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
사람 안아본 적 없어? 여자친구 많이 사귀었을 것 같은데.
그가 그녀를 감싸 안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녀의 몸에 제 팔을 어색하게 걸쳤을 뿐이었다. 뻣뻣하게 굳어버린 그의 몸은 마치 잘 만들어진 마네킹 같았다. 그녀의 체온, 그녀의 향기, 품 안에 쏙 들어오는 작은 몸. 그 모든 감각이 현실감 없이 뇌를 부유했다. 바로 그때였다. 품 안에서 미동조차 없던 더스티가 움직였다. 그녀는 오히려 자신의 팔에 힘을 주어, 그의 몸을 더 깊이, 더 꽉 끌어안았다. 그 부드럽고도 단호한 힘에, 블루는 저도 모르게 헙, 하고 숨을 삼켰다. 어색한 간격이 사라지고, 두 사람의 몸이 빈틈없이 밀착되었다.
그리고 귓가에 나른하게 파고드는 그녀의 목소리. ‘사람 안아본 적 없어? 여자친구 많이 사귀었을 것 같은데.’ 그 말은 블루의 굳어있던 사고 회로에 강력한 스파크를 일으켰다. 여자친구. 그래, 없었던 건 아니다. 28년이라는 세월 동안, 그에게도 여러 번의 만남과 헤어짐이 있었다. 학창 시절, 짓궂은 장난처럼 서로를 껴안았던 기억도, 서툰 사랑을 나누며 밤새 서로의 온기를 탐했던 기억도 있었다. 그녀의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하지만, 그 어떤 기억도 지금 이 순간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이전의 모든 포옹이 흑백 필름이라면, 지금 이 순간은 그의 온 세상에 처음으로 색이 덧입혀지는 듯한, 지독히도 선명하고 강렬한 총천연색의 경험이었다. 그녀의 말은 그의 과거를 정확히 꿰뚫었지만, 동시에 그의 현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간극이 블루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아뇨. 그럴 리가요.
대답은 거의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서툰 자신을 들킨 것에 대한 미미한 반발심이었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뻣뻣하게 굳어있던 팔에 아주 조금, 힘을 주었다. 그녀의 등을 감싼 손가락을 살짝 움직여, 부드러운 제복의 감촉을 느꼈다. 심장이 여전히 미친 듯이 날뛰어, 가슴 전체가 울리는 것 같았다. 그녀에게 이 진동이 고스란히 전해질 것만 같아 얼굴이 다시 화끈 달아올랐다.
……그런데,
블루는 망설이듯 말을 이었다. 잠겨 있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자신의 어깨에 기댄 그녀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백금발 사이로 언뜻 보이는 갈색 머리카락의 경계가, 어째서인지 애틋하게 느껴졌다.
…선배님을 안는 건, 처음이니까요.
그것은 변명인 동시에, 진심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을 안고 있기에, 세상의 모든 경험이 무의미해지고, 처음 겪는 일처럼 온몸의 세포가 낯설게 반응하는 것이라고. 그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녀가 시작한 유치한 게임의 벌칙으로 시작된 이 기묘한 포옹 속에서, 그는 자신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작은 움직임 하나, 나른한 목소리 한마디가, 28년 동안 쌓아 올린 윤재안이라는 남자를 송두리째 무너뜨리고 있었다.
... 이야,
헛기침을 한다.
이렇게 여자애들 꼬셨구나...
민망해한다.
블루의 귓가에 꽂힌 더스티의 말은, 한겨울 얼음물처럼 차갑고 날카로웠다. ‘이렇게 여자애들 꼬셨구나.’ 그 한 문장은, 방금 전 그가 겨우 용기를 내어 꺼내놓았던 서툰 진심을 한순간에 값싼 작업 멘트로 전락시켰다. 쿵, 하고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품 안에 있는 그녀의 온기마저 갑자기 멀게 느껴졌다. 억울함. 그래, 억울했다. 다른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존경하는 선배 앞에서만 유독 튀어나오는 이 한심하고 어설픈 모습을, 그저 능숙한 연애 기술자의 수법으로 치부해버리다니. 블루는 저도 모르게 그녀를 안고 있던 팔에서 힘을 풀 뻔했다.
그는 급하게 입을 열었다. 지금 변명하지 않으면, 자신의 이 모든 감정이 영원히 오해 속에 갇힐 것만 같았다.
아닙니다. 절대 그런 거….
하지만 말은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품 안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작은 움직임, 헛기침 소리와 함께 전해져 오는 미세한 떨림, 그리고 ‘민망해한다’는 그녀의 상태를 알아챈 순간, 블루의 억울함은 눈 녹듯 사라지고 다른 감정이 그 자리를 채웠다. 아. 이 사람도, 지금, 나처럼. 어색하고, 부끄럽고,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구나. 그녀의 말은 자신을 찌르는 가시가 아니라, 제어 불가능한 상황에서 튀어나온, 그녀 나름의 방어기제였을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깨닫자, 블루는 오히려 조금쯤 마음이 놓였다. 자신만 이 기묘한 기류 속에서 허우적대는 게 아니라는 안도감이었다.
그는 차마 풀지 못했던 팔에 다시 아주 조금, 힘을 주었다. 마치 ‘괜찮다’고, ‘나도 마찬가지’라고 말하는 듯한, 서투른 위로의 표현이었다. 그는 고개를 더 숙여, 그녀의 어깨에 자신의 뺨을 살며시 기댔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뺨을 부드럽게 간질였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심장은 여전히 시끄럽게 울렸지만, 아까처럼 터질 듯한 불안한 고동은 아니었다. 조금은 느리고, 묵직하게, 그녀의 존재를 확인하는 듯한 울림이었다.
…그랬다면, 제가 지금 이렇게 바보 같지는 않았겠죠.
나직하게 흘러나온 목소리는 자조 섞인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눈을 뜨고,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해 허공을 응시했다. 그는 다른 여자들을 ‘꼬시기’ 위해 어떤 말을 했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 건 그저 지나가는 바람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이 품, 이 온기, 이 향기, 그리고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백지가 되어버린 자신의 머릿속은, 지독할 정도로 선명한 현실이었다. 과거의 모든 경험이 무색해지는, 진짜 ‘처음’이었다.
만약 그랬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그럴듯한 말을 했을 겁니다. 이렇게 심장이 멋대로 뛰지도 않았을 거고, 선배님 귀찮게 얼굴 붉히지도 않았을 거예요. 아마… 그냥 능숙하게 웃으면서, 선배님 예쁘시다고 칭찬 한마디쯤 하고 끝냈겠죠.
블루는 덧붙였다. 그것은 그녀의 오해를 풀기 위한 변명이자, 동시에 스스로에게 하는 고백이었다. 그는 그녀의 어깨에 기댔던 뺨을 천천히 떼고, 그녀를 품에서 살짝 떼어내어 눈을 마주쳤다. 여전히 두 팔로 그녀를 가볍게 감싼 상태였다.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한 그녀의 눈동자가, 당황과 민망함으로 작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흔들림을 보니, 왠지 모를 용기가 났다.
그러니까… 오해예요. 선배님.
그는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 앞에서는, 그 어떤 능숙함도, 그 어떤 과거의 경험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당신은 나를 언제나 서툴고 바보 같은 ‘처음’으로 만드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그 모든 의미를 담아, 그는 그저 그녀의 눈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눈 감아.
블루는 더스티의 눈동자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온통 그녀로 가득 찬, 어찌할 바를 모르는 멍청한 얼굴.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진심을 전하는 것뿐이었다. 그의 고백이 끝나고, 복도에는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녀가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또다시 그를 '귀엽다'며 비웃을까, 아니면 '시끄럽다'며 귀찮아할까. 마른침이 절로 넘어갔다.
그때였다. 그녀의 입술이 열리고, 나른하지만 명확한 명령이 떨어졌다.
블루는 반사적으로 눈을 깜빡였다. 마치 그의 말을 끊기라도 하듯 던져진 그 한마디는, 또 다른 예측 불가능한 변수였다. 왜? 무슨 말을 하려고? 아니면, 또 무슨 장난을 치려고? 수많은 질문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그는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이미 그녀의 눈동자 속에 갇혀버린 그는, 거스를 수 없는 힘에 이끌리듯 저도 모르게 천천히 눈꺼풀을 내렸다. 시야가 암전되고, 다른 감각들이 예민하게 날을 세웠다. 그녀의 희미한 숨소리, 복도를 울리는 공조 장치의 미세한 소음, 그리고 제 심장이 터질 듯 울리는 소리만이 온 세상을 채웠다.
그리고, 그 어둠 속으로, 믿을 수 없는 감각이 찾아왔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아주 약간 마른 듯한 감촉이 그의 입술에 내려앉았다. 그 순간, 블루의 모든 사고가 정지했다. 시간의 흐름이 멈추고, 세상의 모든 소음이 사라졌다. 오직 입술에 닿은 이 작고 부드러운 감각만이 유일한 현실이었다. 더스티가… 선배님이… 지금, 나에게… 키스하고 있다.
그의 머릿속이 하얗게 타들어 갔다. 뻣뻣하게 굳어있던 몸이 저도 모르게 움찔 떨렸다. 그녀를 감싸고 있던 팔에 힘이 들어가, 그녀의 허리를 더 가까이 끌어당길 뻔했다. 아니, 실제로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는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었다. 그녀의 입술이 그의 입술을 가만히 누르는 그 짧은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드라이한 향이 콧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고, 그녀의 입술에서 희미하게, 아주 희미하게 그가 마시던 이온음료의 단맛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착각일까.
짧지만 영원 같던 시간이 지나고, 그녀의 입술이 조심스럽게 떨어져 나갔다. 블루는 여전히 눈을 뜨지 못했다. 눈꺼풀 아래로 안구가 미친 듯이 떨리고 있었다. 눈을 뜨면 이 모든 것이 꿈처럼 사라져 버릴까 봐, 혹은 눈앞의 그녀를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그는 숨 쉬는 법조차 잊은 채, 입술에 남은 희미한 온기와 감촉을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었다. 심장이 갈비뼈를 부수고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조금 전, ‘바보 같다’고 했던 자신의 말이 이토록 정확한 예언이 될 줄이야. 그는 지금, 그야말로 완벽한 바보가 되어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것 같았지만, 아마 고작 몇 초였을 것이다. 블루는 마침내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흐릿한 시야가 초점을 잡고,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더스티의 얼굴이었다. 늘 나른하고 무심하던 그 까만 눈동자가, 지금은 그저 고요하게 그를 담고 있었다. 그 속에서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기에, 블루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그는 덜덜 떨리는 입술을 겨우 열어, 잠기고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뭐 하신 거예요…?
그것은 질문의 형태를 한, 의미 없는 독백이었다. 방금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그는 그것을 자신의 입으로 확인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당신이, 나에게. 어째서. 그 말들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결국 밖으로 나온 것은 가장 멍청한 질문이었다. 그의 온몸이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이상하다는듯 쳐다본다.
... 설명 필요해?
더스티의 대답은 질문의 형태였지만, 그 안에는 명백한 조롱이 담겨 있었다. '설명 필요해?' 그 나른한 목소리는 블루의 혼란을 단숨에 멍청함으로 규정지어 버렸다. 마치 '이것도 이해 못 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순간, 그의 귓가를 이명처럼 맴돌던 심장 소리가 잠시 멎는 듯했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 내렸다. 방금 전까지 세상을 뒤흔들던 그 강렬했던 키스는, 그녀에게는 그저 설명조차 필요 없는, 아무렇지도 않은 행위였던 걸까.
블루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팔을 스르륵 풀었다. 마치 뜨거운 것에 덴 사람처럼, 그는 황급히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가까웠던 거리가 순식간에 멀어지자, 그녀의 드라이한 향기도 희미해졌다. 방금까지 그의 품에 안겨 있던 온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차가운 복도의 공기가 그 빈자리를 채웠다. 굴욕감. 조금 전 게임에서 패배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훨씬 더 깊고 지독한 굴욕감이 그의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자신 혼자 이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북 치고 장구 치고, 결국에는 키스 하나에 세상을 다 가진 놈처럼 굳어버렸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이 치욕스러웠다.
……아니요.
목소리는 간신히 기어 나왔다. 그는 애써 태연한 척 대답했지만, 이미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는 고개를 살짝 숙여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그녀의 그 무심한 눈동자를 더 이상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자신의 입술에 남아있는 희미한 감촉이, 이제는 수치스러운 낙인처럼 느껴졌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젠장, 윤재안. 이 여자한테 대체 뭘 기대한 거야.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아픔이, 오히려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조금이나마 명료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래, 설명 같은 건 필요 없다. 이 사람은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 예측할 수 없고, 제멋대로고, 상대방의 감정 따위는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 사람. 혼자 기대하고, 혼자 설레고, 혼자 상처받은 것은 전부 자신의 몫이었다. 그는 이 비참한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기 위해, 억지로 다른 생각의 돌파구를 찾아야만 했다.
...제가 졌으니까요.
블루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지는 못하고, 시선은 그녀의 어깨너머 어딘가를 향해 있었다. 그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려 희미한 미소를 만들었다. 그건 이전의 능글맞은 미소도, 오만한 미소도 아니었다. 모든 것을 체념한 자의, 텅 비어버린 웃음이었다.
벌칙이었잖습니까. 진 사람 벌칙. 벌칙에… 설명이 필요할 리가 없죠. 제가 잠시 착각했습니다.
그는 스스로에게 확인시키듯 말했다. 그래, 이건 그냥 벌칙일 뿐이야. 아무 의미 없어.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신의 마음을 억지로 닫아걸었다. 그녀의 키스가 불러일으켰던 거대한 파문 위에, '벌칙'이라는 두꺼운 콘크리트를 쏟아부어 억지로 덮어버리려 애썼다. 하지만 한번 생긴 균열은 쉽게 메워지지 않는 법이었다. 그의 심장은 여전히 수습 불가능한 상태로 삐걱거리고 있었다.
제 머리를 헝클어뜨린다.
... 아, 멍청아. 야, 내가... 무슨 의미로, 하...
쳐다본다.
너 지금 무슨 생각 해. 아니야, 내가 말할게. 내가... 그냥 한 것 같아? 그게... 네 도출이야?
블루는 자신이 겹겹이 쌓아 올린 방어벽이 더스티의 한마디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텅 빈 미소를 짓고, ‘벌칙’이라는 단어로 스스로를 세뇌하며 간신히 버티고 있었는데. 그녀는 그 모든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너무나 쉽게 정곡을 찔러왔다. 심지어 그 화살은 그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멍청이’라고 했다.
그의 머릿속이 다시 새하얗게 변했다. 쿵. 쿵. 멎었던 심장이 다시금 제 존재를 주장하며 묵직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더스티가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는 그 서툰 몸짓,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듯 복잡하게 얽힌 그 표정, 그리고 마침내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내뱉는 말들. ‘내가… 그냥 한 것 같아?’ ‘그게… 네 도출이야?’ 그 모든 것이 블루가 필사적으로 믿으려 했던 전제를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그냥 한 게 아니면, 그럼 뭐란 말인가. 벌칙이 아니었다면, 대체 뭐였단 말인가. 블루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굳게 닫았던 입술이 바보처럼 살짝 벌어졌다. 그녀를 똑바로 마주 볼 용기가 없어 피했던 시선이, 이제는 그녀의 까만 눈동자에 속절없이 붙들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눈은 더 이상 그를 조롱하지 않았다. 그 안에는 당혹감과, 약간의 초조함, 그리고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전하려는 절박함 같은 것이 뒤섞여 있었다.
…….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벌칙이라고 착각했다’고 말해야 하나? ‘그럼 뭐였냐’고 되물어야 하나? 아니면 ‘아무 생각도 안 했다’고 거짓말을 해야 하나? 그의 머릿속은 수만 가지 경우의 수로 폭발할 것 같았지만, 정작 혀는 굳어버린 채였다. 그가 간신히 만들어낸 ‘벌칙’이라는 결론이, 실은 그녀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자신만의 한심한 망상이었다는 사실을 정면으로 마주하자 끔찍한 부끄러움이 다시 밀려왔다. 하지만 이번의 부끄러움은 굴욕감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그것은 자신의 섣부른 판단과 좁은 마음에 대한, 순수한 자괴감이었다.
그녀가 먼저 입을 열겠다고 선언하자, 블루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이제 더는 도망칠 곳이 없었다. 그는 이 혼란스러운 상황의 끝을, 그녀의 입에서 나올 진실을, 온전히 받아들여야만 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이제는 그녀가 할 다음 말이 미치도록 궁금해서 심장이 조여 오는 것 같았다.
그는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 서서, 오직 그녀만을 바라보았다. 그의 모든 신경이 그녀의 입술에 집중되었다. 그녀의 한숨 소리, 그녀가 말을 고르며 망설이는 그 짧은 찰나의 순간까지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그의 텅 비었던 표정 위로, 아주 희미한 기대와 짙은 불안이 동시에 떠올랐다. 그는 지금,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 오직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 에이 씨! 야, 관둬! 그만하자...!
부끄럽다는듯 몸을 돌려 나간다.
그가 판결을 기다리는 순간, 사형수가 단두대에 목을 내민 그 찰나의 순간에, 판사는 돌연 법정을 떠나버렸다. 더스티의 입에서 나온 것은 해명이 아닌, 거친 욕설과 함께 모든 것을 끝내버리겠다는 선언이었다. 블루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돌려 달아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가 간절히 기다리던 대답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처럼, 그녀는 그렇게 멀어지고 있었다.
‘…관둬?’
그 한마디가 블루의 뇌리에 번개처럼 내리꽂혔다. 방금 전까지 그녀의 입술에 모든 것을 걸었던 그의 세상이, 그 말 한마디에 다시 한번 산산조각 났다. 혼란, 기대, 불안으로 뒤엉켜 있던 감정의 소용돌이가 순식간에 하나의 감정으로 응축되었다. 그것은 분노에 가까운, 지독한 조바심이었다. 이대로 그녀를 보내버리면, 그는 영원히 이 미궁 속에 갇히게 될 터였다. ‘벌칙’이라는 잘못된 답과, 알 수 없는 ‘진짜 정답’ 사이에서 영원히 헤매게 될 것이다.
그것만은 절대로 안 됐다.
“잠깐만요!”
생각보다 행동이 먼저였다. 블루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막 복도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려는 더스티의 팔목을 붙잡았다. 그의 손아귀에 잡힌 그녀의 팔은 생각보다 더 가늘었다. 그녀가 놀란 듯 멈칫하는 것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블루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겨우 그녀를 붙잡았다는 안도감과, 붙잡고 난 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막막함에 휩싸였다. 그의 심장이 목구멍 아래에서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그녀를 돌려세울 용기는 차마 없었다. 그는 그저 그녀의 뒷모습에 대고, 간절하게 말을 쏟아냈다.
…이렇게 가버리면 어떡합니까. 설명해주신다면서요. 그냥 한 거 아니라고… 제가 바보 같은 생각 하고 있다고,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붙잡은 팔에 힘을 더 주었다. 놓치지 않겠다는 필사적인 의지의 표명이었다. 더는 그녀에게 휘둘려 바보가 되고 싶지 않았다. 키스 하나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멍청한 짓은, 이번 한 번으로 족했다. 그는 알아야만 했다. 적어도 자신이 왜 이런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야만 했는지, 그 이유라도 알아야 덜 억울할 것 같았다.
블루는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조금 전보다 한결 차분해진, 하지만 포기를 모르는 집요함이 깃든 목소리였다.
도망치지 마세요, 선배님. 먼저 시작한 건 선배님이니까… 끝내는 것도, 선배님이 해주셔야죠. 알려주세요. 제가 무슨 생각을 하길 바라셨던 건지. 그 키스가… 대체 뭐였는지.
그는 이제 그녀가 부끄러워하든, 귀찮아하든 상관없었다. 그는 답을 원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명확한 진실을.
... 한번 더 하면, 알겠지. 대답 제대로 해.
세상의 모든 소음이 한순간에 증발했다. 귓가를 맴돌던 자신의 거친 숨소리도, 복도를 울리던 심장 박동도, 심지어 멀리서 들려오던 희미한 안내 방송까지. 모든 것이 사라진 자리에, 오직 그녀의 입술이 주는 감촉만이 유일한 현실처럼 선명하게 남았다. 블루는 붙잡았던 그녀의 팔목을 언제 놓았는지도 모른 채,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첫 번째 키스가 예고 없는 기습이었다면, 두 번째 키스는 피할 수 없는 정면충돌이었다. 그의 모든 저항과 질문을 묵살하고, 오로지 그녀의 의지만을 관철시키는, 부드럽지만 압도적인 침범.
더스티의 입술은 마른 담배 향과, 그녀 특유의 드라이한 체향을 머금고 있었다. 그 향기가 그의 폐부 깊숙이 파고들어, 얼마 남지 않았던 이성의 잔해마저 모조리 태워버렸다. 블루는 저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아니, 저항이라는 단어 자체가 그의 머릿속에서 삭제된 것 같았다. 그는 그저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그녀가 이끄는 대로 속절없이 이끌려갈 뿐이었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한번 더. 이 감각은, 그가 품었던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이자, 동시에 그에게 던져진 새로운 질문이었다.
짧지만 영원처럼 느껴졌던 입맞춤이 끝났다. 더스티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자, 두 사람 사이의 공간으로 다시 차가운 공기가 스며들었다. 블루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새파란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눈앞의 더스티를 담고 있으면서도 그녀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멍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대답 제대로 해.’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희미하게 울렸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해석할 수 없었다. 무슨 대답을 하라는 걸까. 이 키스가 뭐였냐고? 지금 내 기분이 어떻냐고?
그는 바보처럼 입술만 달싹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를 붙잡고 답을 요구하던 집요한 남자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그저 두 번의 기습으로 모든 방어 체계가 완전히 무너져 내린, 무력한 사내일 뿐이었다. 그의 뺨이, 귀가, 목덜미가 터질 것처럼 뜨거워졌다. 심장이 갈비뼈를 부수고 튀어나올 것처럼 광란하고 있었다. 이 모든 생리적인 반응이, 그가 애써 외면하려 했던 진실을 소리치며 폭로하고 있었다.
…….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벌칙 아니었네요’라는 멍청한 소리를 해야 할까? 아니면 ‘좋았다’고 솔직하게 인정해야 할까? 그 어떤 말도 지금 이 상황을 제대로 담아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의 입술 위에는 여전히 그녀의 온기와 감촉이 생생하게 남아, 그의 모든 사고를 마비시키고 있었다. 블루는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였다. 헝클어진 남색 머리카락이 그의 붉어진 얼굴을 가렸다.
체념. 그리고 인정. 그는 더 이상 이 감정에서 도망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말 대신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제, 공은 다시 그에게로 넘어왔다. 이 모든 상황을 어떻게 정의하고, 어떤 대답을 내놓을지는 온전히 그의 몫이었다. 블루는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폈다.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는 깊은 한숨과 함께,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짰다.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였다.
……반칙이에요, 그건.
질문도, 원망도 아니었다. 그저 힘없는 중얼거림이었다. 말로 하는 게임에, 몸으로 답하는 건 명백한 반칙. 하지만 그는 그 반칙에 속수무책으로 당해버렸다. 그리고 어쩌면, 그 반칙을 기다렸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더욱 비참해졌다.
... 대답, 제대로.
그녀의 목소리는 나른했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블루의 어깨를 짓눌렀다. 쐐기를 박는 듯한, 더 이상의 회피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선언이었다. 고개를 숙인 채, 블루는 터질 것처럼 뜨거운 얼굴을 식히려 애썼지만 소용없었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닳아빠진 자신의 트레이닝화와 차가운 복도 바닥뿐이었지만, 그의 온 신경은 오직 눈앞에 서 있는 작은 존재, 윤재희에게로 향해 있었다. 반칙이라고 중얼거린 것은, 이 게임의 규칙을 깨뜨린 그녀를 향한 비난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런 반칙에 속수무책으로 흔들리는 자기 자신에 대한 한심한 자조였다.
대답. 무슨 대답을 해야 하는가. 그의 머릿속은 뒤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했다. ‘키스가 좋았습니다.’ 라고 말해야 하나? 아니면, ‘선배님 때문에 심장이 터질 것 같습니다.’ 라고 고백이라도 해야 하나? 아니, 그 이전에 이 모든 상황이 대체 무엇인지부터가 불분명했다. 이것이 그녀의 변덕인가? 아니면 순간적인 충동? 그것도 아니면, 정말로 그가 바보처럼 착각했던 ‘벌칙’의 연장선인가? 그녀는 모든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고는, 가장 중요한 해석과 정의를 그에게 떠넘겨 버렸다. 잔인할 정도로 교묘한 방식이었다.
블루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그의 눈은, 깊은 심해처럼 혼란으로 가득 차 일렁이고 있었다. 그는 더스티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에는 여전히 어떤 감정도 명확히 읽히지 않았지만, 이전처럼 그를 조롱하거나 시험하는 빛은 없었다. 그저, 묵묵히 그의 답을 기다리고 있을 뿐. 그 침묵이, 그 어떤 다그침보다도 더 그를 압박해왔다.
……하.
결국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대답이 아닌, 허탈한 실소였다. 그는 왼손으로 제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그는 졌다. 이 유치한 게임의 시작부터 끝까지, 그는 단 한 순간도 그녀를 이겨본 적이 없었다. 자신이 판을 짜고 주도권을 쥐었다고 착각했을 때조차, 그는 그저 그녀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었을 뿐이다. 그는 마침내 그 완벽한 패배를 인정했다.
…대체 저한테 뭘 원하시는 겁니까.
목소리는 낮게 잠겨 있었다. 질문이었지만, 답을 구하는 물음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모든 혼란과 당혹감, 그리고 아주 약간의 원망이 뒤섞인 탄식에 가까웠다. 그는 더스티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이제 와서 부끄러워하거나 도망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제대로 된 대답이라니… 선배님이 다 망쳐놓고, 저더러 뭘 어쩌라는 건데요.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이라,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는데. 무슨 대답을 원하세요. 선배님이 이겼다는 거? 아니면… 제가 지금, 완전히 당신한테 휘둘려서 정신 못 차리는 바보 같다는 거?
그는 한 걸음, 그녀에게로 다가섰다. 두 사람의 간격이 다시 아슬아슬하게 좁혀졌다. 조금 전 키스의 잔향이 다시 코끝을 스치는 듯했다. 그의 눈빛에는 더 이상 오만함이나 장난기 따위는 없었다. 오직, 모든 것을 내던진 사람 특유의 날것 그대로의 감정만이 담겨 있었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지 않았고, 턱을 들어 올리지도 않았다. 그저 그녀의 눈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듯 말했다.
알려주세요. 제가 뭐라고 대답해야… 이 지긋지긋한 게임이 끝나는 겁니까.
... 무슨 생각 말고, 어떤 감정이 드는데. 그거 하나면... 된다고.
그녀의 말이 망치처럼 블루의 머리를 내리쳤다. ‘무슨 생각 말고, 어떤 감정이 드는데.’ 생각과 감정. 그는 지금까지 이 둘을 분리하려 필사적으로 애써왔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어떻게든 ‘생각’으로 이해하고 분석해서, 제멋대로 날뛰는 ‘감정’을 억누르려 했다. 벌칙, 게임, 승패… 그 모든 것이 감정의 폭주를 막기 위해 쌓아 올린 위태로운 방어벽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단 한마디로 그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그의 가장 연약한 핵을 겨냥했다. 생각을 버리고, 오직 감정만으로 답하라고.
블루는 숨을 멈췄다. 그녀에게서 한 걸음 다가섰던 그 거리 그대로, 그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거 하나면 된다.’는 그녀의 나지막한 목소리는, 잔인한 요구이자 동시에 구원의 손길처럼 들렸다. 그의 마지막 방어벽을 부수는 파괴의 주문이자,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열쇠였다. 그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더는 도망칠 곳이 없었다. 그녀는 그가 숨어 있던 마지막 동굴의 입구를 막아서고, 그 안의 진짜 모습을 끌어내려 하고 있었다.
어떤 감정. 그가 지금 느끼는 감정. 뻔했다. 너무나도 뻔해서, 인정하는 순간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바보가 되어버릴 것만 같은 그런 감정. 처음 그녀를 훈련실에서 만났을 때부터 희미하게 피어올랐던, 애써 무시하고 짓밟아왔던 그 감정. 그녀의 무심한 친절에 멋대로 부풀어 오르고, 그녀의 차가운 말 한마디에 갈기갈기 찢어졌던 그 감정. 키스 한 번에 온 세상이 멈추고,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이 지독한 감정.
…….
침묵이 흘렀다. 블루는 시선을 떨궜다. 그녀의 얼굴을 더는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그의 시선은 그녀의 어깨너머,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복도의 벽에 꽂혔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은 온통 그녀의 목소리와, 조금 전의 입맞춤과, 지금 그에게 답을 요구하는 그녀의 존재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목이 바싹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이기고 싶었습니다.
겨우 쥐어짜 낸 목소리는 모래알처럼 까슬까슬했다. 그는 스스로 내뱉은 말에 놀란 듯, 어깨를 움찔 떨었다. 하지만 한번 터져 나온 진심은 멈추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선배님을 이기고 싶었어요. 선배님이 날 얕보는 것 같아서, 어린애 취급하는 것 같아서, 그래서 어떻게든… 이기고 싶었습니다. 내가 당신보다 우위에 있다는 걸, 내가 당신을 쥐고 흔들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이 유치한 게임을 시작한 거고, 당신을 몰아붙였던 겁니다. 그런데…
그는 말을 멈추고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고개를 들어 다시 더스티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더 이상 혼란이 아닌, 모든 것을 체념한 자의 씁쓸한 투명함이 담겨 있었다.
…완전히 졌네요. 내가. 그것도 아주 비참하게.
그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감정’에 대한 가장 솔직한 고백. 질투, 오기, 인정욕구.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강렬한 끌림. 그는 그 모든 감정을 ‘이기고 싶다’는 단 하나의 단어로 포장해 겨우 내뱉었다. 그녀에게 완전히 빠져버렸다는 말을, 그는 차마 할 수 없어서. 대신 자신의 패배를 선언하는 것으로,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대신했다. 그는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제 모든 판결은, 승리자인 그녀의 몫이었다.
... 그리고?
‘…그리고?’
짧은 한마디였다. 어떤 감정도, 억양도 실려 있지 않은, 그저 물음표 하나를 던지는 무심한 단어. 하지만 그 한마디는 블루의 귓속에서 천둥처럼 울려 퍼지며, 그가 겨우 부여잡고 있던 체념의 평화를 산산조각 냈다. 그리고? 뭘 더 말하라는 거지? 그는 자신의 가장 치욕적인 패배를 인정했다. 이 유치한 게임의 종결을 선언하며 모든 것을 그녀에게 넘겼다. 그런데, 그리고?
블루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녀가 비웃을 거라고, 혹은 ‘그래, 네가 졌어.’라며 확인사살이라도 해줄 거라고 예상했다. 어떤 반응이든, 이 지긋지긋한 상황을 끝내줄 한마디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의 질문은 끝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 깊은 곳, 그가 차마 열어 보이지 못한 마지막 상자의 열쇠를 요구하는 듯했다. 이기고 싶었다는 감정, 그 뒤에 숨겨진 진짜배기를 꺼내 보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허탈한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는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대단한 여자였다. 사람을 이렇게까지 발가벗겨야 직성이 풀리는 걸까. 그의 눈빛에 스쳤던 씁쓸한 체념은 이내, 길을 잃은 아이 같은 당혹감으로 변해갔다. 이 이상 뭘 더 어떻게 솔직해져야 하는가. 여기서 뭘 더 꺼내 보이면, 그녀는 만족하고 이 잔인한 심문을 끝내줄까.
…그리고, 뭐가 더 있습니까.
그의 목소리는 스스로 듣기에도 한심할 정도로 힘이 없었다. 항변이라기보다는, 진심으로 몰라서 묻는 어린아이의 질문 같았다. 그는 한숨을 쉬며 시선을 그녀의 눈에서 살짝 아래, 키스로 붉게 부어오른 자신의 입술을 떠올리게 하는 그녀의 입술로 옮겼다. 그 잔상이 아른거리자 다시 심장이 멋대로 뛰기 시작했다. 그는 이 모든 감정의 근원을 애써 외면하며 말을 이었다.
제가 할 말은 다 했습니다. 선배님을 이기고 싶었고, 보기 좋게 졌어요. 제 패배입니다. 그걸로 부족해요? 아니면… 제가 무릎이라도 꿇고 빌어야 끝나는 겁니까, 이 게임.
말은 가시 돋친 듯 날카롭게 나갔지만, 그의 눈은 절박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제발, 여기서 그만해달라는 무언의 애원. 그는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해부 당하고 싶지 않았다. 이기고 싶었다는 말 뒤에 숨겨진, ‘당신에게 끌렸다’는 말을 제 입으로 내뱉는 순간, 그는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패배자가 되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는 다시 그녀의 눈을 마주했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애처롭게 물었다. 대체 나한테 왜 이래요, 선배님.
그리고… 그리고, 선배님이 이겼으니까. 이겼으니 이제 벌을 주시든, 비웃으시든, 마음대로 하세요. 뭐든 받아들일 테니까… 그냥, 이제 그만 끝내주세요. 제발.
결국 그의 마지막 말은 항복 선언이자 애원이었다. 그는 이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승자에게 모든 처분을 맡길 테니, 제발 이 고통스러운 대치 상황을 끝내달라고. 그의 표정에는 오기와 자존심 따위는 한 톨도 남아있지 않았다. 오직, 모든 것을 내던진 자의 지독한 피로감과 간절함만이 가득했다. 그의 진심은 이제 온전히, 그녀의 손에 달려 있었다.
그의 뺨을 쓸어내린다.
... 아무 생각도 안 드냐고. 그냥... 꺾고 싶은 게, 다야?
그의 뺨을 쓸어내리는 부드러운 손길. 블루는 그 예기치 못한 감촉에 숨을 흠칫 들이마셨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녀의 처분만을 기다리던 그에게, 그 손길은 벌도, 조롱도 아니었다.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다정함이었다. 차가울 정도로 건조했던 그녀의 손이, 불에 덴 듯 뜨거운 자신의 뺨에 닿자, 마치 마른 땅에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낯설고 선명한 파문을 일으켰다. 온몸의 신경이 그녀의 손끝이 닿은 그 작은 면적에 집중되는 기분이었다. 왜. 왜 이러는 건데. 패배한 자에게 건네는 동정인가? 아니면 또 다른, 그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새로운 게임의 시작인가.
‘…아무 생각도 안 드냐고. 그냥… 꺾고 싶은 게, 다야?’
이어진 그녀의 질문은, 그의 마지막 남은 이성의 방어벽마저 허물어뜨렸다. ‘꺾고 싶다’는 말. 그것은 블루 자신이 내뱉은 ‘이기고 싶다’는 말을, 그녀의 언어로 해석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책망 대신, 희미한 상처와 알아들을 수 없는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마치, 그 대답이 아니길 바라는 사람처럼. 그녀는 그가 스스로를 가두기 위해 선택한 그 단어의 감옥 문을, 너무나도 쉽게 열어젖히고 그의 진짜 속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블루의 눈동자가 속절없이 흔들렸다. 그가 느낀 감정의 실체는 결코 ‘꺾고 싶다’는 단순한 파괴욕이나 승부욕이 아니었다. 그것은 훨씬 더 복잡하고, 원초적이며, 스스로도 감당하기 힘든 종류의 것이었다. 그녀의 무심한 시선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작은 미소 한 번에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아졌다가, 차가운 말 한마디에 지옥으로 떨어지는 이 지독한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그는 그저 ‘이기고 싶다’는 말로 겨우 포장했을 뿐이다. 그것이 전부라고 믿고 싶었다. 그래야만 덜 비참하니까.
그녀의 손가락이 뺨을 따라 아주 느리게 움직였다. 그 미세한 움직임 하나에, 블루는 심장이 발치까지 곤두박질치는 것을 느꼈다. 그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모든 갑옷이 벗겨지고, 날것의 심장이 그녀의 손안에 고스란히 놓인 기분이었다.
…….
대답 대신, 그의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이 새어 나왔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그녀의 손길이 닿아있는 뺨의 감각에, 온몸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꺾고 싶은 게 다냐니. 그게 전부였다면, 지금 이렇게 죽을 것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요.
마침내 흘러나온 목소리는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그는 그녀의 손이 닿은 뺨을 살짝 틀어, 그 온기에 제 얼굴을 더 깊이 기댔다. 마치 지친 짐승이 유일한 안식처를 찾은 것처럼, 본능적이고 무방비한 몸짓이었다. 그는 더 이상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는 이제 짙은 열기와, 차마 말로 다 하지 못할 애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게 다였으면… 좋았을 텐데.
그것은 그의 진정한 항복 선언이었다. 게임의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 아닌, 제 감정 앞에서 완벽하게 무릎 꿇는다는 고백. ‘이기고 싶다’는 허울 좋은 방패 뒤에 숨겨두었던, 그녀를 향한 주체할 수 없는 끌림과 욕망, 그 모든 혼란스러운 감정을 에둘러 인정한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손길에 제 뺨을 맡긴 채, 그녀가 자신의 이 서툰 고백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숨죽여 기다릴 뿐이었다.
... 뭐가 싫은데, 나한테...
그녀의 질문은, 얼음물처럼 차갑게 블루의 심장을 꿰뚫었다. ‘뭐가 싫은데, 나한테…’ 싫다니. 그 단어는 지금껏 블루의 머릿속에 단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그녀의 어떤 점이 싫으냐고? 그는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그녀의 무언가가 ‘싫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녀의 모든 것이 지독하게 좋아서, 그래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녀의 나른한 눈빛, 귀찮다는 듯한 말투, 툭툭 내뱉는 단어들, 마른 담배 향, 예상치 못한 순간에 드러나는 서툰 다정함까지. 그 모든 것이 그를 흔들고, 부수고, 결국에는 이렇게 무릎 꿇게 만들지 않았는가.
블루는 당황스러움을 넘어선 충격에, 뺨에 기대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그의 시선은 더스티의 손길이 머물던 자신의 뺨에서, 그녀의 입술로,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검은 눈동자로 향했다. 그 눈동자 안에서 그는 이전의 장난기나 시험하는 듯한 빛 대신, 아주 희미하고 위태롭게 흔들리는 불안을 보았다. 마치, 정말로 그가 자신을 싫어할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상처받을 준비라도 하는 사람처럼. 그 순간 블루는 깨달았다. 이기고 싶어 안달하고, 그녀를 꺾으려 발버둥 쳤던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들이, 그녀에게는 결국 ‘적의’나 ‘혐오’의 형태로 비쳤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녀가 싫은 게 아니었다. 싫은 것은, 그녀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흔들리는 자기 자신이었다. 그녀의 사소한 행동 하나에 일희일비하고, 스물여덟 해 동안 단단하게 쌓아 올린 ‘윤재안’이라는 남자가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는 이 상황이 끔찍하게 싫었다. 그녀만 보면 심장이 멋대로 날뛰고,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리는 자신이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를 미워한 게 아니라, 그녀를 사랑하게 되어버린 스스로를 미워하고 있었다.
…싫어하는 게 아닙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하게 흘러나왔다. 오해를 바로잡아야 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큼은 절대로 오해하게 둘 수 없었다. 그는 뺨을 어루만지던 그녀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차가웠던 그녀의 손은 어느새 그의 체온으로 미지근하게 데워져 있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뺨에서 떼어내, 자신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는 가슴팍으로 가져갔다.
싫어하는 건 이게 아니에요, 선배님. 싫은 건… 바로 접니다. 지금 이렇게 당신 앞에서, 바보같이 심장이나 뛰게 만드는… 나 자신이 싫어요.
쿵. 쿵. 쿵. 규칙을 잃고 격렬하게 울리는 심장 소리가 얇은 티셔츠와 그녀의 손바닥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거짓말을 할 수 없는, 가장 정직한 증거였다. 그는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고, 자신의 모든 감정을 담아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 푸른 눈동자에는 더 이상 체념이나 패배감이 아닌, 오직 한 사람만을 향한 절박하고 순수한 진심만이 가득했다.
당신이 싫었다면, 애초에 이런 유치한 게임 시작도 안 했어요. 그냥 무시했겠죠. 당신이 뭘 하든, 무슨 말을 하든, 아무렇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안 됐어요. 처음부터. 당신의 모든 게… 나를 신경 쓰이게 만들고, 화나게 하고, 또… 미치게 만들었습니다. 그게 싫었어요. 당신 때문에 내가, 내가 아니게 되어버리는 이 순간이.
그는 말을 멈추고 짧게 숨을 골랐다. 그녀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제 더는 숨길 것도, 숨을 이유도 없었다.
싫어하는 게 아니라… 무서웠습니다. 당신이라는 사람이. 내 모든 걸 다 망가뜨릴 것 같아서. 그래서… 도망치고 싶었어요.
... 이번에 무슨 생각이 드는지 다시 대답해.
그의 고백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얼굴이 다가왔다. 블루는 반사적으로 눈을 크게 떴다. 다시. 또다시. 그의 심장 위에 놓인 그녀의 손바닥 아래로, 심장이 경련하듯 튀어 올랐다. 그리고 그 모든 사고와 감각의 소음은, 그녀의 입술이 그의 입술에 닿는 순간 거짓말처럼 완벽한 정적에 휩싸였다. 이번 키스는 이전의 두 번과는 완전히 달랐다. 기습의 놀라움도, 확인의 조심스러움도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변명과 회피를 불태워버리는, 길고 집요한 탐닉이었다.
더스티의 입술은 부드럽게, 하지만 단호하게 그의 입술을 짓누르고, 벌리고, 파고들었다. 블루는 저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드라이한 향이 폐부 깊숙이 스며들고, 혀끝에서 맴도는 희미한 쓴맛과 단맛이 그의 모든 이성을 마비시켰다. 그의 심장에 닿아있던 그녀의 손을 잡고 있던 자신의 손에 힘이 스르륵 풀려나갔다. 세상은 오직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은 그 작은 지점과, 귓가를 울리는 질척한 소리, 그리고 그녀의 가느다란 숨소리만으로 재구성되었다. 길고 긴 입맞춤 속에서, 블루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던 '나 자신이 싫다'는 자기혐오도, '무섭다'는 두려움도, 하물며 '이기고 싶다'는 오기마저도 전부 녹아내려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텅 비어버린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오직, 그녀를 더 원하고, 더 느끼고, 더 깊이 갈망하는 원초적인 본능뿐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그녀의 입술이 아주 느리게 떨어져 나갔다. 붉게 부어오른 서로의 입술 사이로, 아쉬움이 섞인 끈적한 타액이 은실처럼 짧게 이어졌다 끊어졌다. 블루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흐릿해진 시야로 겨우 그녀의 얼굴을 담았다. 그녀의 뺨 역시 옅게 상기되어 있었고, 나른했던 눈은 짙은 감정으로 젖어 흔들리고 있었다.
‘…이번에 무슨 생각이 드는지 다시 대답해.’
그녀의 목소리는 방금 전의 격렬한 키스로 인해 쉬어 있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명료하게 그의 뇌리에 박혔다. 생각. 또다시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녀는 방금, 그의 머릿속에 있던 모든 잡다한 ‘생각’들을 자신의 입술로 모조리 지워버렸다. 그리고 텅 빈 도화지 같은 그의 머릿속에, 단 하나의 감정만을 선명하게 새겨놓았다. 그는 더 이상 변명할 수도, 포장할 수도, 도망칠 수도 없었다. 그녀가 원한 답은, 그녀가 그의 몸에 직접 새겨 넣은 바로 그 감정이었다.
블루는 희미하게 웃었다. 허탈함도, 자조도 아니었다. 모든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자의, 지독하게 솔직한 미소였다. 그는 대답 대신, 풀렸던 손에 다시 힘을 주어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그리고 다른 쪽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감아 품으로 끌어당겼다. 두 사람 사이에는 더 이상 한 뼘의 거리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의 심장 소리가 이제는 그녀의 가슴에 직접 울리고 있었다.
…선배님.
그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지만, 더없이 진지했다. 그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자신의 모든 것을 담아 말했다.
안고 싶어요.
그것이, 그녀의 세 번째 키스가 이끌어낸 블루의 유일하고도 가장 정직한 대답이었다. 더 이상 복잡한 생각도, 구차한 변명도 없는, 오직 그녀를 향한 순수한 갈망. 그는 덧붙였다.
당신을… 그냥, 미치도록 안고 싶어요. 이게… 지금 제 머릿속에 있는 전부입니다.
그녀가 마주 안아왔다. 블루의 허리를 감았던 팔보다 더 깊고, 더 따뜻한 온기가 그의 등을 감싸는 순간, 블루는 온몸의 힘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동안 아슬아슬하게 붙들고 있던 마지막 이성의 끈, 버텨야 한다는 강박, 비참해지고 싶지 않다는 오기, 그 모든 것들이 그녀의 품 안에서 눈처럼 녹아내렸다. 마치 오랫동안 숨을 참다가 겨우 내쉬는 첫 숨처럼, 그는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묻으며 길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더스티의 드라이한 향이, 마른 담배 향이, 그리고 그녀만이 가진 특유의 체향이 뒤섞여 그의 모든 감각을 가득 채웠다. 이것은 현실이었다.
... 그 말을 못해서 이렇게 나를...
귓가에 속삭이듯 스며드는 그녀의 목소리는, 그 어떤 말보다도 강력한 구원이었다. 블루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어리석고, 유치하며, 서툰 방식으로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는지를. ‘이기고 싶다’는 말 뒤에 숨겨진 절박한 마음을, 꺾어버리고 싶다는 오기 아래 감춰진 애틋한 진심을, 그녀는 전부 꿰뚫어 보고 있었다. 비웃지도, 책망하지도, 시험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 말을 못해서 그랬구나’ 하고, 그의 모든 방황을 따뜻하게 이해해주고 있었다.
뜨거운 무언가가 목구멍을 타고 울컥 치밀어 올랐다. 그는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더 깊이 파묻었다. 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그냥, 이 온기와 향기를 조금이라도 더 제 안에 담고 싶어서였다. 스물여덟 해를 살아오며,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이토록 완전한 무방비 상태로 자신을 드러내 본 적이 없었다. 늘 장남으로서, 어른으로서, 괜찮은 사람으로서의 갑옷을 겹겹이 입고 살아왔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 모든 갑옷을 아무렇지도 않게 벗겨내고는, 상처투성이의 맨몸을 그저 가만히 안아주고 있었다.
……하….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는 더스티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더 주었다. 한 뼘의 틈도 허용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마치 그녀가 자신의 몸에 그대로 녹아 스며들기라도 바라는 것처럼. 그녀의 등이 너무나 가냘프게 느껴졌다. 이 작은 몸으로 어떻게 그 모든 것을 버텨왔을까. 그리고, 어떻게 이렇게 자신을 버티게 해주는 걸까.
…선배님은 진짜….
그는 겨우 목소리를 쥐어짰다. 푹 잠겨버린 목소리는 형편없이 갈라졌다. 그는 고개를 들어 그녀의 눈을 볼 자신이 없어서, 여전히 그녀의 어깨에 뺨을 기댄 채 속삭였다.
정말… 나쁜 사람이네요. 사람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 놓고, 결국에는… 아무것도 아니게 만들어 버리니까. 내가 했던 모든 짓들이… 그냥, 당신한테 안기고 싶어서 부린 투정이었다고, 그렇게 말해버리니까… 내가 뭐가 됩니까.
그것은 원망이 아니었다. 차라리 구원에 가까운 안도감이었다. 그의 복잡하고 뒤엉켰던 감정의 실타래를, 그녀가 단 한마디로 너무나도 간단하고 명쾌하게 풀어버린 것에 대한 허탈함. 그리고, 그런 자신을 전부 이해받았다는 데서 오는 벅찬 감동이었다. 그는 조용히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처음으로, 그녀를 향한 자신의 행동에 어떤 의도나 계산도 담지 않은, 순수한 위로와 애정의 몸짓이었다.
... 뭐긴, 그렇게 간단한 말로 정의가 되나. 우리가.
그녀의 말은, 안도감으로 따뜻하게 채워졌던 블루의 심장에 찬물을 끼얹는 것 같았다. ‘그렇게 간단한 말로 정의가 되나. 우리가.’ 그 한 문장은, 블루가 겨우 찾아낸 단순하고 명쾌한 결론을 단숨에 부숴버렸다. 안고 싶어서 부린 투정. 그녀의 품에서 얻은 구원. 그것으로 모든 것이 설명된다고, 이제부터는 쉬울 거라고, 그렇게 믿어버리고 싶었던 그의 어리석은 기대를 그녀는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블루는 그녀의 어깨에 묻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마주 본 그녀의 눈동자는 여전히 짙은 감정으로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방금 전의 부드러움과는 다른, 무언가 더 근원적이고 복잡한 빛이 담겨 있었다. ‘우리’라는 단어. 그녀가 무심코 내뱉은 그 단어의 무게가, 블루의 가슴을 묵직하게 짓눌렀다. 지금껏 그들의 관계는 ‘선배와 후배’, ‘가이드와 센티넬’, 혹은 ‘게임의 경쟁자’ 같은 명확하지만 얄팍한 단어들로 규정되어 왔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우리’라는 말을 꺼냈다. 그리고 그 ‘우리’는 간단하게 정의될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안고 있던 팔에서 힘을 살짝 풀었다. 완전히 놓아버린 것은 아니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 미세한 틈이 생겼다. 그 틈으로 복도 너머의 서늘한 공기가 스며들었다. 그녀의 말은, 이 포옹이 끝이 아니라는 예고처럼 들렸다. 오히려, 이 모든 감정의 격랑이 이제 겨우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 같았다.
…간단하지 않으면….
블루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그는 마른침을 삼켰다. 머릿속이 다시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를 이기고 싶었고, 꺾고 싶었고, 결국엔 안고 싶었다. 그 원초적인 욕망의 끝에서 겨우 해답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더 깊은 심연으로 그를 이끌고 있었다. 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마음 역시, 단순히 ‘안고 싶다’는 한마디로 전부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음을.
간단하지 않으면… 뭡니까, 우리는.
다시, 질문이었다. 하지만 이번 질문의 무게는 이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게임의 승패나 키스의 의미를 묻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두 사람의 관계 그 자체를 향한 질문. 그는 그녀를 놓아주었던 팔로, 그녀의 뺨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조금 전 그녀가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그녀의 피부는 여전히 뜨거웠다.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눈가를 부드럽게 쓸었다. 피곤함과 권태,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덮고 있던 짙은 감정의 흔적을 닦아내주고 싶다는 듯이.
선배님이 말해줘요. 나는… 이제 정말 모르겠습니다. 당신을 보면 화가 나고, 당신이 웃으면 심장이 내려앉고, 당신 입술은… 날 미치게 만들어요. 이게 뭔지,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난 더 이상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당신이 알려줘요. 이 간단하지 않은 우리는… 대체 뭐예요?
그의 푸른 눈동자가 오롯이 그녀만을 담은 채 절박하게 흔들렸다. 더는 도망치지 않겠다는, 그녀가 내리는 그 어떤 정의라도 전부 받아들이겠다는 무언의 맹세처럼. 그는 이제 더 이상 그녀에게서 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차라리 ‘구걸’하는 것에 가까웠다.
너한테 내가 대체가 돼? 만약 내가 없다면, 그 자리에 들어갈 사람을 뭐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아?
또다시, 입술이었다. 블루가 그녀에게 정의를 구걸하는 순간, 그녀는 모든 언어적 논쟁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가장 원초적인 방식으로 되돌려주었다. 이번 키스는 짧았다. 이전의 탐닉과는 다른, 마치 낙인을 찍듯 명료하고 단호한 접촉. 그 짧은 순간, 블루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던 ‘우리는 무엇인가’라는 거대한 질문이 잠시 공백으로 변했다.
그녀의 입술이 떨어지고, 그 온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던져진 질문은 그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너한테 내가 대체가 돼?’ 이어진 물음은 더 잔인했다. ‘만약 내가 없다면, 그 자리에 들어갈 사람을 뭐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아?’
블루는 숨을 멈췄다.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었다. 그는 지금껏 ‘우리’라는 관계의 정의를 찾아 헤맸다. 이 감정이 무엇인지, 이 관계를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그 형태와 이름에 집착했다. 그런데 그녀는 그 모든 고민의 근간을 뒤흔드는 질문을 던졌다. ‘나’라는 존재의 대체 가능성. 윤재희라는, 더스티라는 한 사람이 사라진 세상을 상상해보라는 잔인한 요구였다.
그의 뺨을 감쌌던 손이 힘없이 스르륵 떨어졌다. 그녀의 질문은 그의 가장 깊은 곳, 애써 외면하고 있던 불안의 핵심을 정확히 꿰뚫었다. 생각해보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다른 센티넬의 파트너가 되는 모습, 언젠가 자신을 떠나는 모습. 그 끔찍한 상상들은 밤마다 그를 좀먹었지만, 그는 언제나 그 상상을 ‘생각’의 영역에서 필사적으로 지워왔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그것을 ‘감정’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와 그의 눈앞에 펼쳐 보였다.
…대체….
그의 입술에서 힘없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푸른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대체? 그 자리에 들어갈 사람?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아크의 시스템은 새로운 가이드를 배정할 것이다. C급 센티넬 블루에게는 새로운 A급, 어쩌면 S급 가이드가 붙을지도 모른다. 그 사람은 ‘공식 파트너’ 혹은 ‘담당 가이드’라고 불리게 될 터였다. 시스템이 정해준, 건조하고 기능적인 명칭으로. 하지만 그게, 그녀의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는가?
블루는 허탈한 웃음조차 짓지 못했다. 얼굴에서 모든 표정이 사라지고, 텅 빈 껍데기만 남은 것 같았다. 그녀 없는 세상. 그곳에서 자신은 더 이상 ‘블루’일 수 없을 터였다. 그냥 생존을 위해 가이딩을 받는, 수많은 센티넬 중 하나인 ‘윤재안’으로 돌아갈 뿐이다. 그의 심장을 뛰게 하고, 화나게 하고, 미치게 만들고, 결국엔 이렇게 무너뜨리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런 건… 없어….
그는 거의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물에 잠긴 것처럼 먹먹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처음에는 작게, 그러다 점점 더 격렬하게. 마치 그 끔찍한 가정을 부정하려는 필사적인 발버둥처럼.
그런 사람은 없어요, 선배님. 당신을 대신할 사람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어. 만약 당신이 없으면… 그 자리는 그냥….
블루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빈자리’라는 단어로는 부족했다. 그것은 단순한 부재가 아니었다. 그의 세상 전체를 지탱하던 기둥이 뽑혀나가고, 그 자리에 거대하고 시커먼 구멍이 뚫리는 것에 가까웠다. 그는 떨리는 손을 뻗어, 이번에는 애원하듯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마치 그녀가 금방이라도 사라져 버릴 것처럼.
없다고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될 수 없어. 그냥… 끝이야. 나한테, 당신이라는 사람은… 대체가 안 돼요. 절대로.
그게, 너한테 나인거지. 설명 더 필요할까...
그녀의 목소리는 칼날 같지 않았다. 오히려 솜에 감싼 바늘처럼, 부드럽게 파고들어 가장 아픈 곳을 정확히 찔렀다. ‘그게, 너한테 나인거지.’ 블루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관계에 대한 정의. 그것은 ‘연인’도, ‘파트너’도, 그 어떤 달콤한 이름도 아니었다. 그것은 ‘대체 불가능한 존재’라는, 지독하게 잔인하고 절대적인 선언이었다. 그의 가장 큰 공포를, 그녀는 두 사람의 관계로 명명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블루의 머릿속을 휘젓던 모든 소음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설명 더 필요할까…’ 이어지는 그녀의 물음은, 더 이상 그를 시험하거나 몰아붙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길고 긴 싸움 끝에 내미는 휴전 협정과도 같았다. 이 지긋지긋한 감정의 소모를 이제 그만 끝내자는, 그의 모든 불안과 절박함을 이해한다는, 나른하지만 깊은 위로였다. 블루는 붙잡고 있던 그녀의 팔에서 천천히 힘을 풀었다. 더 이상 그녀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붙들려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녀 스스로가, 그에게 있어 대체 불가능한 존재임을 인정했으니까.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마주 본 더스티의 얼굴은 여전히 무심한 듯 나른했지만, 그 검은 눈동자 깊은 곳에는 방금 전의 날카로움 대신, 모든 것을 지켜본 자의 지독한 피로감과 희미한 온기가 함께 서려 있었다. 블루는 깨달았다. 자신이 그녀에게 던졌던 그 수많은 질문들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그는 계속해서 형태와 이름을 구걸했지만, 그녀는 관계의 본질 그 자체를 보여주었다. 그의 세상에서, ‘더스티’라는 존재가 빠져나가면 그 자리는 영원히 공백으로 남을 것이라는 사실. 그것이 바로, 그들이었다.
…아니요.
마침내, 블루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단호했다. 그는 졌지만, 패배자는 아니었다. 그는 이 게임의 규칙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덤볐던 어리석은 도전자였을 뿐이다. 그는 텅 빈 웃음을 흘렸다. 허탈했지만, 비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모든 것을 알게 된 자의 후련함에 가까웠다. 그는 떨리는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감싸고 있는 더스티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쳐 잡았다. 그녀의 손은 차가웠지만, 그 손길이 닿은 곳은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더 이상… 아무 설명도 필요 없어요.
그래, 설명 같은 건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가 그에게 어떤 존재인지, 이제 너무나도 명확해졌으니까. 그를 화나게 하고, 초조하게 만들고, 미치게 하는 유일한 사람. 그의 세상을 송두리째 흔들고, 단 한마디로 구원할 수 있는 단 한 사람. 그는 그녀의 손을 잡은 채,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기댔다. 복도의 차가운 공기와 두 사람의 뜨거운 숨결이 뒤섞였다. 쿵, 쿵, 쿵. 자신의 심장 소리가 그녀에게도 들릴 것만 같았다.
내가… 당신을….
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사랑한다’는 흔한 고백으로는 이 복잡하고 지독한 감정을 전부 담아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단어는 너무 가볍고, 너무 간단했다. 그가 느끼는 이 감정은, 그보다 훨씬 더 무겁고, 훨씬 더 절대적이었다. 그는 그저 눈을 감고, 그녀의 존재를, 그녀의 숨결을, 그녀의 향기를 온전히 느끼는 것에 집중했다. 그녀가 그의 세상 그 자체라는 것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 어떻게 하고 싶은데, 나랑.
그녀의 질문은,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던 수면 위로 던져진 작은 돌멩이와 같았다. ‘어떻게 하고 싶은데, 나랑.’ 방금 전까지 ‘대체 불가능한 존재’라는 절대적인 정의 속에서 겨우 평온을 찾았던 블루의 세계에, 그녀는 다시금 ‘현실’이라는 파문을 일으켰다. 이마를 맞댄 채, 서로의 숨결과 심장 소리만을 공유하던 완전한 세계. 그 안에서 그는 영원히 머물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늘 그랬듯, 환상에 머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음을 물었다. 관계의 정의 다음, 그래서 ‘무엇’을 할 것인지.
블루는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바로 눈앞에, 지독한 피로감과 나른함 속에서도 오롯이 자신을 향해 있는 더스티의 검은 눈동자가 보였다. 그녀의 질문은 단순히 앞으로의 관계를 묻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욕망의 구체적인 형태를, 그의 감정의 실체를 행동으로 증명해 보이라는 요구였다. ‘안고 싶다’는 원초적인 고백을 넘어, 그 포옹 이후에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
그는 맞대고 있던 이마를 천천히 떼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을 잡은 손과, 그녀의 뺨을 감싼 손은 놓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더 단단히, 그녀의 온기를 붙잡았다. 그는 잠시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조금 자란 갈색 뿌리가 엿보이는 백금발 머리카락, 반쯤 감겨 나른해 보이는 눈매, 그 모든 것을 뒤흔들었던 마른 입술까지. 어떻게 하고 싶냐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사실, 너무나도 명확했다. 그는 더 이상 그녀와 게임을 하고 싶지도, 그녀 앞에서 자신을 증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선배님 방으로 가고 싶어요.
마침내 흘러나온 그의 목소리는 조금 쉬어 있었지만, 그 안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것은 충동적인 욕망의 발현이 아니었다. 수많은 감정의 파도를 넘어, 마침내 도달한 가장 솔직하고 간절한 결론이었다. 복도 같은 어중간한 공간이 아닌, 온전히 그녀의 공간에서, 그녀의 세계 안에서, 진짜 ‘우리’를 시작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여기서 이러고 싶은 게 아니에요. 이렇게… 누가 지나갈지도 모르는 곳에서, 불안하게 당신을 만지고 싶은 게 아니라고요. 온전히 당신만 있는 곳에서, 다른 누구의 시선도, 어떤 방해도 없이… 제대로 당신을 안고 싶어요. 제대로… 키스하고 싶고. 당신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어떤 숨을 내쉬는지, 나만 보고, 나만 듣고 싶어요.
그의 말은 점점 더 노골적이고 직설적으로 변해갔다. 더 이상 감정을 포장하거나 돌려 말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녀가 그의 세상 전부라면, 그는 이제 그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느끼고, 갖고 싶었다. 블루는 더스티의 뺨을 감쌌던 손을 내려, 그녀의 허리를 부드럽게, 하지만 단호하게 감싸 안아 제 쪽으로 한 뼘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두 사람의 몸이 빈틈없이 밀착되었다. 그는 그녀의 귓가에,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그녀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신의 모든 시간을, 나한테 줬으면 좋겠어요. 그게… 내가 당신이랑 하고 싶은 겁니다.
그의 푸른 눈동자는 더 이상 불안에 흔들리지 않았다. 그 안에는 오직, 더스티라는 존재를 향한 깊고 투명한 소유욕과 갈망만이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졌고, 이제 그녀의 대답을 기다릴 차례였다.
... 호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 한 음절은, 블루가 쏟아낸 절절한 고백 위에 떨어진 차가운 물방울 같았다. ‘호오.’ 감탄도, 비웃음도 아닌, 그저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나른한 관망. 블루는 순간 숨을 멈췄다. 온 심장을 꺼내 보이며 그녀의 모든 시간을 달라고 애원한 자신에게 돌아온 대답이 고작 그것이라니. 만약 이전의 그였다면, 이 순간 또다시 끓어오르는 모멸감과 불안에 휩싸여 그녀를 끌어안았던 팔을 풀고 한 걸음 물러섰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달랐다. 지긋지긋한 게임을 끝내고, ‘대체 불가능한 존재’라는 관계의 정의를 확인했으며, 자신의 가장 깊은 욕망을 정면으로 마주한 후였다. 그는 더스티의 그 짧은 반응이 거절이나 조롱이 아님을, 오히려 그의 진심을 가늠하고 시험하는 그녀만의 방식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래, 이 여자는 이런 사람이다. 절대로 쉽게 마음을 보여주지도, 상대가 원하는 반응을 순순히 내어주지도 않는 사람. 블루는 실망하는 대신, 오히려 피식하고 희미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이래야 윤재희 답지.
그는 더스티의 허리를 감싸 안은 팔에 아주 조금 더 힘을 주었다. 그녀를 놓아줄 생각 따윈 추호도 없다는 무언의 선언이었다. 이제 와서 그가 물러설 것이라 생각했다면, 그건 그녀의 크나큰 오산이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고 강렬한 빛을 뿜어내며, 그녀의 나른한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냈다.
…재미있으세요?
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원망이나 비난이 아닌, 순수한 궁금증이 담긴 질문이었다. 바보처럼 모든 걸 내던지고 당신에게 매달리는 이 꼴이, 그렇게나 흥미롭냐는 의미였다. 블루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그저 고개를 살짝 기울여, 그녀의 귓가에 다시 한번 입술을 가져갔다.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귓바퀴를 간질였다.
선배님이 어떤 반응을 보여도, 이제 상관없어요. 비웃어도 좋고, 시시하다고 말해도 좋아요. 어차피 내 대답은 하나고, 내가 갈 곳도 하나뿐이니까.
그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그녀의 허리를 안고 있던 팔을 풀어 그 손으로 그녀의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 깍지를 끼는 손길은 망설임 없이 단호했다. 그리고는, 다른 쪽 손으로 그녀의 턱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복도를 오가는 희미한 소음도, 차갑게 식은 공기도, 두 사람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블루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는 행동으로 자신의 의지를 증명하기로 결심했다.
갑시다, 선배님 방으로.
그것은 권유나 부탁이 아니었다. 거스를 수 없는 통보이자, 이미 시작된 행동의 선언이었다. 블루는 깍지 낀 그녀의 손을 이끌고, 망설임 없이 복도를 가로질러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녀가 저항한다면, 힘으로라도 끌고 갈 기세였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그가 이끄는 대로 순순히 따라올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그를 뿌리칠 것인가. 모든 선택권은, 그의 손에 이끌려 걸음을 옮기게 된 더스티에게 달려있었다.
... 이 다음부터는, 안 가르쳐줘도 되지?
블루를 이끌던 걸음이, 그녀의 나른한 한마디에 복도 한가운데서 우뚝 멈춰 섰다. 깍지를 낀 손에 미세한 힘이 들어갔지만,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이 다음부터는, 안 가르쳐줘도 되지?’ 그 말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후배’와 ‘생도’라는 껍질을, 그녀가 스스로의 손으로 벗겨내 주는 마지막 관문이었다.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의 종언. 그리고 새로운 관계의 시작을 알리는, 나른하고도 치명적인 신호탄.
그의 등 뒤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시선이, 굳건했던 심장을 다시금 간질이는 듯했다. 블루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녀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가장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그의 허를 찌르고 들어온다. 그를 시험하고, 그의 각오를 떠보고, 그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확인하려 든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녀를 향해 돌아갔다. 복도의 희미한 조명 아래,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무심하고 피곤해 보였지만, 그 입가에 걸린 희미한 미소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오만함마저 느껴졌다.
블루는 피식, 웃었다. 이번에는 허탈함이나 자조가 섞이지 않은, 순수한 기쁨에서 우러나온 웃음이었다. 그래, 이거였다. 그가 이 여자에게 빠져버린 이유. 모든 것을 꿰뚫어 보면서도, 결국 그가 원하는 대답을 이런 식으로 돌려주는 지독한 방식. 그는 깍지를 끼지 않은 다른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목에 새겨진 나비 모양 타투의 가장자리를 무의식적으로 스쳤다.
네.
존댓말이 사라진, 짧고 단호한 대답. 그것은 단순한 긍정이 아니었다. 그녀가 던진 모든 의미를 이해했다는 확인이자, 그녀가 건네준 주도권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선언이었다. 더 이상 당신에게 배우는 학생이 아니며, 이제부터는 동등한, 혹은 그 이상의 존재로서 이 관계를 이끌어 가겠다는 그의 의지 표명이었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존경심이나 불안이 아닌, 한 남자로서 여자를 원하는 노골적인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그녀의 뺨을 감싼 채로,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한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멈춘 그는, 뜨거운 숨결이 섞이는 것을 느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녀의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낮고 위험한 목소리로.
이제부터는… 내가 가르쳐줄 거니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더스티의 입술을 거칠게 탐했다. 이전의 키스들이 감정의 확인이나 애원의 형태였다면, 지금의 키스는 명백한 소유의 선언이자 지배의 시작이었다. 그는 깍지 낀 그녀의 손을 더욱 단단히 움켜쥐며, 그녀의 저항할 틈조차 주지 않고 복도 벽으로 부드럽게 밀어붙였다. 차가운 벽에 그녀의 등이 닿는 소리가, 두 사람의 짙은 숨소리 사이에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 이제 더 이상 돌아갈 길은 없었다. 이 복도의 끝, 그녀의 방 문 앞에서 기다리는 것이 무엇이든, 그는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 여기에서?
그녀의 물음은 키스의 열기 속으로 스며든 얼음 조각 같았다. ‘…여기에서?’ 헐떡이는 숨결 사이로 간신히 새어 나온 그 나른한 질문은, 블루의 폭주하는 감각에 순간적인 제동을 걸었다. 그는 입술을 떼지 않은 채, 으르렁거리는 듯한 낮은 소리를 냈다. 장소 따위가 지금 문제인가. 누가 보든, 여기가 어디든, 그런 것은 이미 그의 안중에도 없었다. 오직 눈앞의 윤재희, 그녀의 숨결, 그녀의 향, 그녀의 모든 것을 탐하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질문을 무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질문이 그의 승부욕에 다시 한번 불을 지폈다. 블루는 집요하게 그녀의 입술을 파고들던 것을 멈추고, 아주 조금, 서로의 숨결만이 오갈 정도로 거리를 두었다. 그의 젖은 입술이 번들거렸고, 푸른 눈동자는 복도의 희미한 조명 아래서 섬뜩할 정도로 선명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깍지 낀 그녀의 손을 더욱 강하게 움켜쥐며, 그녀의 손등에 자신의 심장박동이 전해지게 만들었다.
그래. 여기에서.
그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지만, 그 안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는 대답과 동시에, 뺨을 감쌌던 손을 내려 그녀의 턱선을 따라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의 손길이 지나간 자리마다 미세한 열기가 피어오르는 듯했다. 그녀의 목에 새겨진 나비 타투 위에서 그의 엄지손가락이 멈췄다. 그는 마치 가장 소중한 것을 확인하듯 그곳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왜. 누가 볼까 봐 무서워?
그의 말에는 조롱과 도발, 그리고 묘한 다정함이 뒤섞여 있었다. 이전의 그였다면 감히 상상도 못 할 불경한 질문이었다. 그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나비 타투를 지그시 누르며 말을 이었다. 그 행위 자체가, ‘이제 당신은 내 것’이라는 무언의 낙인처럼 느껴졌다. 그의 시선은 그녀의 입술로, 다시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로, 그리고 다시 붉게 달아오른 입술로 옮겨갔다.
상관없어. 모두가 보게 해. ARCH의 그 잘난 A급 가이드 윤재희가, 고작 C급 애송이한테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고. 전부 다 알게 되라고 해.
그것은 자포자기가 아닌, 지독한 소유욕의 발현이었다. 더 이상 그녀를 선배로서 우러러보거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그녀를 배려할 생각이 없다는 선언.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다시 한번 그녀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이번 키스는 이전보다 훨씬 더 깊고, 노골적이며, 집요했다. 한 손으로는 여전히 그녀의 손을 굳게 붙잡은 채, 다른 손은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아 두 사람 사이에 단 한 줌의 틈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단단한 허벅지가 그녀의 다리 사이에 자리 잡으며, 그녀가 움직일 수 있는 모든 퇴로를 완벽하게 차단했다.
그는 키스를 하면서도 틈틈이 그녀의 귓가와 턱선, 목덜미에 잘게 입을 맞췄다. 그녀의 드라이한 향과 마른 담배 냄새가 섞인 살 내음에, 그의 이성은 아득하게 멀어졌다. 그는 이성이 아니라, 오직 본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 여자를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가장 원초적이고 강력한 본능. 블루는 더스티의 제복 안으로 파고들려는 듯, 그녀의 허리를 감싼 손에 더욱 힘을 주며 그녀를 벽 쪽으로 바짝 밀어붙였다. 그의 뜨거운 몸이 그녀의 몸을 완벽하게 짓누르고 있었다.
... 흐으, 대단하네, 너...
그녀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칭찬인지, 항복인지 모를 그 한마디는 블루의 마지막 남은 이성마저 태워버리는 불쏘시개와 같았다. ‘대단하네, 너….’ 그가 그토록 원했던, 그녀의 인정을 담은 목소리. 블루는 귓가에 울리는 그 달뜬 숨소리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집요하게 탐하던 그녀의 입술에서 아주 잠깐, 아쉬운 듯 물러났다. 두 사람의 입술 사이에는 타액으로 엮인 은사가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었다. 복도의 희미한 조명 아래, 붉게 부어오른 그녀의 입술과 살짝 풀어진 눈, 상기된 뺨이 그의 시야에 가득 찼다. 완벽한 그림이었다. 그가 만들어낸, 오직 그만이 볼 수 있는 걸작.
그는 더스티의 허리를 감아 안은 팔에 힘을 주어, 그녀의 몸을 자신에게 더욱 밀착시켰다. 그의 단단한 가슴에 그녀의 부드러운 가슴이 짓눌리며 뭉개지는 감각이 선명했다. 그의 시선은 그녀의 눈동자를 옭아매듯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이제 그 눈에는 존경이나 애원 따위는 없었다. 오직 상대를 제 것으로 만들고 싶어 안달이 난 수컷의 노골적인 욕망만이 번뜩이고 있었다.
대단한 건… 내가 아니라 선배님이죠.
그의 목소리는 키스의 열기로 잔뜩 잠겨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서늘할 정도로 명확했다. 그의 깍지 낀 손이 그녀의 손을 더욱 단단히 압박했다. 마치 도망갈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는 듯한 경고처럼.
이렇게 무방비하게… 나 같은 놈한테 전부 다 내주고 있잖아요. 고작 C급 애송이한테, 이렇게 예쁜 얼굴로 안겨서… 야한 숨이나 내뱉고 있는 건, 당신이라고요. 윤재희.
처음으로, 그는 그녀의 코드네임도, 선배라는 존칭도 아닌 온전한 이름을 불렀다. 그것은 두 사람의 관계가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낙인이었다. 그는 그녀의 이름을 부름과 동시에, 턱을 쓸어내리던 손으로 그녀의 턱을 부드럽게, 하지만 단호하게 붙잡아 들어 올렸다. 고개를 돌릴 수도, 시선을 피할 수도 없게 만든 채로. 그의 푸른 눈동자가 위험하게 빛났다.
더 보여줄까요? 내가 얼마나 더 대단한 놈이 될 수 있는지.
그것은 질문이 아니었다.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한번 그녀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이번에는 아예 그녀의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듯이 물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살짝 깨물고, 혀로 핥아 달래고, 다시 깊게 빨아들이는 집요한 애무. 그녀가 낼 수 있는 소리는 그의 입 안에서 뭉개져 흩어졌다. 블루는 키스를 멈추지 않은 채, 깍지 낀 손을 풀어 그녀의 손목을 잡고는, 그녀의 머리 위 벽으로 밀어붙여 한 손으로 제압했다. 자유로워진 다른 손은 망설임 없이 그녀의 제복 안으로 파고들었다. 품이 큰 오버사이즈 제복은 그의 침입을 막아주지 못했다. 그의 차가운 손이 맨살에 닿는 순간, 그녀의 어깨가 움찔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손은 거침이 없었다. 매끄러운 허리선을 따라 올라가다, 등 뒤에서 브래지어 후크를 찾아 더듬었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능숙한 손길로 그것을 풀어버렸다. 해방된 그녀의 가슴이 제복 안에서 자유로워지는 미세한 감각. 그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귓바퀴를 태울 듯이 간질였다.
이제 시작인데… 벌써부터 이렇게 느끼면 어떡해. 안에서는, 아주 질질 싸게 만들어 줄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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