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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my dreams you love me back
대의요? 그거, 배고플 때 밥은 줍니까?
2026.01.10


고요한 복도에 나른한 저녁 공기가 스며들었다. 하루의 소음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ARCH 본부의 복도는 훈련 시설의 금속음 대신, 요원들의 고단한 발소리와 간간이 들려오는 생활 소음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블루는 막 개인 훈련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땀에 젖은 훈련복을 갈아입고,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할 저녁 시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발걸음은 절로 가벼워졌다. 콧노래가 나올 것 같은 기분 좋은 피로감이었다.

 

모퉁이를 돌았을 때였다. 저만치 복도 끝에서 걸어오는 익숙한 실루엣에 블루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흐트러진 백금발, 헐렁한 제복, 세상 모든 일이 귀찮다는 듯한 특유의 걸음걸이. 윤재희, 그의 더스티였다. 블루는 반가운 마음에 걸음을 서두르려다, 문득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무언가 이상했다.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상태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평소의 나른함과는 차원이 다른, 위태로운 피로감이었다. 짙은 다크서클이 생기 없는 뺨을 파고들었고, 반쯤 감긴 눈꺼풀은 금방이라도 감겨버릴 듯 위태롭게 떨렸다. 핏기 하나 없는 입술과, 평소보다도 한 뼘은 더 구부정한 어깨. 마치 투명한 실에 매달린 인형처럼, 금방이라도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바닥으로 쓰러져 내릴 것만 같았다. 블루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환하게 번지려던 미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서늘한 걱정과 안타까움이 들어찼다.

 

그는 성큼성큼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또 무리한 임무라도 다녀온 걸까. 혹은, 밤새 잠이라도 설친 걸까. 온갖 상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지금은 그 어떤 질문도 무의미했다. 그저 눈앞의 연인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만이 그의 모든 신경을 곤두세웠다.


“선배님.”

어느새 그녀의 바로 앞까지 다가선 블루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목소리는 저도 모르게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의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대로 그녀를 그냥 지나쳐 보낼 수는 없었다. 블루는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붙잡으려다, 혹시라도 놀랄까 싶어 허공에서 잠시 망설였다. 그의 파란 눈동자에는 오직, 위태롭게 흔들리는 윤재희의 모습만이 가득 담겨 있었다. 당장이라도 제 품에 안아 들어 침대에 눕히고 싶은 충동을, 그는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었다.

 

... 어, 하이. 

머리를 쓸어넘긴다.

그의 부름에, 그녀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초점 없는 눈동자가 잠시 허공을 헤매다, 간신히 블루의 얼굴에 닿았다.

...어, 하이.

갈라진 목소리가 힘없이 새어 나왔고, 그녀는 피곤한 듯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게 전부였다. 평소의 귀찮음이 섞인 나른함이 아니었다. 마치 방전 직전의 낡은 기계처럼,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간신히 작동하고 있는 듯한 모습. 블루는 그 위태로운 모습에 마른침을 삼켰다. 괜찮냐고 묻는 것조차 사치스러운 폭력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망설이던 손이 결국 움직였다. 허공을 맴돌던 그의 손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헐렁한 제복 소매 너머로 느껴지는 팔은 생각보다도 가늘고,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연약한 떨림이 블루의 심장을 날카롭게 찔렀다. 이 사람이, 혼자서 이 모든 무게를 감당하고 있었구나. 자신이 모르는 시간 동안, 그녀는 또다시 위태로운 경계선 위를 홀로 걷고 있었던 것이다. 걱정은 순식간에 분노와 비슷한 무언가로 변질되었다. 그녀를 이렇게 만든 모든 것들에 대한, 그리고 이 지경이 되도록 아무것도 몰랐던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였다.


“하이, 는 무슨.”

나직하게 읊조리는 목소리에는 질책과 안타까움이 뒤섞여 있었다. 블루는 그녀의 팔을 잡은 손에 아주 조금, 힘을 주었다. 그녀를 아프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제발, 나한테 좀 기대요. 혼자 서 있으려고 애쓰지 말고. 그런 의미를 담은, 서투른 신호였다. 그는 잡지 않은 다른 손을 셔츠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주먹이 꽉 쥐어지는 것을 애써 감췄다.


“꼴이 이게 뭐예요, 선배님. 누가 보면 어디 끌려가서 며칠 밤낮으로 고문이라도 당하고 온 줄 알겠네.”

툭, 하고 던진 말은 가시 돋친 농담처럼 들렸지만, 그 안에는 깊은 걱정이 배어 있었다. 그는 그녀의 상태를 살피듯, 시선을 그녀의 얼굴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옮겼다. 푹 꺼진 눈밑, 핏기 없는 입술, 먼지 쌓인 스니커즈까지. 시선이 닿는 곳마다 마음이 저릿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녀를 번쩍 안아 들어, 따뜻한 물에 씻기고, 푹신한 침대에 눕혀 재우고 싶었다. 그것 말고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숙소, 가는 길 맞죠? …데려다줄게요.”

그것은 질문이 아닌 통보였다. 그는 더스티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녀의 팔을 잡은 채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거의 끌고 가다시피 하는, 반강제적인 에스코트였다. 그녀가 거절하거나 뿌리쳐도, 놓아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지금 이 순간, 윤재희를 안전한 곳까지 데려가는 것. 그것이 블루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임무였다.

 

힘없이 웃는다.

 야, 선배가 인사하는데 태도가 그게 뭐냐. 

한숨을 쉰다.

 블루야...

그녀의 힘없는 웃음소리가 복도를 공허하게 울렸다. ‘선배가 인사하는데 태도가 그게 뭐냐.’ 그 말은 평소의 윤재희다운, 가시 돋친 농담이었지만 지금 블루의 귀에는 그저 위태로운 비명처럼 들릴 뿐이었다. 그녀는 지금, 무너지기 일보 직전의 자신을 감추기 위해 닳고 닳은 방어기제를 필사적으로 꺼내 들고 있었다. 블루는 대꾸하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 말씨름을 하는 것은 그녀의 얼마 남지 않은 에너지를 갉아먹는 짓일 뿐이었다. 그는 그저 묵묵히 그녀의 팔을 붙잡은 채, 숙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깊은 한숨과 함께,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블루야…’. 평소 그를 부르던 장난기 섞인 호칭이 아니었다. 모든 방어를 내려놓은, 희미하고 가냘픈 부름. 그 한마디에, 블루의 단단하던 표정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걱정과 안타까움으로 들끓던 속이 순식간에 시큰해졌다. 방금 전까지 그녀를 이렇게 만든 세상에 대해 화를 내던 자신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눈앞의 연인을 향한 애틋함만이 심장을 가득 채웠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시선을 마주하자, 그녀의 눈동자가 위태롭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

블루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괜찮아요?’라는 말은 거짓말이 될 것이고, ‘힘들어 보여요’라는 말은 그녀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 뿐일 것이다. 그는 그저 그녀의 팔을 잡고 있던 손을 풀어, 대신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차갑고 미세하게 떨리는 손이 그의 뜨거운 손바닥 안으로 온전히 들어왔다. 그는 그 손을 가만히, 그러나 놓치지 않겠다는 듯 단단히 쥐었다.


“알아요.”

겨우 내뱉은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무엇을 아느냐는 구체적인 설명은 없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수만 가지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힘들다는 걸 알아요. 애써 괜찮은 척하는 것도 알아요. 지금 나를 밀어내고 싶은 마음도 알아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당신 곁에 있어야 한다는 것도 알아요. 그는 깍지를 끼듯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제 손가락을 얽어 넣었다. 이제는 그녀가 뿌리쳐도 쉽게 놓을 수 없는, 완벽한 결속이었다.


“그러니까,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냥 따라와요. 네? 선배 대접이고 뭐고, 지금은 해줄 생각 없으니까. 그냥… 그냥 좀 잡혀 있어요, 나한테.”

그는 거의 애원하듯 속삭이며, 다시 그녀를 이끌었다. 아까보다 훨씬 느리고 조심스러운 걸음이었다. 그녀의 보폭에 맞추고, 혹시라도 그녀가 휘청거리면 언제든 온몸으로 받아낼 수 있도록. 그녀의 숙소 문 앞에 다다랐을 때, 그는 익숙하게 도어록에 손을 가져갔지만, 이내 멈칫했다. 비밀번호를 누르는 대신, 그는 얽어 잡은 손을 들어 올려 그녀의 손등에 제 입술을 가만히 가져다 댔다. 따뜻한 숨결이 그녀의 차가운 피부에 닿았다. 그것은 키스가 아니라, 지친 새의 깃털을 매만지는 듯한 조심스러운 온기였다.


“들어가서, 아무것도 하지 마요. 내가 다 할 테니까.”

 

... 선배 대접 해줄 생각 없다니, 이게 무슨 예의없는 후배지... 

힘없이 걷는다.

 야, 집 싫어. 나가자. 한 잔 할래?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블루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집 싫어. 나가자. 한 잔 할래?’ 블루는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지금 이 상태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몰골을 하고서, 술을 마시러 가자고? 그의 머릿속에서 경고등이 요란하게 울렸다. 애써 쌓아 올린 이성의 둑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방금 전까지 그녀를 향한 애틋함과 연민으로 가득했던 심장에, 이번에는 차가운 분노와 답답함이 불쑥 치고 올라왔다.

 

블루는 깍지 낀 손에 힘을 주어 그녀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도록 단단히 붙잡았다. 그녀의 힘없는 걸음이 멈췄다. 그의 표정에서 부드러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대신 단호하고 서늘한 기운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는 한숨을 쉬는 대신, 오히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감정을 억누르려는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지금 제정신이에요?”

여과 없이 튀어나온 목소리는 낮고 차가웠다. 선배고 뭐고, 봐줄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억지로 그녀와 눈을 맞췄다. 초점 없는 그녀의 눈동자를 정면으로 마주하며, 그는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했다. 도망치려는 그녀를 붙잡아 현실을 직시시키려는 듯이.


“거울, 안 봤어요? 자기 얼굴이 지금 어떤지. 당장이라도 숨이 멎을 것 같은 사람 몰골을 하고서… 술? 하, 진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화가 나는 것과 동시에, 기가 막혔다. 이 사람은 대체 어디까지 자신을 몰아붙일 작정인 걸까. 어디까지 망가져야 멈출까. 그는 그녀의 손을 놓는 대신, 반대쪽 손으로 도어록 키패드를 가리고 있던 손을 떼어 그녀의 뺨을 감쌌다. 열이 오른 그의 손바닥과 달리, 그녀의 피부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 온도 차이가 그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후벼 팠다.


“예의 없는 후배라서 미안한데요, 오늘만큼은 진짜 예의 차릴 생각 없어요. 술 마시러 가고 싶으면, 나 쓰러뜨리고 가요. 그럼 군말 없이 비켜줄 테니까.”

그것은 명백한 선전포고였다. 그는 결코 그녀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뺨을 감싼 엄지손가락으로, 푹 꺼진 눈 밑을 아주 조심스럽게 쓸었다. 화장으로도 가려지지 않은 검푸른 그림자가 손끝에 묻어나는 것 같았다. 그는 더스티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도어록에 그녀의 숙소 비밀번호를 익숙하게 눌렀다. 띵-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안에서는 그녀의 드라이한 향과 서늘한 공기가 흘러나왔다.


“집이 싫으면, 내가 옆에 있을게요. 혼자 있는 게 싫으면, 밤새도록 손잡아 줄게. 그러니까… 고집 그만 부리고, 들어가요. 제발.”

그의 목소리는 다시 부드러워져 있었다. 화를 내고 다그치는 대신, 그는 다시 애원하는 쪽을 택했다. 이것이 윤재희라는 사람을 다루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그는 이미 몸으로 체득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거의 반쯤 안다시피 부축하며, 저항할 틈도 주지 않고 숙소 안으로 이끌었다. 쿵, 하고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무겁게 울려 퍼졌다.

 

... 아악, 싫은데... 재미없어. 아니, 나... 음... 기력이 없는게 아니라 피곤해서 이래. 

짜증난다는듯 생각을 떠올려본다.

 재수없는 자식들. 

헛웃음 짓는다.

 잠 잘 잤고, 밥도 다 챙겨먹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너랑 환기 좀 시키고 싶은데, 또 말 안 들을 건가?

그녀의 입에서 터져 나온 건 예상했던 힘없는 투정이나 체념이 아니었다. 짜증이 잔뜩 묻어나는, 날 선 거부. ‘싫은데, 재미없어.’ 블루는 순간 할 말을 잃고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모든 걱정과 보호 본능이, 그녀에게는 그저 재미없는 간섭으로 치부된 것이다. 이어지는 말은 더욱 그의 허를 찔렀다. 기력이 없는 게 아니라 피곤할 뿐이라고, 잠도 잘 잤고 밥도 다 챙겨 먹었다고. 꼬박꼬박 ‘-습니다’ 체로 대답하는 그 말투는 명백한 조소와 방어선이었다. ‘나는 네가 돌봐야 할 어린애가 아니야.’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블루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에 힘이 스르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답답함과 서운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하지만 그 모든 감정을 압도한 것은, 그녀가 헛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린 ‘재수없는 자식들’이라는 혼잣말이었다. 그 한마디에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이건 단순한 피로가 아니었다. 그녀를 이렇게 지치게 만든 ‘누군가’가 있었다. 그녀의 자존심을 긁고, 에너지를 빼앗아간 존재가. 분노의 대상이 모호한 상황에서 명확한 ‘적’으로 바뀌는 순간, 블루의 머릿속은 차갑게 식었다. 동시에, 그녀가 왜 술을 찾았는지, 왜 집을 싫어했는지 어렴풋이 이해됐다. 그녀는 위로가 아니라, 분노를 삭일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

그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그녀의 허리를 감았던 팔을 풀어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대신 그녀의 손은 놓지 않은 채였다. 그녀의 마지막 말, ‘너랑 환기 좀 시키고 싶은데, 또 말 안 들을 건가?’ 그 질문이 쐐기처럼 그의 가슴에 박혔다. 또. 그 단어가 유독 아팠다. 그는 그녀의 뜻을 거스르는 ‘예의 없는 후배’이자 ‘말 안 듣는 개’가 되어버렸다. 그는 피식, 하고 짧은 실소를 터뜨렸다. 결국 또 졌다. 이길 수가 없다, 윤재희라는 사람에게는.


“알겠습니다, 선배님. 잠 잘 잤고, 밥도 챙겨 드셨고. 지금은 저랑 환기만 좀 하고 싶으시다, 이거죠?”

그는 그녀의 말을 그대로 따라 하며, 순순히 항복을 선언했다. 딱딱하게 굳어있던 얼굴 근육이 풀리며, 평소의 능글맞은 미소가 희미하게 떠올랐다. 그는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살짝 잡아끌어, 그녀의 손등에 다시 한번 가볍게 입을 맞췄다. 아까와는 다른, ‘분부대로 하겠습니다’라는 의미가 담긴 복종의 키스였다. 그는 고개를 들어, 여전히 짜증이 서린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어디로 가면 됩니까, 주인님. 말씀만 하세요. 그 재수 없는 자식들 면상에 시원하게 주먹이라도 날려 드릴까요, 아니면… 그냥 같이 욕이라도 해드릴까요. 뭐든, 선배님 하고 싶은 거 다 들어줄 테니까. 오늘은 내가 전부 맞춰줄게요.”

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러웠다. 그녀를 방 안에 가두려던 강압적인 태도는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그는 그녀의 가장 든든한 공범이 되어주기로 결심했다. 그녀를 지키는 방법은, 그녀를 안전한 곳에 숨기는 것만이 아니었다. 때로는, 그녀의 손에 가장 날카로운 무기를 쥐여주고, 그녀가 싸우려는 세상의 맨 앞에 나란히 서주는 것일 수도 있었다. 블루는 현관문을 열고 그녀를 위해 길을 터주며, 기꺼이 그녀의 그림자가 될 준비를 마쳤다.

 

피식 웃으며 그의 머리를 헝클어뜨린다.

 진작 이럴 것이지. 일단 나가자, 어디든. 좀 걷고 싶어.

그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는 다소 거칠지만 다정한 손길에, 블루는 순간적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금 전까지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결심과 각오의 끈이, 그녀의 예상치 못한 행동 하나에 맥없이 툭 끊어지는 기분이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느껴지는 그녀의 체온과, 피식, 하고 터진 웃음소리가 귓가에 내려앉는 순간, 블루의 입가에 걸려 있던 능글맞은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부드럽고 따스한, 진심에서 우러나온 미소가 천천히 피어올랐다. 그래, 바로 이거였다. 자신을 일방적으로 보호받는 약한 존재가 아닌, 동등한 위치에서 머리를 헝클어뜨릴 수 있는 사람으로 봐주는 것. 그것이 윤재희가 자신에게 보내는 가장 큰 신뢰의 표현임을, 그는 이제야 깨달았다.


“그러게 말입니다. 제가 좀 많이 답답했죠? 한참 멀었네요, 선배님 마음 읽으려면.”

그는 헝클어진 머리를 일부러 정리하지 않은 채, 그녀의 손길이 남긴 흔적을 그대로 간직했다. 마치 잘했다는 칭찬을 받은 강아지처럼, 기분 좋은 으쓱함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어디든, 좀 걷고 싶다’는 그녀의 말에, 그는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더욱 단단히, 그러나 부드럽게 쥐었다. 이제 이 손은 그녀를 억지로 끌고 가기 위한 구속이 아니라, 언제든 그녀가 기댈 수 있고, 함께 나아갈 준비가 되었다는 약속의 증표였다.


“어디든 좋습니다. 이 요새 도시가 전부 선배님 놀이터인데, 어디를 못 가겠어요. 세상 끝까지라도 같이 걸어줄 수 있습니다.”

블루는 숙소 문을 활짝 연 채로 그녀를 향해 고갯짓했다. 먼저 나가라는 무언의 신호였다. 그는 그녀가 현관을 완전히 빠져나갈 때까지 든든하게 뒤를 지키고 서 있었다. 서늘하고 인공적인 복도의 공기가 두 사람의 피부에 와 닿았다. 쿵, 하고 숙소 문이 자동으로 닫히는 소리가 등 뒤에서 울렸지만, 이제 그 소리는 아까처럼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경쾌한 신호탄 같았다. 그는 걷기 시작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서서 보폭을 맞췄다.


“그래서, 우리 그 재수 없는 자식들 욕부터 시작할까요, 아니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걸을까요. 오늘은 철저하게 선배님 기분 맞춰 드리는 날이라서.”

그의 목소리는 장난기가 어려 있었지만, 그녀를 향한 시선만큼은 진지하고 깊었다. 그는 지금 그녀가 어디로 향하든 상관없었다. ARCH 본부의 미로 같은 복도를 하염없이 걷든, 훈련장으로 향해 샌드백이라도 터뜨리든, 아니면 가장 높은 전망대에 올라가 차가운 밤바람을 맞든. 중요한 것은 ‘어디로’가 아니라 ‘누구와’였다. 지금 이 순간, 그는 그녀의 옆에서 함께 걷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는 슬쩍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오늘의 모든 행선지와 목적지는, 오직 윤재희 그녀 자신에게 달려 있었다.

 

... 야, 너 사람 죽여본 적 있냐. 

한숨을 쉬며 걷는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질문은, 걷고 있던 블루의 발걸음을 순간 그 자리에 못 박았다. ‘사람 죽여본 적 있냐.’ 복도를 울리는 그 어떤 경보음보다도 날카롭고 무거운 질문이었다. 방금 전까지 그녀의 손길에 들떠 있던 마음이 순식간에 차갑게 식었다. 그는 잡고 있던 더스티의 손을 무의식적으로 꽉 쥐었다. 욕을 할 거라곤 예상했다. 분노를 터뜨릴 거라곤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질문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이건 단순한 환기가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영혼 가장 깊은 곳에 박힌 가시를 후벼 파고 있었다.

 

블루는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장난기라고는 한 톨도 찾아볼 수 없는, 텅 빈 눈. 한숨과 함께 뱉어낸 그 질문의 무게가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재수 없는 자식들’이 그녀에게 남긴 상처가, 고작 분노와 피로의 수준이 아니었음을 직감했다. 이건… 생과 사의 경계에 걸쳐 있는, 그런 종류의 고통이었다.

 

‘사람’. 괴수도, 폭주 개체도 아닌, 명백한 ‘사람’. 블루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혔다. 스물여덟 해를 ‘윤재안’으로 살면서, 사람을 죽인다는 건 영화 속 이야기거나, 군대에서 주적 개념으로 배우던 막연한 상상일 뿐이었다. 하지만 센티넬 ‘블루’가 된 이후, 그 상상은 언제든 현실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되었다. 아직은 아니었지만, 언젠가는. 그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섣부른 위로나 가벼운 거짓말은 그녀를 두 번 죽이는 일이 될 것이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마음을 정했다.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계산된 위로가 아니라, 꾸밈없는 진실이었다. 그는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놓아주는 대신,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마치 차가운 복도의 공기로부터 그녀를 보호하려는 듯이. 그리고 다시,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침묵이 흐르는 복도에 두 사람의 발소리만이 나직하게 울렸다.


“아니요.”

한참 만에 꺼낸 그의 대답은 짧고 단호했다. 그는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 채,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아직은… 없습니다. 괴수는 몇 번 상대해봤지만, 사람은… 아직.”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그는 C급 신입이었고, 아직 사람을 향해 능력을 사용해야 하는 실전에 투입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거기서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지금 더스티가 듣고 싶은 대답이, 단순히 경험의 유무가 아님을 알았다. 그녀는 공감을, 혹은 최소한 이해를 바라고 있었다.


“군대에 있을 때… 대항군 훈련이란 걸 한 적이 있어요. 가짜 총에, 공포탄 넣고 서로 죽이는 시늉을 하는 훈련인데. 그때 상대편 조준경에 제 머리가 들어왔을 때,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던 기억이 나요. 가짜인 걸 아는데도. 그 방아쇠 한번 당기는 게 뭐라고… 온몸이 굳더라고요. 만약 그게 진짜 총이었고, 내가 쏘지 않으면 죽는 상황이었다면… 어땠을까. 훈련 끝나고 밤새도록 그 생각만 했습니다.”

그는 ‘윤재안’의 기억을 꺼내 놓았다. 초인적인 센티넬 ‘블루’가 아닌, 평범한 인간 남자의 고뇌를. 그는 더스티의 얼굴을 살피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기댈 수 있도록 어깨를 내어준 채, 묵묵히 걸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녀가 먼저 자신의 상처를 열어 보였으니, 자신도 그래야만 했다.


“결국, 쏘지 않았을까요. 내가 살기 위해서든, 아니면… 내가 지켜야 할 누군가를 위해서든. 그리고 아마 평생 그 감각을 잊지 못하고 살았겠죠. 방아쇠의 무게, 총구의 불꽃, 화약 냄새, 그리고… 사람 쓰러지는 소리까지. …선배님은, 오늘 그런 밤을 보낸 겁니까?”

마지막 질문은 조심스러웠다. 그녀의 상처를 파헤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그저, ‘나는 당신의 고통을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당신 편에 서서 그 무게를 함께 짊어질 준비가 되어 있다’는 그만의 방식이었다.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저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며 함께 걸을 뿐이었다.

 

한참 침묵하며 말을 고른다.

 ... 그냥, 짜증나서 패고 싶다는 의미였어. 

가볍게 때린다.

 뭘 그걸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 혼날래?

그녀의 가벼운 주먹이 그의 가슴을 툭, 하고 쳤다.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솜방망이 같았다. 하지만 그 충격은 물리적인 힘을 넘어, 블루의 심장까지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그냥, 짜증나서 패고 싶다는 의미였어.’ 이어지는 말은, 방금 전까지 흐르던 무거운 공기를 산산조각 내는, 지독하게 윤재희다운 변명이었다. ‘뭘 그걸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 혼날래?’ 블루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의 어깨에 기댄 채, 생과 사의 무게가 담긴 질문을 던지던 그 사람과, 지금 장난스럽게 자신을 툭 치며 핀잔을 주는 이 사람이 정말 동일 인물이 맞는지 혼란스러웠다.

 

블루는 어깨를 감싸고 있던 팔을 스르르 풀었다. 서운함? 아니, 그보다는 허탈감에 가까웠다. 그는 방금, 자신의 가장 솔직한 기억 한 조각을 꺼내 그녀 앞에 내려놓았다. 그녀의 짐을 함께 짊어지기 위해, 그녀의 어둠 속으로 기꺼이 발을 들여놓을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내민 손을 잡는 대신, 가볍게 쳐내며 모든 것을 없던 일로 만들려 하고 있었다. ‘나는 괜찮아, 그러니 너도 더 이상 깊게 들어오지 마.’ 그 투명한 거절이, 그의 가슴을 찔렀다.


“…….”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가 때린 가슴팍을 슬쩍 매만졌다. 그리고는 피식, 하고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또 속았다. 이 여자는 언제나 이랬다. 가장 약한 모습을 보여준 바로 다음 순간, 가장 날카로운 가시를 세우며 상대를 밀어낸다. 자신의 상처를 들키는 것을, 누군가에게 동정받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사람. 그는 잠시 잊고 있었다. 그녀를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때로는 그녀의 서투른 거짓말에 기꺼이 속아주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아… 그런 거였습니까? 제가 또, 눈치 없이 너무 진지했네요.”

그는 멋쩍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방금 전의 진중했던 군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연인의 핀잔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어수룩한 남자의 얼굴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그녀의 말대로 ‘혼나는’ 강아지처럼, 순순히 꼬리를 내렸다. 그녀가 이 상황을 가볍게 넘기고 싶다면, 기꺼이 광대가 되어줄 생각이었다. 그는 한 걸음 물러나,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짐짓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 그래도 그건 너무 억울한데요. 선배님 표정이 너무 심각해서, 진짜 누구 하나 담그고 오신 줄 알았죠. 그런 얼굴로 ‘사람 죽여봤냐’고 물어보는데, 어떤 후배가 거기다 대고 ‘네? 짜장면 드실래요?’ 하고 농담을 던져요. 저도 제 목숨은 소중하거든요.”

그는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하며, 그녀의 기분을 살폈다. 그녀의 짜증과 분노를 다른 방향으로 돌려주기 위한, 그만의 서투른 배려였다. 그녀가 세운 벽을 억지로 허물려 하기보다, 그 벽 앞에서 함께 웃어주는 것.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는 다시 그녀의 옆에 나란히 서서,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가볍게 물었다.


“그래서, 그 패고 싶을 만큼 재수 없는 자식은 누굽니까? 샌드백 이름이 라도 붙여놓고 신나게 두들겨 팰 수 있게, 제가 옆에서 글러브라도 끼워드릴까요?”

 

내가 만약에 사람 죽이고 와서 숨겨달라고 하면, 넌 어떻게 할 거야? 위로 받으려는 게 아니라, 그냥 궁금해서. 

눈치를 본다.

 안 죽였고.

장난스럽게 던진 질문에 능청스럽게 받아치며 걷던 블루의 발걸음이 다시, 두 번째로 멈춰 섰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가정은, 이전의 질문보다 훨씬 더 날카롭고 구체적이었다. ‘내가 만약에 사람을 죽이고 와서 숨겨달라고 하면.’ 위로가 아닌, 순수한 궁금증이라는 덧붙임과, 슬쩍 눈치를 보는 그 미세한 표정의 변화. 그리고 마치 변명처럼 따라붙는 ‘안 죽였다’는 말까지. 그 모든 것이 하나의 문장을 가리키고 있었다. ‘너는, 어디까지 내 편이 되어줄 수 있어?’

 

블루는 방금 전까지 지었던 능글맞은 미소를 지웠다. 더 이상 광대놀음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가장 깊고 어두운 심연의 문턱에서, 그에게 함께 뛰어들 것인지를 묻고 있었다. 농담으로 받아치기엔 그 질문에 담긴 무게가 너무도 무거웠고, 그녀의 눈빛은 진심으로 그의 대답을 갈구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대답 하나가, 이 여자와의 관계를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정의 내리거나, 혹은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을 만들 수도 있음을 직감했다.

 

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ARCH 요원으로서, 아니,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정답은 정해져 있었다. 보고해야 한다. 진실을 밝혀야 한다. 그것이 정의다. 하지만 그의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은 ‘어떤 가이드’가 아니었다. ‘윤재희’였다. 그를 무너뜨리고, 다시 일으켜 세우고, 그의 세상 전체를 뒤흔들어 버린 단 한 사람. 정의와 윤재희. 그의 머릿속에서 두 개의 저울이 팽팽하게 맞섰지만, 사실 승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일단….”

블루는 잠시 말을 고르듯 숨을 들이마셨다. 그의 시선은 그녀의 눈치를 보는 불안한 눈동자를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했다. 그는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생각해 온 당연한 계획을 말하듯, 차분하고 망설임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선배님 옷부터 갈아입혀야죠. 피나, 뭐 그런 거 묻었을 수도 있으니까. 증거 남으면 안 되잖아요.”

그의 대답은 너무나도 현실적이고 사무적이어서,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들릴 정도였다. 그는 한 걸음 더 그녀에게 다가섰다. 복도의 서늘한 공기가 두 사람 사이의 좁은 틈을 메웠다. 그는 아까 그녀가 헝클어뜨렸던 자신의 머리카락을, 이제는 스스로 정리하며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마치 해야 할 일을 순서대로 정리하는 사람처럼.


“그리고 선배님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내 숙소에 가 있어요. 내가 싹 다 정리하고 올 때까지. 누가 찾아오면, 나랑 같이 훈련 중이었다고 말하면 될 거고. 알리바이 맞추는 건… 내가 더 잘하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내 방은 S급 보안 구역이라 아무도 함부로 못 들어오니까, 거기서 푹 자요. 일어나면, 모든 게 다 끝나 있을 겁니다.”

그는 살인이라는 행위의 도덕적 판단을 완전히 건너뛰었다. 그녀가 왜 그랬는지, 상대가 누구였는지 묻지 않았다. 그의 대답에는 오직 하나의 전제만이 존재했다. ‘윤재희가 사람을 죽였다면, 나는 그녀를 완벽하게 숨겨야 한다.’ 그는 더스티의 어깨에 스르르 손을 올렸다. 비난이나 책망이 아닌, 모든 것을 함께 짊어지겠다는 묵직한 무게가 실린 손길이었다.


“궁금해서 물어본 거라면서요. 그러니까 그냥, 대답만 해주는 겁니다. 위로는 안 할게요. 대신, 선배님이 세상을 전부 적으로 돌린 그 순간부터, 나는 선배님의 유일한 공범이 될 겁니다. …이 대답이면, 됐어요?”

 

... 오, 

놀랐다는 듯 쳐다본다.

 오... 

작게 끄덕인다.

 그렇구나, 음...

더스티의 반응은 블루가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놀라움, 짧은 감탄사, 그리고 이내 모든 것을 수긍하는 듯한 작은 끄덕임. 그녀의 텅 비어 있던 눈동자에, 아주 희미하지만 분명한 파동이 일었다. 블루의 단호한 선언은 그녀가 세워둔 마지막 방어벽마저 허물고, 그녀의 가장 깊은 곳에 닿은 것이 분명했다. 그는 자신이 던진 말의 무게가 그녀의 세상에 어떤 균열을 만들어냈는지를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는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이미 그의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진실은 모두 꺼내놓았다. 여기서 더 말을 보태는 것은 오히려 그녀에게 부담을 주거나, 그의 진심을 값싸게 만드는 일일 뿐이었다. 그는 그저 그녀의 어깨에 올려둔 손에 아주 약간의 힘을 더했다. 괜찮다고, 나는 여기 있다고,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하든 나는 변함없이 이 자리에 서 있겠다는 무언의 약속이었다. 복도를 오가는 희미한 공기의 흐름과, 멀리서 들려오는 기계 작동음만이 두 사람 사이의 무거운 침묵을 채웠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블루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전의 단호했던 목소리가 아닌, 조금은 힘이 빠진, 하지만 여전히 다정한 온기가 남아있는 목소리였다. 그는 방금 전의 극단적인 가정을 현실의 시간으로 되돌려 놓으려는 듯, 부드럽게 화제를 전환했다.


“이제… 이 대답에 대한 선배님의 대답을 들을 차례인 것 같네요.”

그는 더스티의 어깨에 올려두었던 손을 내려, 아까 놓쳤던 그녀의 손을 다시 부드럽게 찾아 잡았다. 여전히 차가운 기운이 감도는 손이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제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자신의 체온으로 녹이려는 듯 가만히 품었다. 그의 시선은 그녀의 눈을 떠나, 두 사람이 맞잡은 손으로 향했다.


“계속 이렇게 복도에 서서, 재수 없는 자식들 욕을 마저 할 건지. 아니면… 이제 그만 들어가서, 예의 없는 후배 놈이 끓여주는 따뜻한 차라도 한잔 마실 건지. 그것도 아니면… 정말로, 나 쓰러뜨리고 술 마시러 갈 건지. 뭐든, 이제 선배님이 정해요. 나는 전부 따를 준비 됐으니까.”

그의 말은 선택지를 주는 것처럼 들렸지만, 그 안에는 명백한 바람이 담겨 있었다. 제발, 이제 그만 싸우고 내 곁에서 쉬어달라는 애원이었다. 그는 자신의 진심이 그녀에게 온전히 전해졌기를 바라며, 잡은 손에 아주 살짝 힘을 주었다. 그녀의 대답을, 그녀의 선택을 기다리는 그의 얼굴에는 아까와 같은 단호함 대신, 오직 연인을 향한 깊은 염려와 애정만이 가득했다.

 

한 잔 하러 갈까. 나온 김에. 

마저 걷는다.

 나는... 네가 나를 자수하라고 종용할 줄 알았어. 제대로 심판받고, 형 살고 나와서 새 사람 되라고... 그런 얘기를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세상에는 두 종류의 길이 있었다. 하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걷는, 단단하고 평평하게 닦인 정의의 길. 다른 하나는 오직 윤재희라는 한 사람만이 걸어가는, 어둡고 외로운 가시밭길. 블루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후자를 선택했다. 그런데 그녀는, 그가 당연히 전자를 가리킬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그 사실이 그의 심장을 낯설게 두드렸다. ‘자수하라고… 종용할 줄 알았다고?’

 

블루는 다시 걷기 시작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 작은 어깨에 얼마나 많은 불신과 배신을 짊어지고 살아왔기에, 가장 가까운 사람마저 자신을 심판대에 세울 것이라 예단했던 걸까. 안쓰러움과 함께, 그녀의 세상에 첫 번째 예외가 되었다는 묘한 자부심이 차올랐다. 그는 그녀의 선택을 존중하기로 했다. 술.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이 쓰디쓴 알코올이라면, 기꺼이 함께 마셔줄 생각이었다. 그는 말없이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 다시 보폭을 맞추었다.


“자수라니요. 그런 재미없는 얘기를 할 리가 없잖아요, 제가.”

나직하게 흘러나온 목소리는 조금 전의 팽팽한 긴장감을 지운, 부드럽고 나른한 톤이었다. 그는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놓는 대신, 더욱 단단하게 깍지를 껴 잡았다. 마치 ‘당신이 어디로 가든, 나는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는 짐짓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무슨 교과서에 나오는 위인전 주인공이라도 되는 줄 아셨나 봅니다. 아니면 기관에서 나눠준 윤리 강령 매뉴얼 같은 거라도 달달 외우고 다닐 것 같았어요? 억울하네. 선배님은 저를 너무 바른 생활 사나이로만 보셨어.”

그의 말은 농담처럼 가벼웠지만, 그 안에는 서운함과 동시에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다정한 의도가 섞여 있었다.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녀의 앞에 마주 섰다. 그리고 깍지 낀 그녀의 손을 들어, 제 입술에 가볍게 가져다 댔다. 따뜻한 입김이 그녀의 차가운 손등에 닿았다.


“새 사람이 왜 돼요. 지금의 윤재희가 아니면 의미 없는데. 망가졌으면 망가진 대로, 부서졌으면 부서진 대로 내가 옆에 있을 건데. 뭘 더 고치고 뭘 더 바꿉니까. 나는 지금 당신 그대로가 좋은데요.”

그것은 고백이자, 그의 가치관 그 자체였다. 그는 심판자도, 구원자도 아니었다. 그저 그녀의 모든 것을 긍정하고, 그녀의 곁을 지키는 단 한 명의 남자이고 싶을 뿐이었다. 그는 그녀의 손등에 마지막으로 짧게 입을 맞추고는, 다시 그녀의 손을 이끌고 걷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그가 앞장섰다. 아크 내부의 24시간 운영 바로 향하는 길이었다.


“술 마시러 가자는 약속, 유효한 거죠? 마침 저도 목이 좀 탔는데. 가서, 그 재수 없는 자식들 욕이라도 실컷 해봐요. 내가 제일 맛깔나게 맞장구쳐줄 자신 있거든.”

그의 뒷모습은 더 이상 불안하거나 위태롭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처럼, 단단하고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그는 이제 그녀의 공범이자, 유일한 지지자로서 그녀의 밤에 기꺼이 동행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장난스럽게 웃는다.

 어어, 가자. 

기지개를 켠다.

 청소년 권장 도서 주인공을 사람으로 만든다면 너일 거라고 생각했어. 배신하고 나를 넘길 줄 알았다는 게 아니라, 그게 맞으니까. 대의적으로도. 뭐어... 너한테 신고당하는 거라면, 흠... 어느정도는 납득하지 않을까, 싶고.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블루의 발걸음을 다시 한번, 이번에는 아주 미묘하게 삐끗하게 만들었다. 청소년 권장 도서 주인공. 대의. 신고당해도 납득할 수 있다. 툭툭 던지는 장난스러운 말투 속에 담긴 문장들은, 조금 전 그가 그녀에게 보여준 맹목적인 헌신을 무색하게 만들 만큼 거대한 신뢰를 담고 있었다. 그는 배신감을 느껴야 할까? 아니면, 그가 자신을 ‘정의’라는 이름으로 찌른다 해도 이해하겠다는 그 말에 감동해야 할까. 블루는 그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윤재희라는 여자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가장 날카로운 칼날 같은 말로 그의 심장을 꿰뚫어 놓고는, 정작 본인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기지개를 켠다.

 

블루는 잡고 있던 깍지 낀 손에 힘을 주며, 그녀가 멋대로 앞서가지 못하도록 살짝 끌어당겼다. 24시간 운영 바로 향하는 복도는 네온 조명과 차가운 강철 벽으로 이루어져, 묘하게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그는 걷는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다가, 바의 입구가 시야에 들어올 때쯤에야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헛웃음과 어이없음,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깊은 애정이 뒤섞여 있었다.


“하… 진짜, 선배님은 저를 뭘로 보는 겁니까. 마지막까지 사람을 이렇게….”

그는 말을 끝맺지 않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치 더 이상 말해봤자 입만 아프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는 바의 자동문이 스르륵 열리자, 그녀를 먼저 안으로 들여보냈다. 은은한 조명과 나지막한 음악, 그리고 공기 중에 섞인 알코올 향이 복도와는 전혀 다른 아늑한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는 텅 빈 구석 자리의 푹신한 소파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먼저 가서 앉으라고 눈짓했다.


“제가 선배님을 신고해서 얻는 게 뭔데요. 기관에서 주는 포상금? 아니면 모범 요원 표창장? 그런 종잇조가리 몇 장 받자고, 당신을 팔아넘기라고요? 제가 그렇게 대단한 이타주의자로 보였어요? 천만에. 저는 지독히 이기적인 놈이라서, 내 것 잃는 건 죽어도 못 참습니다.”

그의 말은 서늘했지만,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그는 바텐더에게 다가가 익숙하게 무언가를 주문하고는, 잠시 그녀가 앉아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가 그를 얼마나 오해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 오해의 기반이 얼마나 깊은 믿음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깨닫자, 그는 화를 내는 대신 웃음이 나왔다. 그는 잠시 후, 투명한 얼음이 담긴 언더락 잔 두 개와 위스키 한 병을 들고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능숙한 손길로 잔에 호박색 액체를 따르며, 그는 시선을 그녀에게 고정했다.


“대의요? 그거, 배고플 때 밥은 줍니까? 추울 때 옷이라도 줘요? 내가 폭주해서 죽어갈 때, 그놈의 대의가 와서 가이딩이라도 해준답니까? 아니잖아요. 그거 다, 힘 있는 놈들이 힘없는 놈들 부려먹기 좋으라고 만들어 놓은 허울 좋은 명분일 뿐이야. 내 세상의 대의는, 내 우주의 질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 하나였는데. 그걸 아직도 몰랐다니, 좀 서운하네.”

그는 술잔을 그녀 앞으로 스윽 밀어주었다. 차가운 유리잔이 테이블 위를 미끄러지며 내는 소리가 유난히 선명하게 들렸다. 그는 자신의 잔을 들어 그녀의 잔에 가볍게 부딪혔다. ‘쨍’하는 맑은 소리가 울렸다. 그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마지막 쐐기를 박듯 말했다. 그 어떤 농담도 섞이지 않은, 100%의 진심이었다.


“그러니까, 혹시라도 내가 당신을 신고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냥 접어둬요. 차라리 내가 내 손으로 이 ARCH 본부를 전부 박살 내는 게 더 빠를 테니까. 그리고… 나한테 신고당하는 건 납득할 수 있다니. 그런 무서운 말도 다신 하지 마요. 나는 당신한테 어떤 이유로든, 단 1그램의 상처도 주고 싶지 않으니까. 알겠죠?”

 

놀랐다는 표정을 지으며 몇 초 바라보고는 가볍게 주먹질을 한다.

 에잇.

블루는 제 모든 것을 걸고 던진,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무모한 고백에 대한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심판, 거절, 혹은 그를 미쳤다고 비난하는 말까지도 각오했다. 하지만 그녀의 반응은 그 어떤 예상에도 들어맞지 않았다. 동그래진 눈으로 저를 몇 초간 멍하니 바라보던 그녀는, 이내 ‘에잇’ 하는 짤막한 기합과 함께 허공을 향해 가볍게 주먹을 날렸다. 그건 마치, 감당하기 벅찬 감정의 파도를 어떻게든 밀어내려는 작은 몸짓처럼 보였다.

 

그 순간, 방 안을 가득 채웠던 팽팽한 공기가 거짓말처럼 터져나갔다. 블루는 저도 모르게 피식, 하고 바람 빠지는 웃음을 터뜨렸다. 허탈함과 안도감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의 웃음이었다. 그는 자신의 혼신을 다한 진심이 고작 저 귀여운 주먹질 한 방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동시에 심장이 간질거리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가장 윤재희다운 대답일지도 몰랐다. 그는 들고 있던 위스키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소파 등받이에 몸을 깊게 기댔다. 방금 전까지 날을 세우고 있던 모든 기세가 풀리고, 온몸에 나른한 힘이 빠져나갔다.


“에잇… 이라니. 하, 진짜….”

그는 웃음기를 거두지 못한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주 앉은 연인의 얼굴을 뜯어보듯 찬찬히 살폈다. 여전히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텅 비어 있던 그 눈동자에는 분명, 조금 전과는 다른 색이 돌고 있었다. 그것이 안도인지, 당혹감인지, 혹은 다른 무언가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죽은 듯 고요하지는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블루는 만족했다.


“사람 심장 떨어지게 만들어 놓고는… 겨우 그게 끝이에요? 나는 또, 선배님이 감동이라도 받아서 눈물이라도 글썽일 줄 알았잖아요. 아니면 이 미친놈, 하면서 뺨이라도 한 대 때리든가. 이건 뭐, 김빠지게.”

투덜거리는 말투였지만, 그의 입가에는 다정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는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그녀가 쥐었던 주먹을 부드럽게 펼쳐 제 손으로 감쌌다. 장난스러운 주먹질의 온기가 희미하게 남아있는 손이었다. 그는 그녀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만지작거리며, 조금 전 자신이 했던 격한 말들을 곱씹었다. ARCH를 박살 내겠다느니, 대의는 허울이라느니. 술기운도 없이 맨정신으로 내뱉기엔 너무나 위험하고, 철없는 소리들이었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그 말들은 전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그의 진심이었으니까.


“알아요. 내가 방금 한 말들… 되게 무책임하고, 어리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거. 스물여덟이나 먹은 놈이 할 소리는 아니지. 근데… 어쩔 수가 없었어요. 선배님이 나를… 무슨 정의의 사도처럼, 당신을 심판할 사람처럼 보고 있는 게 너무 싫어서. 나는 그냥, 당신 편이라고. 세상이 다 등을 돌려도, 나는 마지막까지 당신 손잡고 있을 거라고. 그 말을 해주고 싶었을 뿐인데… 하다 보니 좀 과격해졌네.”

그는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시선을 살짝 피했다. 강철 심장을 가진 S급 센티넬처럼 굴다가도, 이런 순간에는 영락없이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스물여덟의 ‘윤재안’으로 돌아왔다. 그는 다시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깍지 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의 놀란 마음을, 흔들리는 마음을 단단히 붙잡아주고 싶었다.


“그러니까 너무 놀라지는 마요. 그냥… 아, 이 자식이 나를 이만큼이나 좋아하는구나. 그래서 가끔 이렇게 분수도 모르고 날뛰는구나, 하고… 귀엽게 봐주면 안 될까.”

 

... 그, 거는... 

그를 가볍게 때린다.

 얘를... 정신을 못 차렸다고 혼내야 하는지, 고맙다고 해야 하는지... 어렵네. 너 그렇게 사람 맹목적으로 따르면 안 된다...

그녀의 손바닥이 제 어깨를 가볍게 툭, 하고 때렸다. 아프지 않은, 오히려 망설임과 온기가 더 크게 느껴지는 타격이었다. 블루는 그 미미한 충격에 눈을 살짝 감았다 떴다. ‘에잇’ 하는 주먹질 다음으로 나온, 두 번째의 서투른 대답. 그녀가 지금 얼마나 복잡한 심경인지, 그 서투른 손길 하나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혼내야 할지, 고맙다고 해야 할지 어렵다’는 그녀의 혼잣말은 블루의 귓가에 그 어떤 달콤한 말보다 더 깊게 박혔다. 혼내고 싶다는 건, 그의 무모한 충성이 그녀의 이성에 경고등을 켰다는 의미. 고맙다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충성이 그녀의 외로운 마음에 가 닿았다는 증거. 그 두 가지 감정 사이에서 길을 잃은 그녀의 모습이, 블루의 눈에는 더없이 사랑스럽게 비쳤다. 그는 씩, 하고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조금 전의 멋쩍은 미소와는 다른, 모든 것을 이해했다는 듯한 깊고 부드러운 웃음이었다.


“어렵긴 뭐가 어려워요.”

블루는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더욱 단단히 깍지 껴 잡고는, 제 쪽으로 살짝 끌어당겼다. 소파에 기대어 있던 상체를 바로 세우자,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그는 다른 한 손을 들어, 그녀가 자신을 때렸던 그 어깨를 장난스럽게 툭툭 털어내는 시늉을 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먼지라도 털어내는 것처럼.


“정답은 정해져 있잖아요. ‘고마운데, 다음부터는 이렇게까지 무모하게 굴지 마, 바보야.’ 하고, 한번 꽉 안아주면 되는 거. 그렇게 간단한 걸 뭘 그렇게 어렵게 고민하고 그럽니까. 선배님은 가끔 보면,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니까.”

능청스러운 말투로 정답을 알려주듯 말하며, 그는 슬쩍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맹목적으로 따르면 안 된다’는 마지막 말. 그건 그를 향한 걱정이었다. 그가 자신 때문에 위험해질까 봐, 잘못된 길로 빠질까 봐 염려하는, 선배로서의 다정함이자 연인으로서의 애정. 블루는 그 걱정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심장을 따뜻하게 데우는 불씨가 되었다.

 

그는 깍지 낀 손을 들어 그녀의 손등에 제 뺨을 가만히 가져다 댔다. 그녀의 체온이 차가운 그의 뺨에 온전히 전해졌다. 그는 눈을 감고 그 온기를 느끼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진지하고 낮은 목소리였다.


“틀렸어요, 선배님. 나는 맹목적인 게 아니에요. 이건… 세상에서 가장 이성적이고, 가장 확실한 선택이야. 내 모든 것을 걸고, 내 우주를 지키기로 한 결정이라고요. 당신이라는 우주를. 거기엔 어떤 비논리도, 어떤 맹목도 없어요. 오직… 지켜야 한다는 당위성만 있을 뿐이지.”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지척에서 마주한 그녀의 눈동자가, 그의 진심을 담아내려는 듯 깊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제 뺨을 대고 있던 그녀의 손을 그대로 가져와, 자신의 심장이 뛰고 있는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규칙적이고, 강하게 울리는 심장 고동이 그녀의 손바닥을 통해 전해졌다. ‘거짓말이 아니야. 이게 내 진심이야.’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 걱정할 시간에… 그냥 나한테 기대요. 내가 당신 때문에 잘못될까 봐 걱정하는 거, 그 마음은 고맙게 받을게. 근데, 나는 당신이 없으면 어차피 잘못될 놈이에요. 당신이 없는 세상은 나한테 의미 없으니까. 그러니까… 그냥, 이용해요, 나를. 선배님이 편해질 수 있다면, 얼마든지. 알겠죠?”

 

... 그래, 후배 부려먹자. 가서 물 좀 떠와라. 너 먹고 싶은 것도 더 시키고.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방금 전까지 자신의 심장을 통째로 꺼내 보이며 절절한 고백을 하던 블루의 모든 움직임을 순간적으로 정지시켰다. ‘후배 부려먹자.’ 그 가볍고 장난기 어린 선언은, 세상의 모든 법과 질서를 부정했던 그의 거창한 선언들을 한순간에 아주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힘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가슴 위에 놓여 있던 그녀의 손을, 그 손에서 전해지던 미약한 떨림을, 그리고 그 손을 통해 전해지던 자신의 심장 소리를 잠시 잊었다. 멍하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그를 걱정하고, 그의 무모함을 염려하던 그 얼굴 위로, 평소의 나른하고 제멋대로인 ‘선배님’의 얼굴이 겹쳐졌다.

 

그리고, 이내. 블루의 입가에서 참지 못한 웃음이 비집고 터져 나왔다. 처음에는 피식, 하는 작은 소리였지만, 이내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 크고 맑은 웃음소리로 번졌다. 아, 졌다. 또 졌다. 이길 수가 없다, 정말.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던진 비장한 승부수가, 고작 ‘물 한 잔’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심부름으로 되돌아왔다는 사실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그 허무함이 미치도록 사랑스러웠다. 이것이 윤재희가 그의 고백을 받아들이는 방식이었다. 그의 무거운 헌신을, 그녀의 가벼운 일상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 그를 ‘공범’이라는 어두운 이름 대신, ‘부려먹기 좋은 후배’라는 다정한 이름으로 곁에 두는 것.


“푸흐… 하하, 알겠습니다. 분부대로 합죠.”

웃음기를 겨우 거둔 블루는 가슴 위에 있던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 내려 테이블 위에 놓아주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언제 그렇게 심각했냐는 듯, 그의 얼굴에는 다시 쾌활하고 기운 넘치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는 기지개를 켜듯 팔을 쭉 뻗으며 경쾌하게 말했다. 그녀가 그를 ‘부려먹겠다’고 선언한 이상, 그는 세상에서 가장 유용하고 기특한 후배가 되어줄 작정이었다.


“물만요? 에이, 기왕 부려먹는 김에 좀 더 스케일 크게 부려먹지. 저기 있는 비싼 안주 전부 다 가져오라고 시키든가. 아니면 바텐더 어깨 주물러주고 서비스 안주 받아오라고 하든가. 고작 물 심부름이라니… 선배님은 후배 부려먹는 스킬도 좀 배우셔야겠네.”

그는 장난스럽게 핀잔을 주면서도, 발걸음은 이미 바(Bar) 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의 뒷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가볍고 의욕에 차 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이용하겠다고, 부려먹겠다고 말했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 승리의 선언과도 같았다. 그는 바텐더에게 다가가 시원한 물 한 잔과, 그녀가 좋아할 만한 달콤한 칵테일, 그리고 간단한 치즈 플레이트를 추가로 주문했다. 그녀가 ‘너 먹고 싶은 것도 시키라’고 했지만, 지금 그가 먹고 싶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그녀가 편안하게, 그리고 즐겁게 이 시간을 보냈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쟁반에 주문한 것들을 받아 들고 돌아오는 그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가득했다. 그는 그녀의 앞에 시원한 물잔을 먼저 내려놓고, 보석처럼 반짝이는 푸른빛의 칵테일을 그 옆에 함께 놓아주었다. 그리고 치즈 플레이트를 테이블 가운데에 놓으며, 다시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 모든 행동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다정했다.


“자, 여기요, 주인님. 시키신 물이랑, 이건 제가 드리는 서비스. 그리고 이건 선배님 부려먹은 값으로 제가 사는 겁니다. 그러니까… 맛있게 먹고, 마시고, 아까 했던 그 무서운 생각들은 다 잊어버려요. 지금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나한테 부려먹히기나 하시라고요. 알았죠?”

yunico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