‘말할 거 없으면 말라’는 무심한 허락은, 오히려 그에게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그에게 모든 선택권을 돌려주는 마지막 배려였다. 억지로 캐물을 생각도 없고, 부담을 줄 생각도 없다는, 지극히 윤재희다운 방식의 존중. 그녀는 그에게 문을 열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문 너머의 세상이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약하지 않다고, 문을 열어도 나는 무너지지 않는다고 말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블루는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다가, 결국 허,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어버렸다. 이번에는 자조가 아닌, 완벽한 패배를 인정하는 항복의 웃음이었다. 그는 의자 등받이에 깊게 몸을 기댔다. 온몸의 긴장이 풀려나가는 기분이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가, 거칠게 쓸어내렸다.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그는 이 여자 앞에서 더 이상 어떤 것도 숨길 수 없었고, 숨겨서도 안 되었다.


“……하, 진짜….”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위스키 잔을 들어, 남은 얼음까지 털어 넣어 단숨에 들이켰다. 차가운 액체가 타는 듯한 목구멍을 식혀주었지만, 심장의 열기는 가라앉지 않았다. 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와… 진짜 한 대 제대로 맞은 기분이네요. 내가… 내가 선배님을 그렇게 보고 있었구나. 한심하게요? 아뇨, 전혀요. 정반대예요. 너무 대단해서, 너무 강한 사람이라서… 나 같은 놈의 시시콜콜한 고민 따위는, 당신의 세계에 먼지 한 톨만큼의 얼룩도 남기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뭐라고… 감히.”

그는 이제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똑바로, 그 나른하지만 모든 것을 꿰뚫는 눈동자를 마주했다. 처음으로, 그는 ‘센티넬 블루’의 가면도, ‘싹싹한 후배 윤재안’의 가면도 아닌, 스물여덟의 불안정한 청년, 그 자신의 맨얼굴로 그녀 앞에 섰다. 그녀가 그에게 등을 돌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그녀를 과소평가했다는 부끄러움에 묻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알았어요. 말할게요. 대신, 듣고 나서 후회해도 난 몰라요. 선배님이 듣겠다고 했으니까. 내 고민… 별거 아니에요. 진짜로. 그냥… 돈이 좀 필요해요. 아주 많이. 동생들 학비랑, 어머니 병원비랑… 뭐, 그런 거. 그래서 이 직업이 아니면 안 돼요. C급이라 월급은 얼마 안 되지만, 그래도 여기서 버텨야 해요. 어떻게든 빨리 승급해서, 돈 벌어서… 가족들 먹여 살려야죠. 그래서 불안해요. 매일 밤, 내가 조금이라도 실수해서 잘리면 어떡하나. 능력이 부족해서 도태되면 어떡하나. 아니면, 재수 없게 임무 나갔다가 죽어버리면, 남은 가족들은 어떡하나. …그런 생각들 때문에 잠을 잘 못 자요. 이게 내 진짜 고민이에요. 시시하죠?”

그는 한 번 터져 나오자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나오는 말들을 덤덤하게 내뱉었다.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건조하게.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절박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것이 그의 현실이었고, 그가 매일 싸워야 하는 괴물의 이름이었다. 그는 말을 마치고, 다시 한번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이제 공은 그녀에게 넘어갔다. 이 지질하고 현실적인 고민을 들은 그녀는,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시시하긴 뭐가. 네가 고민하는게 오늘 점심 메뉴라고 해도, 그게 고민이 된 이상 그 사람에게는 간단한 문제가 아닌 거잖아. 너는... 왜 너만 안 돌봐? 자기도 케어 못 하면서 왜 남을 챙겨주는 데에만 급급하는데? 

고민한다.

 ... 현실적인 조언 필요해? 아니면... 

등을 쓸어내려준다.

 좀, 위로나 해줄까.

그녀의 첫마디는 예상했던 그 어떤 반응과도 달랐다. ‘에게, 겨우 그거였어?’ 하는 실망도, ‘힘들었겠네’ 하는 값싼 동정도 아니었다. ‘시시하긴 뭐가.’ 그녀는 그의 고민을 폄하하지 않았다. 점심 메뉴조차 고민이 되면 무거운 문제라는, 그 지극히 단순하고 명쾌한 논리로 그의 가장 큰 두려움, ‘내 고민은 하찮다’는 자기검열을 단번에 부수어버렸다. 블루는 그 말에 마치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게는 그 누구도 해주지 않았던, 가장 근본적인 인정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그녀의 질문은 그의 심장을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너는... 왜 너만 안 돌봐? 자기도 케어 못 하면서 왜 남을 챙겨주는 데에만 급급하는데?” 그 말은 그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송곳 같았다. 스물여덟 해 동안 ‘장남 윤재안’으로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스스로에게 던져보지 못했던, 그러나 늘 마음 한구석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질문. 괜찮은 척, 강한 척, 언제나 남을 먼저 챙겨야 한다는 강박. 그녀는 그의 모든 위선을, 그가 애써 감추고 있던 가장 연약한 속살을 정확하게 들추어냈다.

 

그리고 그때였다. 그의 등 위로, 조심스럽고 따뜻한 손길이 닿았다. 위아래로 천천히, 서툴지만 다정한 움직임으로 등을 쓸어내려주는 그 손길에 블루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온몸의 신경이 등으로 쏠리는 것 같았다. 그가 늘 남들에게 해주던 위로의 방식. 아플 때마다 어머니가 해주시던 그 손길. 그것을 지금, 윤재희가 그에게 해주고 있었다. 그 사소한 접촉이 불러일으킨 파문은, 그 어떤 강력한 가이딩보다도 거대하게 그의 내면을 흔들었다. 눈가가 뜨거워졌다. 미치겠네, 진짜.

 

블루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고개를 푹 숙인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에게 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나약함을 고백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비참했는데, 그녀의 위로 한마디와 손길 한 번에 이렇게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자신이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손바닥 안으로 뜨거운 것이 차오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는 결국 소리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를, 꺽꺽대는 소리가 손바닥에 막혀 뭉개져 흘러나왔다.


“……아, 진짜……. 사람 비참하게 만드는 방법도 여러 가지네요, 선배님.”

겨우 흘러나온 목소리는 짙게 잠겨 있었다. 그는 한참 만에야 얼굴을 감쌌던 손을 내리고, 벌게진 눈으로 그녀를 마주 보았다. 애써 웃으려는 입꼬리가 경련하듯 떨렸다. 그녀의 손은 여전히 그의 등을 토닥이고 있었다. 그 꾸준한 온기가, 그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마저 녹여내리는 것 같았다. 현실적인 조언과 위로. 그녀는 또다시 그에게 선택지를 주었다. 하지만 지금 블루에게는, 그 어떤 선택도 의미가 없었다.


“……그 손, 안 치우면… 나 진짜 울어버릴지도 몰라요.”

그의 말은 협박이었지만, 동시에 애원에 가까웠다. 제발, 그만하라는 뜻이 아니었다. 제발, 멈추지 말아 달라는, 이 위로를 거두어가지 말아 달라는 간절한 호소였다. 그는 테이블 위로 상체를 수그려,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그녀의 품에 완전히 안기는 것은 차마 할 수 없는, 그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그는 그녀의 제복에서 나는 드라이한 향을 들이마시며, 눈을 감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는 누군가에게 온전히 제 무게를 기대고 있었다.


“그냥… 그냥, 조금만, 이렇게 있어요. 조언도 필요 없고, 위로도 필요 없으니까. 그냥… 이렇게만 좀.”

그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져, 거의 속삭임처럼 변했다. 그는 이제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가족도, 돈도, 미래에 대한 불안도. 오직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등을 쓸어내려주는 그녀의 손길과, 이마를 통해 전해져 오는 그녀의 체온, 그리고 그의 세계를 온통 채우고 있는 그녀의 존재감만을 느끼고 싶었다. 그는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 어린아이처럼 조용히 그녀가 주는 온기를 탐했다.

 


... 치우라는 거야, 가만히 있으라는 거야. 

피식 웃으며 토닥여준다.

 하여간... 선배 부려먹는 후배 주제에.

그녀의 피식하는 웃음소리와 함께, 등을 토닥이는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더 다정하고, 조금 더 일정한 리듬을 갖게 된 것 같았다. 치우라는 거냐, 가만히 있으라는 거냐. 그 장난스러운 핀잔은 블루의 귓가에 윙윙거리며 맴돌았다. 선배를 부려먹는 후배 주제에. 그 말은 그의 마지막 남은 방어기제마저 부드럽게 허물어 내리는, 너무나도 윤재희다운 위로였다.

 

블루는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 소리 없이 웃었다.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공기가 폐부를 떨리게 했다. 어깨가 잘게 들썩였다. 그녀의 말은 맞았다.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를 부려먹고 있었다. 그녀의 시간을, 그녀의 감정을, 그녀의 다정함을.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공범이 되어 세상을 적으로 돌리겠다고 호언장담했던 남자는 어디 가고, 고작 자신의 지질한 현실을 고백한 뒤 그녀의 위로에 어린애처럼 매달리고 있는 꼴이라니. 정말이지, 한심하고 우스웠다.

 

그녀의 손길이 계속되자, 결국 참아왔던 것이 터져 나왔다.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그의 눈꼬리를 타고 흘러내려, 그녀의 흰 제복 어깨 위로 툭, 하고 떨어졌다. 작은 얼룩을 만들었다. 그는 그것을 필사적으로 숨기고 싶었지만, 한번 터져 나온 감정의 둑은 그리 쉽게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입술을 짓씹으며,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더 깊이 묻었다. 제복 천이 축축하게 젖어 드는 감각이 느껴졌다. 비참했지만, 동시에 지독한 안도감이 온몸을 감쌌다.


“……그걸 이제 알았어요?”

한참 만에 흘러나온 그의 목소리는 젖은 솜처럼 무겁고 축축했다. 그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그녀의 어깨에 대고 웅얼거렸다. 원망인지 애원인지 모를, 어린아이의 투정 같은 목소리였다.


“선배 부려먹는 거, 제가 전문이잖아요. 그러니까… 지금도 그냥 좀, 부려먹힐 준비나 해요. 가만히 있으라는 뜻이잖아요, 당연히. 그렇게 토닥여주는 거… 지금 멈추면, 진짜 나쁜 사람이에요, 선배님은.”

그는 스스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저 본능적으로, 이 온기가 사라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녀의 체온, 그녀의 향기, 그녀의 다정한 손길. 이 모든 것이 지금 그를 살게 하는 유일한 것이었다. 그는 슬쩍 고개를 들어, 붉어진 눈으로 그녀의 턱선을 올려다보았다. 엉망인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아, 시선은 차마 마주치지 못했다.


“그러니까… 조언도, 위로도 됐고…. 그냥 지금처럼만… 나한테 좀 빌려줘요, 선배님. 당신 시간, 당신 어깨… 딱 5분만. 아니, 10분만. 이 등신 같은 후배 놈, 정신 좀 차릴 때까지만.”

그의 말은 더 이상 농담이나 어리광이 아니었다. 스물여덟의 윤재안이 태어나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내보이는, 날것 그대로의 SOS 신호였다. 그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그녀가 자신을 밀어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자신이 감히 연약하다고 착각했던,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다정한 사람이었으니까.

 

조용히 토닥인다.

 흠... 근데 있지. 꼭 정신차리고 살 필요는 없는 것 같더라. 그렇잖아. 시간 허비하고, 술만 퍼마시고, 인생 쓰레기 같이 살면 사람이 돌연사 해? 그런 건 아니거든. 그냥... 살아있으니까 사는 거고, 할 게 있으니까 하는 거 아닐까.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 너무 억누르지 말고. 

고민한다.

 이 얘기 들으면 날뛰는 어린 애들도 있는데, 넌 안 그럴 것 같으니까 하는 말이야. 너는... 남을 생각하는 것만큼 너를 조금 더 생각하면 좋겠다.

그녀의 손길은 꾸준했다. 아이를 달래는 듯, 길 잃은 짐승을 다독이는 듯, 일정한 간격으로 등을 두드리는 그 온기는 블루가 꽁꽁 걸어 잠갔던 마지막 이성의 빗장마저 녹여내렸다. 그는 그녀의 어깨에 기댄 채, 그녀가 들려주는 나직한 목소리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꼭 정신 차리고 살 필요는 없다는 말. 살아있으니까 사는 거고, 할 게 있으니까 하는 거라는 말. 그 말들은 마치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그가 살아온 세상의 법칙과는 너무나도 다른 언어처럼 들렸다.

 

블루는 스물한 살,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던 그 날 이후로 단 한 순간도 정신을 놓아본 적이 없었다. 슬퍼할 시간도, 방황할 여유도 사치였다. 그는 울고 있는 어머니와 망연자실한 동생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이었다. ‘정신 차려야 한다’는 말은 그의 생존 주문이었고, ‘억누르는 것’은 그의 일상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그 모든 것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고 있었다.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라고. 그 너무나도 무책임하고, 그래서 지독하게 다정한 위로에 그는 기댄 어깨 너머로 허,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눈물은 어느새 멎어 있었지만, 심장이 대신 울고 있는 것 같았다.


“……하, 진짜….”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제복 어깨에 선명하게 남은 젖은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부끄러움이 뒤늦게 밀려왔지만, 그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제 그의 나약함의 증거가 아니라, 그녀가 그의 약함을 기꺼이 받아들여 주었다는 증표처럼 느껴졌다. 그는 붉어진 눈가와 엉망이 된 얼굴을 하고서도, 처음으로 그녀 앞에서 조금은 가벼워진 표정으로 마주 앉았다. 그녀의 마지막 말, 남을 생각하는 것만큼 너를 조금 더 생각하면 좋겠다는 그 말이 귓가에 계속해서 맴돌았다.


“그거, 진짜 위험한 말인 거 알아요? 선배님.”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잠겨 있었지만, 이전의 절박함 대신 옅은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제 칵테일 잔과 그녀의 위스키 잔을 번갈아 보다가,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토닥여주던 그 손. 그 따뜻한 온기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만약에… 진짜 선배님 말대로, 나 자신을 먼저 생각하기 시작하면 어쩌려고요. 가족들 먹여 살릴 걱정, C급 센티넬로 잘릴 걱정, 그런 거 다 집어치우고. 그냥 딱 하나, 내가 지금 제일 하고 싶은 것만 생각하면… 감당할 수 있겠어요? 선배님은?”

그의 시선이 집요하게 그녀를 파고들었다. 그 눈빛은 더 이상 불안에 떨고 있지 않았다. 대신, 그녀가 던져준 ‘허락’을 빌미로,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욕심을 품고 있는지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은 제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마치, 도망가지 말라는 듯이.


“내가 지금 제일 하고 싶은 거. 그게 뭔지 알아요? 이렇게 선배님 손 잡고, 술 마시고, 시시콜콜한 얘기하는 거. 그리고 이 시간이 안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거. 내일 아침 훈련도, 당장 내야 할 동생 등록금도 다 잊어버리고… 그냥, 당신 옆에만 있고 싶다고 생각하는 거. …이런 이기적인 생각만 하게 될 텐데. 그래도 괜찮아요?”

그는 그녀에게 되묻고 있었다. 당신이 나에게 ‘너를 생각하라’는 위험한 주문을 걸었으니, 그 결과 또한 당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듯이. 그것은 어리광 섞인 협박이자, 그녀의 허락 아래 이제 막 싹을 틔우기 시작한, ‘윤재안’의 가장 솔직하고 이기적인 욕심이었다. 그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의 인생을 통째로 뒤흔든 그녀가, 그의 이기심마저 받아줄 수 있을지를.

 

응, 그러든가... 

피식 웃는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거 다 하라고 해서 밖에나가서는 사람 죽일 애 아니잖아. 가족들 버릴 사람 아니잖아. 해야 할 일은 제대로 분간하는 사람이잖아. 그거면 된 거지, 뭐... 

고민한다.

 가족 걱정 다 좋고 사정 알겠는데... 네가 너를 돌보지 않아서 쓰러지면? 그럼 남은 사람들은 어떡하는데? 그걸 위해서라도 네 생각을 해. 니가 일단 있어야, 다른 사람들을 챙길 여유가 생겨. 알아들어?

그녀의 입가에 걸린 피식하는 웃음. 블루는 그 소리에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자신이 잔뜩 무게를 잡고, 비장하게 던졌던 ‘감당할 수 있겠냐’는 질문이, 그녀의 그 가벼운 웃음 한 번에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어이가 없어서, 그리고 그 어이없는 상황이 너무나도 안심이 되어서, 그는 저도 모르게 잡고 있던 그녀의 손에서 힘을 풀었다. 그녀는 그의 허세를, 그가 애써 만들어낸 위태로운 분위기를 처음부터 꿰뚫어 보고 있었다. 사람을 죽일 애도, 가족을 버릴 사람도 아니라는 그 담담한 평가는 그 어떤 미사여구보다 더 큰 신뢰를 담고 있었다.

 

하지만 진짜는 그 다음이었다. 네가 너를 돌보지 않아서 쓰러지면, 남은 사람들은 어떡하냐는 그 질문. 그것은 위로가 아니었다. 그녀가 약속했던 ‘무거운 조언’이었다. 블루의 머리를 둔기로 내리치는 듯한, 서늘하고 현실적인 일격. 그는 단 한 번도 그 가능성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이 쓰러진다는 가능성. 자신이 무너지면, 그가 지켜야 할 모든 것이 함께 무너진다는 그 끔찍한 진실. 늘 남을 위해 자신을 채찍질하는 것이 최선이라 믿어왔는데, 그녀는 그 가장 근본적인 전제를 뒤집어 버렸다. 너를 돌보는 것이, 이기심이 아니라 너의 가장 큰 책임이라는, 잔인할 정도로 명확한 논리였다.

 

그는 할 말을 잃었다. 방금 전까지 눈물을 글썽이며 그녀의 어깨에 기대던 어리광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스물여덟의 ‘윤재안’이 마주한 냉정한 현실만이 남았다. 그녀는 그의 감정에 휩쓸려주지 않았다. 대신, 그가 가장 외면하고 싶었던 문제의 핵심을 정확하게 짚어냈다. ‘알아들어?’ 그 마지막 확인 사살과도 같은 물음에, 블루는 대답 대신 마른 침을 삼켰다. 그리고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처음에는 작게 시작된 웃음이, 점차 어깨를 들썩이게 할 만큼 커졌다.


“……하, 진짜… 사람을 아주, 발가벗기시네요, 선배님은.”

그는 고개를 저으며 웃음을 멈추려 애썼지만, 한 번 터져 나온 감정은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그는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들어,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댔다. 그녀의 서늘한 손등이, 열이 오른 제 뺨에 기분 좋게 닿았다. 그는 그 감촉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모든 것을 새로 얻은 사람처럼.


“네, 알아들었어요. 아주… 뼈에 새겨질 만큼, 제대로 알아들었습니다.”

완벽한 패배였다. 그녀의 논리 앞에서, 그녀의 꿰뚫어 보는 통찰력 앞에서, 그는 더 이상 어떤 변명도, 어떤 어리광도 부릴 수 없었다. 그녀는 그가 쳐놓은 모든 방어막을 우회해서, 가장 연약한 중심부에 정확하게 깃발을 꽂았다. 그는 더 이상 그녀에게 ‘강한 척’ 할 필요도, ‘괜찮은 척’ 할 이유도 없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이미 다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책임져요, 선배님. 내가 이제부터 당신 말만 믿고, 나 자신을 돌보기 시작하면… 그래서 더 이기적이고, 더 멋대로 굴고, 더 당신한테 기대려고 하면… 그때도 지금처럼, 이렇게 말해줘야 돼요. 잘하고 있다고. 그게 네가 해야 할 일이라고.”

그는 그녀의 손등에 제 뺨을 부비며, 이제는 숨기지 않고 그녀에게 매달렸다. 그녀가 열어준 문이었다. 이기적이어도 괜찮다는, 너를 먼저 생각해도 괜찮다는. 그렇다면, 그는 이제 망설이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불안에 떨리지 않았다. 대신, 그녀에게서 얻은 확신과, 그녀만이 줄 수 있는 안정감 속에서 태어난, 솔직하고 대담한 요구가 담겨 있었다. 그는 그녀가 이 무책임한 후배를, 기꺼이 책임져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야지, 내가 해야지. 그게 내 역할이고, 그러라고 있는 사람인데... 

피식 웃는다.

 너는 선배를 두고도 써먹는 방법을 모른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대답은, 블루가 예상했던 그 어떤 것과도 달랐다. 책임지겠다는 무거운 약속도, 망설임 섞인 긍정도 아니었다. ‘그래야지, 내가 해야지.’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당연하고, ‘그게 내 역할’이라는 말에는 어떤 의무감이나 부담감도 실려있지 않았다. 그저, 사실을 말할 뿐이라는 듯한 그 나른한 확신. 블루는 그 순간, 자신이 붙들고 있던 마지막 불안의 실낱마저 탁, 하고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어지는 ‘선배를 써먹는 방법을 모른다’는 핀잔과 함께 터져 나온 그녀의 피식하는 웃음소리는,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그의 세상에 부드러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아.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얼마나 바보 같은 걱정을 하고 있었는지. 이 사람은 처음부터, 그가 기댈 수 있는 가장 단단한 벽이 되어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저 자신이 그 벽을 앞에 두고 문을 열 용기가 없었을 뿐. 모든 것을 잃을까 두려워, 가장 소중한 것을 얻을 기회마저 걷어차고 있었다.

 

뺨에 닿아있던 그녀의 손등 위로, 뜨거운 것이 다시 차오르는 듯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눈물이 아니었다. 온몸의 피가 심장으로 몰려들었다가, 다시 손끝 발끝까지 환하게 퍼져나가는 듯한, 벅찬 환희였다. 블루는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그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위태로운 그림자가 어른거리지 않았다. 대신, 눈앞의 연인을 향한, 숨길 수 없는 깊은 애정과 경외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는 결국,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허탈하면서도, 모든 것을 얻은 사람처럼 크고 환한 웃음이었다.


“……푸흐, 하하하! 아, 진짜….”

그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손을 쥔 채, 제 이마를 그 손등에 쿵, 하고 가볍게 박았다.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지금 이 감정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안도? 기쁨? 아니, 그런 단어로는 부족했다. 구원. 그래, 차라리 그 단어가 더 가까울지도 몰랐다. 지독한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가라앉던 자신을, 그녀가 가볍게 손을 뻗어 수면 위로 건져 올린 기분이었다.


“그걸 지금 알았네요, 제가. 선배 써먹는 방법을 진짜 하나도 몰랐네. 이렇게 쉽고, 이렇게 간단한 거였는데.”

한참을 웃던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웃음기 때문에 눈가가 다시 붉어져 있었지만,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맑고 편안했다. 그는 그녀의 손을 뺨에서 떼어내, 자신의 입술 앞으로 가져왔다. 그리고는, 경건한 서약이라도 하듯, 그녀의 손등 마디마디에 차례대로 입을 맞췄다. 쪽, 쪽, 하고 가볍고 다정한 소리가 바의 소음을 배경으로 선명하게 울렸다.


“그럼 이제부터 제대로 써먹어 볼게요, 선배님. 아주 귀찮게, 아주 집요하게. 후회해도 소용없어요. 당신이 먼저 그러라고 허락한 거니까. …고마워요, 진짜. 그냥… 다.”

그의 목소리는 웃음 끝에 조금 잠겨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심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숨기거나, 그녀의 배려를 시험하지 않았다. 그녀가 내민 손을, 그는 이제 온 마음을 다해 붙잡을 작정이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그녀의 손바닥에 깊게 입을 맞춘 뒤, 그 손을 자신의 심장이 뛰고 있는 가슴팍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에게, 이 모든 변화의 증인이 되어달라는 듯이.

 

yunico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