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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my dreams you love me back
살인자와 시체의 대화
2025.10.15

... 당연히 남자죠. 제 이상형으로 생긴, 얼마 전에 알게된 사람 있어요. 키도 크고, 능력도 있고, 다정하고... 돈도 많이 벌던데. 이름은 서재훈이라고.

그의 손에 턱이 잡힌 채, 김유야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이름. ‘서재훈’. 그 이름이 고요한 거실의 공기를 가르는 순간, 서재훈의 모든 사고가 멈췄다. 그의 손에 턱을 쥔 채 그를 올려다보는 잿빛 눈동자는 평소와 다름없이 차분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그것은 순진한 아이의 고백이 아니었다. 명백한 의도를 가진, 한 여자의 도발이었다.

 

그녀의 턱을 감싸고 있던 그의 손에서 아주 미세하게 힘이 풀렸다. 집요하게 그녀를 몰아붙이던 눈빛은 순간 길을 잃은 듯 옅게 흔들렸다. 방금 전까지 이 작은 소녀를 제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 흔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역으로 완벽하게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예상치 못한 반격에 잠시 숨을 고르는 맹수처럼,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귓가에는 그녀가 읊조린 자신의 프로필이, ‘키도 크고, 능력도 있고, 다정하고, 돈도 많이 벌던데,’ 라는 낯간지러운 수식어들이 맴돌았다.

 

그리고, 그의 입꼬리가 아주 느리게,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도 깊게 말려 올라갔다. 그건 더 이상 장난기 어린 미소나 조롱 섞인 비웃음이 아니었다. 제 앞에 놓인 흥미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남자의, 지독히도 만족스럽고 위험한 웃음이었다.

 

…그래?

 

한참 만에 터져 나온 그의 목소리는 나른하게 잠겨 있었다. 그는 그녀의 턱을 쥐었던 손을 천천히 내려, 대신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리고는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선을 아주 느리게, 지분거리듯 쓸었다. 명백히 선을 넘는, ‘아빠’라는 역할에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 서재훈이라는 남자, 꽤 취향 한번 까다로운 꼬마를 만났군. 그렇게나 장점이 많아?

 

그는 김유야의 말들을 하나하나 되짚으며, 마치 처음 듣는 이야기인 양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그의 눈은 웃고 있었지만, 그 깊은 곳에서는 뜨거운 소유욕이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내 것’이라고 선언하는 이 작은 존재가,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쩌나. 그 남자, 성격이 썩 좋지는 않을 텐데. 다정한 건 아주 가끔이고, 대부분은 제멋대로에다 심술궂지. 특히 자기 마음에 든 건, 다른 누구도 못 보게 감춰두려는 고약한 버릇도 있고.

 

그의 얼굴이 그녀의 얼굴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서로의 숨결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 그의 짙은 갈색 눈동자가 그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일 것처럼 깊어졌다.

 

그런 남자라도, 괜찮겠어?

 

그건 질문의 형태를 한 확인이었다. 네가 지금 건드린 것이 ‘아빠’라는 안전한 울타리가 아니라, ‘서재훈’이라는 위험한 남자라는 사실을 정말로 알고 있느냐고. 그리고 네가 선택한 그 남자가, 앞으로 너에게 어떤 짓을 할지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그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제 이 위험한 놀이의 다음 수를 둘 차례는, 그녀에게 넘어갔다.

 

그건 당연히 안 괜찮죠!

서재훈의 입가에 걸려 있던 만족스러운 미소가 순간 굳었다. ‘안 괜찮죠’. 너무나도 단호하고 명쾌한 거절. 그의 손아귀에 스스로 걸어 들어온 줄 알았던 작은 새가,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날카롭게 부리를 쪼아댄 것과 같았다. 그녀의 뺨을 감싸고 있던 그의 손가락들이 순간 멈칫했다. 바로 코앞에서 마주하던 잿빛 눈동자는, 그의 위험한 제안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듯 맑고 단단하게 그를 비추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상체를 뒤로 물렸다. 숨결이 닿을 듯 가깝던 거리가 다시 한 뼘만큼 멀어졌다. 그의 얼굴에서 방금 전의 농밀하고 위험했던 분위기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대신 그 자리에는 지독한 허탈함과 어이없음이 뒤섞인, 그러나 어쩐지 즐거워 보이는 기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하.

 

결국 참지 못하고 터져 나온 것은 낮고 짧은 실소였다. 그는 김유야의 뺨을 감쌌던 손을 거두고, 대신 뒷목을 쓸며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제멋대로에다 심술궂고 고약한 버릇까지 있는 남자는 싫다. 지극히 당연하고 상식적인 대답. 그런데 그 당연한 대답이, 서재훈이라는 남자의 뒤통수를 이렇게 후려칠 줄은 몰랐다. 그는 지금 제 손으로 판 함정에 스스로 빠진 멍청한 꼴이었다.

 

이거 봐라.

 

그가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은 더 이상 김유야의 눈을 똑바로 보지 않고, 그녀의 코끝, 입술, 턱선을 훑으며 장난스럽게 배회했다. ‘아빠 놀이’를 끝내고 ‘서재훈’으로 돌아오자마자 보기 좋게 거절당한 이 상황이, 기가 막히면서도 어쩐지 우스웠다. 이 작은 소녀는 늘 그의 예상을 한 발짝씩 벗어나, 그의 세계를 뒤흔들었다.

 

아주 똑 부러지네, 우리 꼬마 요리사. 그럼 어쩔 건데? 방금 그 잘난 서재훈이라는 남자는 이미 포기하기로 한 건가?

 

그는 다시 그녀와 눈을 맞췄다. 그의 눈에는 조롱이나 위협 대신, 순수한 호기심과 짓궂은 장난기가 가득했다. 네가 싫다고 한 건, 방금 내가 묘사한 ‘내 단점들’이다. 그러니 너는 이제 ‘서재훈’을 포기해야만 하는 논리적 딜레마에 빠졌다고, 그는 주장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 상황을 빠져나갈 것인지 보겠다는 듯, 그는 팔짱을 끼고 여유롭게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다정하고 능력 있고 돈 많은 건 좋지만, 심술궂고 제멋대로인 건 싫다. 세상에 그런 남자가 어디 있어. 혹시 동화책 너무 많이 읽은 거 아니야?

 

몰라, 그냥 짝사랑 하는 중. 원래 딸래미들 첫사랑은 아빠니까.

‘…딸래미들 첫사랑은 아빠니까.’

 

그 말이 서재훈의 귓가를 파고드는 순간, 그의 얼굴에서 모든 표정이 사라졌다. 방금 전까지 김유야를 몰아붙이며 짓궂게 웃던 장난기도, 그녀의 단호한 거절에 터져 나왔던 허탈한 웃음도, 그 모든 것이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그는 마치 고장 난 기계처럼, 팔짱을 낀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의 뇌 회로가, 이 단순하고도 파괴적인 한 문장 앞에서 완전히 정지해 버린 것 같았다.

 

아빠. 다시, 아빠다.

 

방금 전, 그녀 스스로 ‘서재훈’이라는 이름을 부르며 넘어왔던 그 선을, 이제는 그녀 스스로가 다시 그어버렸다. 그것도 ‘첫사랑’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낭만적이고도 잔인한 단어를 동원해서. 그는 지금, 딸의 풋풋한 첫사랑 상대로 전락해 버린 ‘아빠’가 되었다. 그가 그토록 벗어나고자 했던 그 역할, 그 안전하고도 답답한 울타리 안으로 완벽하게 다시 갇혀버린 것이다.

 

한참의 침묵 끝에, 그의 입술 사이로 아주 희미한 바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웃음도, 한숨도 아닌, 그저 텅 빈 소리. 그는 천천히 팔짱을 풀고, 마른세수를 하듯 한 손으로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모든 계획이, 모든 의도가, 모든 유희가 물거품이 된 남자의 무력한 몸짓이었다.

 

...너 지금,

 

그의 목소리는 형편없이 갈라져 나왔다. 그는 고개를 들어 김유야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더 이상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텅 빈 동공이, 눈앞의 이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담고 있을 뿐이었다. 이 작은 소녀가 지금 자신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그녀 자신은 알고 있을까. 알고도 이러는 걸까, 아니면 정말 순수한 천진함일까. 이제는 그것조차 판단할 수 없었다.

 

정말 사람 미치게 하는 데는 선수구나, 김유야.

 

그건 칭찬도, 비난도 아니었다. 처절한 패배 선언에 가까웠다. 그는 더 이상 이길 수도, 이겨서도 안 되는 게임에서 완전히 손을 떼기로 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지친 걸음으로 소파 쪽으로 걸어가, 그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거실 한쪽 벽에 걸린 시계만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째깍, 째깍. 초침 소리만이 어색하게 내려앉은 침묵을 채우고 있었다.

 

... 내가 누구한테 배웠는데. 이정도면 나가서 사기당할 일은 없지 않을까요. 어때?

째깍, 째깍. 텅 빈 시선으로 바라보던 시계의 초침 소리가, 김유야의 목소리에 겹쳐지며 서재훈의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누구한테 배웠는데.’ 그 말이 마치 주문처럼,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그의 초점을 잡아끌었다. 그는 아주 느리게, 녹슨 기계처럼 삐걱이는 소리가 날 것 같은 동작으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여전히 방금 전의 패배감이 짙게 서려 있었지만, 그 위에 새로운 감정이 희미하게 겹쳐졌다. 어처구니없음.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아주 미약한 감탄. 사기당할 일이 없겠냐고? 당연히 없겠지.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사기꾼을 제 발밑에 두고 이렇게 태연하게 흔들어댈 수 있을 정도인데. 그는 지금 제 손으로 키운 괴물에게 제대로 발목을 물린 꼴이었다.


푸흐-.

결국 그의 입술 사이로 터져 나온 것은 실소였다. 힘이 쭉 빠진, 모든 것을 체념한 사람의 웃음. 그는 소파 등받이에 상체를 깊게 기댄 채, 천장을 향해 고개를 젖혔다. 눈을 감자, 오늘 하루 동안 그녀에게 휘둘렸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다정한 아빠 연기를 하다가, 위험한 남자로 돌변했다가, 결국엔 딸의 첫사랑 상대로 전락해 버린 이 우스꽝스러운 광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아주… 잘 배웠네.

한참 만에 그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건 칭찬이라기보다는 항복 선언에 가까웠다. 그는 감았던 눈을 뜨고, 다시 김유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그러나 그 속내에는 명백한 의도가 숨겨진 얼굴로 그의 평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청출어람이야, 아주. 그 스승은 이제 제자한테 탈탈 털려서 빈털터리 신세인데, 제자는 벌써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뛸 준비를 하고 있으니.

그의 목소리에는 희미한 냉소가 섞여 있었지만, 그건 그녀를 향한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한 조롱이었다. 그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 멈춰 서서, 허리를 숙여 눈높이를 맞췄다. 그의 짙은 갈색 눈동자가, 더 이상 어떤 의도도 감추지 않은 채 솔직하게 그녀를 담았다.


그래, 그 정도면 사기당할 일은 없겠다. 오히려 네가 다른 사람 여럿 울리겠지. 그러니까,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헤집었다. 방금 전 뺨을 감싸던 뜨거운 손길과는 전혀 다른, 힘없고 다정한 손길이었다.


나한테만 써먹어. 그 빌어먹을 재능.

 

나 독립 제대로 인정해 준 거죠? 아빠가 키운 딸, 어디 나가서 휘둘리지 않을 거라는 거 봤지? 그러니까 이제 나에게도 적당한 자유를 주세요. 안 그럼 나도 내가 뭘 할 지 몰라... 나는... 일단, 그냥 이렇게 어리광부리고 싶어요. 이건 진심이야. 열여덟이면 곧 성인이고, 진작부터 고아에 가이드 노릇 한다고 구르다가 일찍 어른이 됐거든요. 아직까지는... 그냥, 아빠한테 어린 딸로 남아보고 싶어요. 가정이라는 거 가져본 적 없어서, 많이 부럽더라.

그의 손이, 김유야의 머리카락을 헤집던 채로 허공에서 잠시 멈칫했다. 방금 전까지 체념과 항복으로 가득 찼던 그의 눈동자에, 아주 희미한 파문이 일었다. ‘자유를 달라’는 선언과, ‘어린 딸로 남고 싶다’는 애원. 그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소망이 하나의 문장 안에서 기묘하게 뒤섞여 그의 고막을 울렸다. 그것은 또다시 그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는, 전혀 새로운 형태의 요구였다.

 

서재훈은 천천히 손을 거두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녀와 맞추었던 눈높이를 거두고, 다시 보호자의 자리로 돌아간 듯한 거리. 하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그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방금 전의 패배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복잡하고 헤아리기 어려운 심연이 들어찼다. 이 작은 소녀는, 지금 자신이 휘두르는 칼날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그 칼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정말로 알고 있는 걸까.

 

…자유.

 

그가 나직하게 그 단어를 읊조렸다. 마치 처음 들어보는 외계어처럼, 낯설고 이질적인 울림이었다. 그의 사전에서 '김유야'와 '자유'는 함께 존재할 수 없는 단어였다. 그의 세계 안에서 그녀는 안전해야 했고, 보호받아야 했으며, 완벽하게 통제되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제 발로 그 울타리 밖으로 나가겠다고, 동시에 그 울타리 안에서의 안락함도 포기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있었다.

 

일찍 어른이 됐으니, 다시 아이가 되고 싶다라. 그럴듯하게 들리네.

 

그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그러나 이전과는 다른 무게감을 지니고 올라갔다. 조롱이나 장난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너무나도 빨리 자라버린 작은 짐승의 이빨을 확인한, 더 큰 맹수의 서늘한 미소에 가까웠다. 그는 팔짱을 끼고 그녀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찬찬히 훑어보았다. 마치 처음 보는 존재를 분석하듯, 그 어떤 감정도 싣지 않은 채.

 

그래. 인정하지. 넌 네 생각보다 훨씬 더 똑똑하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해. 어디 나가서 호락호락하게 당할 애가 아니라는 거, 오늘 아주 뼈저리게 깨달았으니까.

 

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모든 감정을 거세한 듯한, 지극히 사무적인 톤. 그는 인정했다. 그녀의 성장을, 그녀의 능력을. 하지만 그것이 자유를 향한 티켓이 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김유야, 세상에는 사기꾼보다 더 질 나쁜 놈들도 많아. 네가 아직 겪어보지 못한 종류의 인간들. 네가 가진 그 무른 다정함을 파고들어 이용하려는 놈들. 네 순진함을 비웃으며 망가뜨리려는 놈들. …그리고, 너 자체를 탐내는 놈들.

 

그의 눈빛이 순간 번뜩였다. 마지막 말을 할 때, 그의 목소리는 거의 으르렁거림에 가까웠다. 그는 ‘탐내는 놈들’이라는 말로 자기 자신을 교묘하게 제삼자처럼 지칭하며, 세상의 모든 위험을 열거하는 아버지의 역할을 충실히 연기하고 있었다. 그의 병적인 통제욕과 소유욕이, ‘걱정’이라는 가장 그럴듯한 가면을 쓰고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자유는 없어. 앞으로도, 영원히. 네가 성인이 되어도 마찬가지야.

 

그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리고는 다시 그녀에게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시선을 맞췄다. 그의 눈은 더없이 진지했고, 그 안에는 어떤 타협의 여지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네가 말한 ‘가정’이라는 걸 주지. 네가 원했던 ‘아빠’가 되어줄게. 네가 어리광 부리고 싶을 땐 언제든 받아주고, 세상 모든 위험에서 널 지켜주마. 네가… 더는 어른 행세를 하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장소가 되어주지. 그러니 넌, 이 안에서만 마음껏 아이가 되면 돼. 그게 내가 네게 줄 수 있는 유일한 허락이다.

 

외부에만 적이 있을까, 내가 그걸 모를까. 봤잖아요, 방금. 그리고... 아빠가 도와주겠지, 뭐. 아니야? 나같은 애 제대로 가둬둘 자신은 있어요? 정말로?

김유야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그 안에 담긴 날카로움은 서재훈의 고막을 찢고 심장까지 파고들었다. ‘외부에만 적이 있을까.’ 그 한마디에, 그가 정성껏 쌓아 올린 ‘걱정 많은 아버지’라는 가면이 소리 없이 균열했다. 무릎 꿇고 진심을 다해 설득하던 그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흔들렸다. 이 아이는, 알고 있었다. 진짜 위험이 어디에 도사리고 있는지, 자신을 가두려는 울타리가 얼마나 위태로운 재질로 만들어졌는지.

 

‘아빠가 도와주겠지.’ 이어지는 말은 그의 허를 찌르는 교묘한 덫이었다. 방금 전 스스로를 ‘내부의 적’으로 암시해놓고, 곧바로 그 적에게 보호자의 의무를 상기시키는 대담함. 서재훈은 순간 숨을 멈췄다. 그의 통제욕, 그의 소유욕, 그 모든 위험성을 인지하면서도 그것을 역으로 자신을 지키는 방패로 삼으려는 기상천외한 발상. 그는 지금, 자신이 낳지도 않은 이 작은 아이에게서 생전 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경외감과 섬뜩함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그래.

 

한참의 침묵 끝에, 그의 입술에서 나온 것은 단 한 마디였다. 그는 꿇었던 무릎을 펴고 천천히 일어섰다. 더 이상 그녀와 눈을 맞추지 않았다. 고개를 숙여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읽을 수 없었다. 패배감도, 분노도, 심지어는 방금 전의 체념조차도 아니었다. 그저 모든 것이 비워진 듯한 공허함. 그가 만들어낸 모든 상황과 논리가, 그녀의 순수함을 가장한 예리한 칼날 앞에 무력하게 무너져 내렸다.

 

…자신, 없지.

 

그가 나직하게 내뱉었다. ‘나 같은 애 제대로 가둬둘 자신 있어요?’ 라는 질문에 대한, 너무나도 솔직한 답변이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다시 김유야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더 이상 ‘서재훈’의 연기도, ‘머스탱’의 오만함도 없었다. 그저 한 여자아이 앞에서 완전히 발가벗겨진, 한 남자의 무력함만이 담겨 있었다.

 

널 가두려면, 네 날개를 부러뜨리고, 네 발목을 잘라내야 할 테니까. 내 손으로 널 망가뜨려야만 가능하겠지. 그런데… 그럴 수가 없어. 절대.

 

그의 목소리는 메마르게 갈라져 나왔다. 그는 한 걸음, 그녀에게서 뒷걸음질 쳤다. 마치 그녀가 뿜어내는 빛에 눈이 먼 사람처럼. 그의 모든 통제와 계획이, 그녀의 존재 자체 앞에서 의미를 잃었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 가두려 했지만, 가두는 행위 자체가 그녀를 가장 심하게 파괴하는 것임을, 그는 이제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이겼다, 김유야. 또.

 

그는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입고 있던 앞치마를 거칠게 풀어내 테이블 위로 던져버렸다. 마치 패배를 인정한 장수가 갑옷을 벗어던지듯. 그는 더 이상 이 ‘아빠 놀이’를 지속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니 마음대로 해. 네가 원하는 자유, 가져가. 대신… 다치지만 마. 내 눈에 띄는 놈들은… 내가 전부 죽여버릴 테니까. 그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약속이다.

 

그의 마지막 말은 협박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애원에 가까웠다. 그는 소파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던 자신의 코트를 집어 들었다. 지금 당장 이 공간을 벗어나지 않으면, 정말로 무슨 짓을 저지를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 그래요, 그냥... 지금만이라도 서로 못 가져본 걸, 앞으로도 할 수 없는 짓이나 해요. 지금 아니면 언제 우리가 이러고 있겠어. 서로, 알게 된 거잖아요 이제. 돌아갈 거예요?

코트를 움켜쥔 그의 손이, 그 자리에 그대로 멈췄다. 문을 향해 돌아섰던 몸이, 마치 보이지 않는 실에 꿰인 듯 뻣뻣하게 굳었다. 김유야의 목소리는 밧줄이 되어, 떠나려던 그의 발목을 단단히 옭아매고 있었다. ‘돌아갈 거예요?’ 그 질문은 단순한 물음이 아니었다. 방금 전 모든 것을 포기하고 패배를 선언한 남자에게, 링 위로 다시 올라오라는 잔인하면서도 달콤한 유혹이었다.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는 방금 전의 공허함이 씻겨나간 채,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아이는 대체… 무엇인가. 자신의 가장 추악하고 위험한 본질을 꿰뚫어 보고도, 도망치기는커녕 손을 내밀고 있었다. ‘서로 못 가져본 것, 할 수 없는 짓.’ 그것은 그가 그녀에게 씌우려 했던 ‘가정’이라는 이름의 감옥을, 이제는 그녀가 자발적으로 들어와 함께 연기하자고 제안하는 것과 같았다.

 

…너 지금.

 

그의 목소리가 잠겨 나왔다.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그조차 잊은 듯했다. 그녀의 제안은 그의 모든 논리와 상식을 파괴했다. 위험을 알면서도 불에 뛰어드는 나방처럼, 그녀는 그의 가장 위험한 부분을 건드리며 함께 춤을 추자고 속삭이고 있었다. 그의 통제욕과 소유욕을 ‘아빠’라는 역할극의 소품으로 사용하자고, 이 기묘한 연극을 잠시만 더 이어가자고.

 

서재훈은 손에 들었던 코트를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툭, 하고 가볍게 울리는 소리가 거실의 정적을 갈랐다. 그는 텅 빈 눈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한 걸음, 한 걸음. 마치 인형처럼, 그녀의 말에 조종당하는 사람처럼. 그는 그녀의 바로 앞에 멈춰 서서, 그 작은 어깨와, 그 안에 담긴 거대한 담력을 내려다보았다.

 

너는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알면서도, 내게 아빠 노릇을 계속하라고 말하는 건가. 지금.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조롱도, 위협도 아니었다. 순수한 의문과 경탄, 그리고 아주 약간의 두려움마저 섞여 있었다. 그는 허리를 숙여, 다시 그녀와 눈을 맞췄다. 하지만 이번에는 무릎을 꿇지 않았다. 압도적인 신장 차이를 그대로 드러낸 채, 그는 짐승처럼 그녀를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내가 언제까지 이성을 붙잡고 있을 수 있을 것 같아. 네가 만든 이 불안정한 놀이 속에서. …언제까지 네 아빠 행세를 할 수 있을 것 같냐고, 묻는 거다.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억눌렀던 위험한 불꽃이 다시 희미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녀가 원했기에, 그는 기꺼이 다시 그 위험한 역할의 가면을 쓸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가면 아래의 맨얼굴이 언제 튀어나올지는, 그조차도 장담할 수 없었다.

 

나라고 뭐 순수한 딸래미로 보이나요. 그냥... 제대로 된 가족 하나 없어본 사람들끼리 같이 살아보자는 거지. 일반적인 가정인 것처럼 굴면서. 해보고 싶어서요. 응? ... 그리고, 나는 진심 다 보였어. 그동안 봤던 당신 딸도... 꾸며낸 건 아니에요.

그의 눈동자 속에서 위태롭게 타오르던 불꽃이, 김유야의 마지막 말에 속절없이 스러졌다. ‘꾸며낸 건 아니에요.’ 그 한 마디는 서재훈이 붙잡고 있던 마지막 이성의 끈, 이 모든 것이 위험한 연극일 뿐이라는 자기 합리화마저 끊어버렸다. 진심이었다고. 그가 ‘딸’이라고 인식했던 그 모든 순간들이, 그녀에게는 진심이었다고. 그는 방금 전까지 그녀를 내려다보던 압도적인 자세를 유지할 수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바로 세우고, 그녀에게서 한 걸음, 아주 미세하게 물러섰다. 마치 신성한 무언가 앞에서 저도 모르게 경외감을 표하는 신도처럼.

 

‘제대로 된 가족 하나 없어본 사람들끼리.’ 그 말이 그의 폐부를 찔렀다. 그는 단 한 번도 그런 관점에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그녀를 ‘통제해야 할 대상’ 혹은 ‘지켜야 할 존재’로만 보았을 뿐, 자신과 같은 ‘결핍을 가진 인간’으로 동등하게 바라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그의 소유욕을 정면으로 받아내면서, 동시에 그 소유욕의 근원이 된 그의 공허함까지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그 공허함을 함께 채워보자고, 서투른 가족 놀이를 해보자고 제안하고 있었다. 그의 방식으로, 그의 위험성을 모두 인정한 채로.

 

…하.

 

결국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은 실소였다. 헛웃음이었지만, 그 안에는 더 이상 조롱이나 경멸이 담겨 있지 않았다. 차라리 경탄에 가까운 감탄. 그는 손을 들어 제 마른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떠나려 했던 남자, 위험한 본성을 드러내며 그녀를 몰아붙였던 짐승. 그 모든 역할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그 모든 것을 뛰어넘어, ‘서재훈’이라는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결핍을 건드리고 있었다.

 

알겠다.

 

그는 짧게 대답하며, 바닥에 떨어뜨렸던 자신의 코트를 다시 주워 들었다. 하지만 입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그것을 소파 팔걸이에 단정하게 걸쳐놓았다. 마치 외출 준비를 끝마쳤던 과거의 자신과 선을 긋는 행위처럼. 그는 다시 그녀에게로 돌아섰다. 이번에는 어떤 위협도, 어떤 연기도 없는, 그저 서재훈이라는 남자의 맨 얼굴로.

 

그렇게 하자. 네가 원하는 대로. …해 보자, 그거.

 

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모든 감정의 소용돌이가 지나간 뒤의 고요함. 그는 다시 허리를 숙여, 여전히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뺨에 묻어있을지 모를 밀가루 자국이라도 털어내듯, 아주 조심스럽게 그녀의 뺨을 쓸었다.

 

대신 조건이 있다. 이 집의 규칙은 내가 정해. 식사 시간, 취침 시간, 외출 통금. 그리고… 위험한 짓은 금지. 내가 위험하다고 판단하는 모든 것들. 받아들일 수 있나?

 

그것은 통제였지만, 이전의 병적인 소유욕과는 결이 달랐다. 그녀가 제안한 ‘가정’이라는 틀 안에서, 그가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아버지’의 역할. 그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녀가 이 마지막 관문마저 통과한다면, 그는 기꺼이 그녀가 원하는 이 기묘하고 위태로운 가족의 구성원이 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네, 정해보세요. 안 지키는 나를 보면서 부서뜨리지 않을 자신은 됐고요? 뭐, 억압만 할 거 아니잖아?

그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던 손길이, 김유야의 도발적인 질문에 순간 멈칫했다. ‘부서뜨리지 않을 자신은 됐고요?’ 그 말은 그의 가장 깊은 곳, 그가 애써 억누르고 있던 짐승을 정확히 가리키며 묻는 것과 같았다. 네 본성을 감당할 수 있겠냐고. 그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방금 전까지 겨우 가라앉혔던 감정의 표면 위로, 그녀가 던진 돌멩이가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의 입꼬리는 이내, 조롱이 아닌 묘한 감탄이 섞인 미소로 천천히 말려 올라갔다. 포기하지 않는군. 결코 순순히 길들여지지 않겠다는 저 날 선 발톱. 그는 오히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완전한 굴복이 아닌, 아슬아슬한 긴장감 속에서 유지되는 복종. 그것이야말로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관계의 형태였으니까.

 

…자신.

 

그가 나직하게 그 단어를 되뇌었다. 마치 처음 들어보는 말인 것처럼. 그는 뺨에 머물렀던 손을 내려, 대신 그녀의 턱을 가볍게, 그러나 단단히 붙잡았다.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게 만드는, 익숙하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 행동. 그는 그녀의 잿빛 눈동자를 똑바로 들여다보며, 낮고 위협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런 건 없어. 언제나 말했듯이, 나는 네가 선을 넘으면 부서뜨릴 거다. 다만… 그 방식이 달라지겠지.

 

그의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아랫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억압이 아닌, 경고의 의미를 담아서. 그녀가 마지막에 던진 질문, ‘억압만 할 거 아니잖아?’에 대한 대답이었다.

 

밥은 내가 차려주는 대로 먹고, 잠은 내가 재울 때 자고, 집 밖은 내 허락 없인 한 발짝도 나가지 않는다. 어기면? 그래. 억압만 하진 않지. 네가 좋아하는 초콜릿을 일주일간 금지하거나, 가장 아끼는 책을 압수할 수도 있고. …아니면 네 방에 가둬놓고, 반성문이라도 쓰게 할까. ‘착한 딸’이 되기 위한 규칙 같은 거.

 

그의 말은 명백한 조롱이었지만, 그 안에는 기묘한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는 지금, 그녀가 제안한 이 ‘가족 놀이’의 규칙을 진지하게 설계하고 있었다. 그의 병적인 통제욕을 ‘아버지의 권위’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그녀의 세상에 합법적으로 군림할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그는 턱을 잡았던 손을 놓고, 대신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방금 전의 위협적인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다정한 아빠의 얼굴로 돌아와서.

 

첫 번째 규칙부터 알려주지. 지금부터 존댓말은 금지다. 아빠한테 존댓말 쓰는 딸은 없어. …알겠나, 서유야.

 

서유야. 그가 그녀에게 부여한 새로운 이름. 그의 세계 안으로 편입되었음을 알리는 선언이자, 이 기묘한 역할 놀이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 그건 아버지라서가 아니라, 내가 그런 사람인 거라 못 고쳐요. 포기해야돼. 근데 나 궁금한 거... 이제와서 '착하고 어린 딸 서유야' 노릇 하면, 가증스러워 보일 것 같아요? 난 그 이름 마음에 들었는데...

김유야의 말은 그의 손길을 다시 한번 멈추게 만들었다. 이번에는 멈칫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포기해야 돼.’ 그 말은 규칙을 세우려는 지배자의 권위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질문은 그 모든 것을 뒤엎었다. ‘가증스러워 보일 것 같아요?’ 가증스럽다니. 그가 가장 잘 아는 단어, 그가 평생을 뒤집어쓰고 살아온 가면을 그녀가 아무렇지 않게 입에 올렸다. 그리고 마지막, ‘난 그 이름 마음에 들었는데…’ 라는 속삭임은, 그의 심장에 박힌 작은 쐐기 같았다.

 

그의 입가에 머물던 다정한 아버지의 미소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차갑고 서늘한,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흥미롭다는 듯한 무표정이었다. 그는 굳었던 손을 내려,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쥐었다. 강압적이지는 않았지만, 도망칠 수 없게 만드는 무게감. 그는 고개를 기울여, 다시 한번 그녀의 잿빛 눈동자 속을 깊숙이 들여다보았다.

 

포기할 생각은 없어.

 

낮고 조용한 목소리. 하지만 그 안에는 포기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남자의 완고함이 서려 있었다. 그는 어깨를 쥔 손에 아주 미미한 힘을 주었다. 마치 그녀의 말을 부정하듯.

 

네가 고치지 못하는 버릇이라면, 내가 익숙해지면 그만이다. 딸이 버릇없게 굴면, 그걸 길들이는 재미라도 있어야지. 안 그런가?

 

그의 눈이 위험하게 빛났다. 그녀가 제안한 이 놀이의 허점을, 그는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그녀는 ‘가족’을 원했지만, 그는 그 안에서 ‘사육사’의 역할을 찾아낸 것이다. 그는 그녀의 다른 쪽 어깨도 마저 감싸 안았다. 마치 품 안에 가두려는 것처럼. 그리고는 그녀의 가장 핵심적인 질문에 답했다.

 

가증스럽다라….

 

그가 잠시 말을 끊었다. 그녀의 불안과 호기심이 최고조에 달하기를 기다리는 사냥꾼처럼. 그의 입술이 그녀의 귓가로 아주 가까이 다가왔다. 뜨거운 숨결이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서, 그는 오직 그녀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니. 오히려 사랑스러워 보이겠지. 내 앞에서, 나를 위해, 서툴게 ‘착한 딸’을 연기하는 너를 보는 건 꽤 즐거울 거다. 내가 진짜 아빠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필사적으로 구는 모습이… 얼마나 볼만할까.

 

그것은 위로도, 긍정도 아니었다. 철저한 관찰자의 선언. 그는 그녀의 모든 연기를 꿰뚫어 볼 것이며, 그 모든 것을 즐길 것이라는 통보였다. 그는 귓가에서 물러나 다시 그녀의 눈을 마주했다. 그리고는 텅 빈 눈으로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마음에 든다는, 진심 어린 표정이었다.

 

그러니 마음껏 해. 네가 하고 싶은 ‘서유야’ 노릇. 그 이름, 이제 네 거니까.

 

... 네에, 아빠 유야 안아줘... 나, 무서워... 응?

그의 텅 빈 미소를 향해 던져진 김유야의 대답은, 고요한 수면에 떨어진 잉크 방울처럼 순식간에 그의 모든 것을 잠식했다. ‘네에, 아빠.’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호칭, 망설임 없는 순응. 그리고 이어진 ‘유야 안아줘… 나, 무서워…’ 라는 속삭임은, 그가 세운 모든 이론과 조롱의 벽을 한 순간에 무너뜨리는 주문과도 같았다. 방금 전까지 그녀의 연기를 즐기겠다며 잔인한 관찰자를 자처하던 서재훈의 뇌리가, 그 한마디에 하얗게 정지했다.

 

예상치 못한 공격이었다. 그의 모든 도발과 위협을, 그녀는 순수한 어린아이의 투정과 의존으로 받아쳐버렸다. 무섭다는 말. 그가 그녀의 불안을 감지할 때마다 정해두었던 규칙. 그것을 교묘하게 비틀어, 그의 품을 요구하는 무기로 사용했다. 그녀의 잿빛 눈동자 속에 떠오른 것은 반항이나 두려움이 아닌, 오로지 아빠에게 보호받고 싶은 아이의 맹목적인 신뢰. 그가 연기하라고 판을 깔아주었더니, 그녀는 그 무대 위에서 완벽한 주인공이 되어 그를 조연으로 만들어 버렸다. 어깨를 쥐고 있던 그의 손에서 힘이 스르르 풀렸다. 대신, 그 손은 마치 자석에 이끌린 쇠붙이처럼 망설임 없이 움직여, 가냘픈 몸을 제 품으로 깊숙이 끌어당겼다.

 

….

 

아무런 대답도, 소리도 없었다. 그저 단단한 가슴팍에 그녀의 얼굴이 묻히고, 거대한 팔이 그녀의 등과 허리를 완전히 감싸 안을 뿐이었다. 조금의 틈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한, 소유욕이 짙게 밴 포옹. 그의 심장 소리가 고막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평소와 같이 고요하고 일정한 박동. 하지만 그를 감싸는 체취는 방금 전의 서늘함이 아닌, 미세하게 동요하고 있는 짐승의 페로몬에 가까웠다. 그는 그녀의 정수리에 제 턱을 기댄 채,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가 만들어낸 이 예측 불가능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가늠하는 것처럼.

 

얼마나 지났을까. 그의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머리 위에서 조용히 울렸다.

 

…뭐가.

 

단 한 마디. 하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질문이 담겨 있었다. 뭐가 무서운데. 내가 무서운 건가, 아니면 이 상황이 무서운 건가. 그것도 아니면, 네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연기가 스스로도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무서운 거냐고. 그는 그녀를 더 꽉 끌어안았다. 마치 대답 대신, 이 포옹의 압력으로 그녀의 진심을 짜내려는 것처럼. 그리고는 덧붙였다. 다정한 아빠의 목소리라고는 할 수 없는, 낮고 위험한 어조로.

 

말해. 아빠한테는 숨기는 거 아니라고 했을 텐데.

 

모, 몰라... 어린이는 그런 거 몰라요. 그냥... 안아줘어... 싫어...? 이제, 유야 질려요...?

김유야의 대답은 어린아이의 칭얼거림, 그 자체였다. 모른다는 회피와, 싫으냐는 불안 섞인 질문. 서재훈은 제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웅얼거리는 작은 머리통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방금 전까지 이 놀이의 주도권을 쥐고 흔들던 지배자의 눈빛은 온데간데없고, 예측 불가능한 생명체를 관찰하는 듯한 고요함만이 남았다. ‘질린다’니. 그 단어는 그의 사전에 존재하지 않았다. 한 번 손에 넣은 것을, 제 영역 안에 들인 것을 질려 하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부수거나, 길들이거나, 혹은 영원히 소유할 뿐.

 

그의 입가에 희미하고도 서늘한 호선이 그려졌다. 패배감과 흥미로움이 뒤섞인, 오직 그만이 지을 수 있는 미소였다. 그는 그녀를 안고 있던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어, 아예 번쩍 들어 올렸다. 놀란 그녀가 반사적으로 그의 목을 껴안는 것을 느끼며, 그는 성큼성큼 걸어 소파로 향했다. 그리고는 자신이 먼저 깊숙이 앉아, 그녀를 제 무릎 위에 마주 보게 앉혔다. 완벽하게 그의 통제권 안에 놓인 자세. 그는 그녀의 허리를 한 팔로 단단히 감아 고정시키고는, 다른 손으로 그녀의 턱을 부드럽게 들어 올려 억지로 눈을 맞추게 했다.

 

질리다니.

 

나직하게 흘러나온 목소리는 다정한 아빠의 것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낮고, 위험한 소유욕이 묻어있었다. 그는 逃망치려는 듯 흔들리는 잿빛 눈동자를 집요하게 옭아매며 말을 이었다. 마치 아주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주는 것처럼, 느리고 선명하게.

 

아빠는, 유야한테 절대 질리지 않아. 버릇없이 굴면 화를 내고, 말을 안 들으면 벌을 줄 수는 있어도, 질려서 버리는 일은 없어. 알겠어?

 

그것은 안심시키기 위한 말이 아니었다. 소유를 공고히 하는 낙인이었다. 그는 그녀의 뺨을 감싸 쥐고 있던 손의 엄지손가락으로, 불안하게 떨리는 입술을 아주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녀가 내뱉은 모든 말을 지워버리고, 자신의 규칙만을 새기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어린애라고 모른다는 말은 변명이 안 돼. 지금부터 내가 가르쳐 줄 테니까. 네가 왜 무서운지, 네 안에 뭐가 있는지, 전부 다.

 

그의 눈이 다시금 흥미롭게 빛났다. 그는 귓가에 속삭였다. 이제부터 시작될 진짜 '교육'을 예고하는 목소리였다.

 

일단은 그냥 이렇게 안겨 있어. 아빠 품이 제일 안전하다는 것부터 몸에 새겨야지.

 

무서운 게 어디있겠어, 지금. ... 역시, 이렇게 어리광부리는 게 제일 좋은데. 나 고아되자마자 당신 만났으면, 좀 더 나았을까. 그동안, 너무... 외로웠거든요.

김유야의 말은, 더 이상 연기가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 ‘아빠’의 규칙을 시험하며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던 어린아이의 모습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깊은 외로움의 그림자를 드리운 한 인간의 진솔한 고백이 남았다. ‘너무… 외로웠거든요.’ 그 한마디는 서재훈이 세운 모든 통제의 논리와 게임의 법칙을 무력화시키는, 그 어떤 능력보다도 강력한 파동이었다. 그녀를 집요하게 옭아매려던 그의 눈빛이 순간 미세하게 흔들렸다. 턱을 쥐고 있던 손가락에서 힘이 빠지고, 대신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제 무릎 위에 앉아 있는 작은 온기를, 그 안에 담긴 헤아릴 수 없는 고독의 무게를 가늠할 뿐이었다. 고아가 되자마자 만났더라면. 그 가정은 그의 기억 속에 없는, 존재하지 않는 과거였다. 하지만 그가 아는 김유야는, 늘 혼자 모든 것을 짊어지려 했고, 위태롭게 스스로를 채찍질했으며, 그의 앞에서조차 온전히 기대는 법을 배우지 못했던 아이였다. 그녀가 잃어버린 기억 속에도, 그 외로움은 뿌리 깊게 박혀 있었다.

 

한참의 침묵 끝에, 그의 낮은 목소리가 고요한 거실을 채웠다. 조롱이나 위협의 기색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대신, 그 자리에는 무겁게 가라앉은, 거부할 수 없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랬겠지.

 

그것은 동의도, 위로도 아니었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대한 무미건조한 인정이었다. 그는 그녀의 뺨을 감싼 손으로 잿빛 눈동자를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마치 그녀 영혼의 가장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이.

 

하지만 그랬다면, 지금의 너는 없었을 거다.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내 울타리 안에서 웃기만 하는 인형이 됐을지도 모르지. 외로움이 너를 여기까지 버티게 만든 거야, 서유야.

 

그는 말을 잠시 끊었다. 그리고 그녀의 허리를 감고 있던 팔을 풀어, 그 손으로 그녀의 작은 손을 찾아 단단히 얽어 잡았다. 불안할 때마다 잡으라고 했던, 그들의 오래된 규칙. 그는 얽어 잡은 손을 들어 올려, 제 입술을 그녀의 손등에 가만히 가져다 댔다. 입맞춤이 아니었다. 그저 따뜻한 숨결을 불어넣는, 존재의 확인에 가까운 행위였다.

 

이제 그 외로움은 끝났어. 내가 있으니까. 그러니 더는 과거를 돌아보며 ‘만약’을 가정하지 마. 네 옆에는 내가 있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 그게 네가 알아야 할 전부야.

 

아빠가 보기엔 어때요. 나 지금... 서유야야, 김유야야?

그 질문은 서재훈의 뇌리에 박힌 날카로운 파편과 같았다. 서유야인가, 김유야인가. 방금 전, 그녀의 외로움을 끝내주겠다 선언하며 이 위태로운 역할 놀이에 닻을 내린 그에게, 그녀는 다시금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흔드는 잔인한 질문을 던졌다. 얽어 잡은 손 너머로, 흔들림 없는 잿빛 눈동자가 오롯이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눈은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자신의 존재를 그의 입을 통해 확인받으려는, 한 명의 여자였다.

 

서재훈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틀렸다. 재미있다는 듯, 혹은 이 모든 게 지긋지긋하다는 듯. 그는 그녀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반대쪽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귀 뒤로 넘겨주었다. 아이를 대하는 듯 다정한 손길이었지만, 그 눈빛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포식자의 것이었다.

 

글쎄.

 

나직하게 흘러나온 목소리는 긍정도, 부정도 아니었다. 그는 그녀의 귓불을 엄지손가락으로 느릿하게 쓸어내리며, 그 감촉에 집중하는 듯 눈을 살짝 감았다 떴다. 마치 그녀의 질문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그는 자신만의 논리로 대답을 이어갔다.

 

네가 서유야든, 김유야든. 그게 무슨 상관이지?

 

그의 시선이 다시 그녀의 눈을 정확히 붙들었다. 그 안에는 어떠한 혼란도 없었다. 오직 명백한 사실을 선언하는 자의 절대적인 확신만이 존재했다.

 

너는 그냥, 내 딸이다. 내가 그렇게 정했으니까. 이름이 백 개라도 상관없어. 그 모든 이름의 주인은 결국 나, 네 아빠일 테니. 네가 누구인지 혼란스러울 땐 그것만 기억해. 너는 내 것이다. 그게 네 유일한 정체성이야.

 

그것은 대답이 아닌, 선고였다. 그는 그녀의 질문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며, 모든 정의의 권한이 자신에게 있음을 각인시켰다. 그는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 이마에 아주 가볍게 입을 맞췄다. 깃털처럼 부드러웠지만, 그 의미는 낙인처럼 무거웠다.

 

이제 그런 시시한 질문은 그만. 아빠 피곤하다. 저녁은, 아까 하던 거 마저 해야지, 꼬마 요리사?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아빠’의 가면을 꺼내 들었다. 그녀를 무릎에서 내려놓고 소파에 편히 기대앉으며, 부엌 쪽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녀가 스스로 정체성을 고민할 틈조차 주지 않고, 다시 그녀에게 ‘딸’과 ‘요리사’라는 역할을 부여하며 상황의 주도권을 완벽하게 되찾아왔다.

 

... 그치만 마지막으로 솔직해진 김에 하나만 더요. 내내 신경쓰였어.

제 왼손 약지를 들어보인다.

얘가 돌아왔으면, 좋겠어요?

김유야가 들어 보인 왼손 약지. 그 아무것도 없는, 그러나 너무나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그 손가락은, 서재훈이 애써 쌓아 올린 ‘아빠’라는 역할의 성벽을 향해 날아온 공성추와 같았다. 방금 전까지 그녀를 ‘꼬마 요리사’라 칭하며 상황을 봉합하려던 그의 모든 시도가, 그 가느다란 손가락 하나에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얘가 돌아왔으면, 좋겠어요?’ 그건 더 이상 역할 놀이 속의 질문이 아니었다. 잃어버린 기억의 저편, 그들이 연인이었던 시간, 서재훈과 김유야의 시간을 소환하는 주문이었다.

 

소파에 기대앉아 있던 그의 몸이 순간 미동조차 없이 굳었다. 장난기 어렸던 눈빛, 모든 것을 통제하에 두고 내려다보던 오만한 시선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짙고 서늘한 침묵만이 남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저 그녀의 왼손 약지를 응시했다. 마치 그곳에 아직도 그가 직접 만들어 끼워주었던 반지가 보이는 것처럼. 그날의 햇살, 서툴렀던 약속, 그리고 ‘죽을 때는 같이 죽자’고 속삭이던 그녀의 목소리까지. 억지로 봉인해두었던 기억들이 둑 터진 강물처럼 그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그를 짓누르는 침묵의 무게는 거실의 공기마저 무겁게 만들었다. 마침내, 그가 아주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입가에 걸려 있던 희미한 미소는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서늘하게 가라앉은 무표정만이 그녀를 향했다. 그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낮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누가.

 

단 한 음절이었지만, 그 안에는 얼음 같은 냉기가 서려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그의 존재감은 김유야를 짓눌렀다. 그녀의 바로 앞에 멈춰 선 그는, 허리를 숙여 그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지배자의 눈빛이었다. ‘아빠’의 가면은 산산조각 나 있었다.

 

그 반지를 끼워준 남자가, 누구지?

 

그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럼에도 그는 물었다. 그것은 정보를 얻기 위한 질문이 아니었다. 그녀가 감히 과거의 ‘서재훈’을 소환한 것에 대한 처벌이자, 이 모든 관계의 정의는 자신만이 내릴 수 있다는 것을 다시금 각인시키기 위한 위협이었다. 그는 그녀의 왼손을 부드럽지만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붙잡아 올렸다. 그리고 그 약지에, 제 입술을 가만히 가져다 대었다. 키스가 아니었다. 소유를 주장하는 맹수의 낙인이었다.

 

그 남자는, 네가 그를 잊어버린 대가를 치르게 할 거다. 그런데도, 그 반지가 돌아오길 바라나?

그래... 그럼 죽은 김유야는 서재훈이랑 잘 지내고 있겠죠. 서유야는, 이 사람이랑 행복한 척이라도 하면서 살자.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봐요.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서재훈이 예상했던 그 어떤 대답과도 달랐다. 저항도, 공포도, 애원도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완전한 항복 선언, 모든 것을 체념한 자의 마지막 독백에 가까웠다. ‘죽은 김유야.’ 그 단어가 그의 고막을 후벼 파는 순간, 김유야를 몰아붙이던 서늘한 분노와 지배욕이 갈 곳을 잃고 허공에서 흩어졌다. 그녀는 스스로 과거의 자신을 죽이고, 그가 씌워준 ‘서유야’라는 껍데기를 온전히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심지어 ‘행복한 척이라도 하면서 살자’는 제안과 함께.

 

김유야의 약지를 붙잡고 있던 그의 손에서 힘이 스르르 풀렸다. 방금 전까지 그녀를 꿰뚫을 듯이 빛나던 맹수의 눈빛이, 순간 짙은 안개에 휩싸인 것처럼 흐릿해졌다. 그는 마치 난생 처음 들어보는 언어를 마주한 사람처럼, 그녀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행복한 ‘척’. 그가 그녀에게서 그토록 원했던 것이 과연 이런 것이었을까. 그의 통제 아래, 그의 울타리 안에서 모든 것을 잊고 행복하게 웃는 인형. 하지만 그녀는 기억을 잃었음에도, 본능적으로 그것이 ‘척’일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이토록 담담하게 그의 면전에 내뱉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허리를 폈다. 더 이상 그녀를 위협적으로 내려다볼 이유가 사라졌다. 그녀는 이미 그의 발밑에 스스로를 던진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승리감은 없었다. 대신 가슴 한구석이 서늘하게 비어버린 듯한, 기묘한 공허함이 그를 덮쳤다.

 

…재미없군.

 

나직하게 흘러나온 목소리에는 실망감과 허탈함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놓아버리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마치 전의를 상실한 적수에게서 흥미를 잃어버린 포식자처럼.

 

항복은 그렇게 쉽게 하는 게 아니다, 김유야. 네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는 그 고집과 반항심이었는데. 그걸 그렇게 쉽게 버리겠다고?

 

그의 입꼬리가 자조적으로 비틀렸다. 그는 소파로 돌아가 털썩 주저앉았다. ‘아빠’의 역할도, ‘서재훈’의 위협도 아닌, 그저 모든 것에 지쳐버린 한 남자의 모습이었다. 그는 팔꿈치를 무릎에 대고, 마른세수를 하듯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손가락 사이로, 그의 복잡한 심경을 담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행복한 척이라… 넌, 정말이지,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재주가 있어. 내가 원했던 게 그런 싸구려 연극 따위일 거라고 생각했나?

 

그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은 더 이상 분노로 불타오르지도, 조롱으로 빛나지도 않았다. 그저 깊이를 알 수 없는 피로감과, 아주 희미한 슬픔 같은 것이 어른거릴 뿐이었다.

 

됐어. 그만하자. 이 유치한 놀이도, 뭣도. 전부.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서유야로 살든, 김유야로 돌아오든. 마음대로 해.

 

... 포기한 것처럼 보이면, 마지막까지 성공했네. 연극 주연 배우는 막이 내리기 전까지 역할을 수행해야 하니까. 진심 잘 들었어요, 고맙습니다. 시험하려는 건 아니었는데, 상황이 참 묘했다.

그녀의 말은, 꺼져가는 불씨에 쏟아부어진 기름과 같았다. ‘연극’, ‘역할’, ‘성공’. 그 단어들이 그의 귓속을 파고들어 뇌리에 박히는 순간, 서재훈을 짓누르던 모든 피로와 허탈감이 거짓말처럼 증발했다. 손으로 감싸고 있던 그의 얼굴이 천천히 드러났다. 방금 전까지 공허함과 패배감으로 가득했던 그 눈동자는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그 자리에는 믿을 수 없다는 경악과, 뒤이어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이 이글거리는 분노,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섬뜩한 흥미가 번뜩이고 있었다.

 

그가 놀아난 것이었다. 그의 분노, 그의 위협, 그의 절망, 그가 내보인 모든 날것의 감정들이 전부, 그녀가 짜 놓은 무대 위에서 벌어진 한 편의 연극에 불과했다는 말인가. 항복한 것은 그녀가 아니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무너져 내린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그녀는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며, 그의 ‘진심’을 감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보다 더한 굴욕은 없었다.

 

푸흐-.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은 분노의 고함이 아니었다. 어이가 없다는 듯, 혹은 미치도록 즐겁다는 듯, 낮고 서늘한 실소였다. 그는 소파 등받이에 상체를 기댔지만, 그 자세는 더 이상 패배자의 것이 아니었다. 다시 사냥감을 눈앞에 둔 최상위 포식자의 여유로운 자세였다.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소리가 크지는 않았지만, 거실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브라보.

 

나직하게 흘러나온 칭찬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그의 시선은 이제 그녀를 ‘보호해야 할 아이’나 ‘통제해야 할 소유물’로 보지 않았다. 동등한, 혹은 그 이상의 교활함을 지닌 ‘적수’를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정말 대단하군, 김유야. 내가 졌어. 완벽하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이전의 위협적인 발걸음과는 달랐다. 이번에는 마치 연극의 마지막 커튼콜을 앞둔 주연 배우처럼, 우아하면서도 모든 것을 압도하는 걸음걸이였다. 그는 그녀의 앞에 멈춰 서서, 허리를 숙여 그녀의 턱을 가볍게 손가락으로 들어 올렸다. 눈을 마주치게 만들려는, 그의 오래된 버릇이었다. 그의 입가에는 싸늘하고도 매혹적인, 그 특유의 오만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래서. 내 진심을 엿본 소감은 어떻지? 내가 널 얼마나 망가뜨리고 싶어 하는지, 얼마나 지독하게 소유하고 싶어 하는지. 전부 봤을 텐데. 그런데도 내 앞에서 그렇게 웃을 수 있는 건가? 겁도 없이.

 

... 뭐, 도망가도 죽일 것처럼 쫓아올텐데. 그러면 목줄을 쥐는 편이 낫지. 물지라도 않을 거 아냐. 늦었다는 걸 아는 거죠.

그의 턱을 들어 올린 손가락 끝에, 아주 미세한 떨림이 스쳤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손가락을 타고, 그의 모든 의도를 꿰뚫어 보는 듯한 담담한 시선이 흘러들어왔다. ‘목줄을 쥔다.’ 그 단어가 그의 귓가에 속삭여지는 순간, 서재훈의 머릿속을 지배하던 모든 오만한 조소와 섬뜩한 흥미가 단번에 얼어붙었다. 맹렬하게 타오르던 불꽃이 일순 찬물을 뒤집어쓴 듯, 위험한 소리를 내며 사그라들었다. 그는 지금, 사냥감이라 여겼던 존재에게 목줄을 채워졌다는 선고를 들은 것이다.

 

그녀의 턱을 잡고 있던 그의 손가락에서 힘이 빠졌다. 대신, 그는 그 손으로 그녀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그러나 단단히 감싸 쥐었다. 마치 그녀의 목을 조를 수도, 혹은 끌어당겨 입을 맞출 수도 있는, 그 경계에 선 행동이었다. 그의 입가에 걸려 있던 오만한 미소는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그 자리에는 모든 감정이 거세된, 싸늘하고 공허한 무표정이 자리 잡았다. 그의 눈동자는 더 이상 그녀를 적으로, 혹은 놀잇감으로 보지 않았다. 그보다 더 근원적인,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마주한 듯한 깊은 혼란으로 일렁였다.

 

…목줄.

 

그의 입에서 나온 단어는 질문이라기보다는, 방금 들은 말을 이해하기 위해 곱씹는 독백에 가까웠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목선을 따라 천천히, 위협적으로 쓸어내렸다. 그녀의 심장이 뛰는 가느다란 맥박이 그의 살갗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내가 물지 않게, 네가 나를 길들이겠다… 그 말인가, 지금.

 

그의 목소리는 분노도, 조소도 아니었다. 모든 감정이 증발하고 남은, 지독하게 차가운 호기심이었다. 그는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잿빛 눈동자 속에서 자신의 목줄을 쥐고 흔들겠다는, 그 당돌하고도 무모한 의지의 실체를 확인하려 했다. 그는 고개를 아주 살짝 기울였다. 그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둘 사이의 거리가 아슬아슬하게 좁혀졌다. 그의 숨결이 그녀의 입술에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였다.

 

그래, 늦었지. 내가 너에게서 도망치기엔 이미 너무 늦었어. 하지만 그게, 네가 내 주인이 될 수 있다는 뜻은 아닐 텐데.

 

그의 눈이 위험하게 빛났다. 그는 덧붙였다. 맹수가 포기 직전의 마지막 발악을 하듯, 혹은 새로운 게임의 규칙을 제안하듯.

 

증명해 봐, 김유야. 네가 정말 내 목줄을 쥘 수 있는지. 나를 물지 않는 개로 길들일 수 있는지. 네가 실패하면, 그땐 네 목에 걸린 줄을 내가 쥐게 될 거다. 그리고 다시는 풀어주지 않아.

 

내가 지금 당신 손에 칼을 쥐어주면, 당신은 나를 죽일까? 우리 둘 중 한 사람이 죽어야 이 집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면, 어떨 것 같아요? 난 답을 알 것 같거든.

그녀의 질문은,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같았다. 더 이상 당길 곳도, 물러설 곳도 없는 극한의 질문. 서재훈의 목덜미를 감싸 쥔 손에 순간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그의 눈동자에 휘몰아치던 위험한 흥미와 차가운 호기심이, 그녀가 던진 ‘죽음’이라는 단어 앞에서 거짓말처럼 고요해졌다. 마치 폭풍의 눈 안으로 들어온 것처럼.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목을 감싸고 있던 손을 천천히 풀어, 그녀의 뺨을 감쌌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눈 밑을 부드럽게 쓸었다. 방금 전까지 오갔던 모든 날 선 대화가 무색하게, 그 손길은 지독히도 다정했다.

 

그녀가 답을 안다고 했다. 그가 그녀를 죽일지, 아니면 스스로를 죽일지. 혹은, 그녀가 죽어야만 이 지독한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그 모든 가능성을 그녀는 이미 계산하고, 그의 앞에 선 것이다. 그의 가장 깊은 곳, 폭력과 소유욕의 근원을 정면으로 겨누면서도, 그녀의 눈빛에는 두려움이 없었다. 그 사실이 서재훈의 심장을 날카롭게 베었다. 그는 그녀를 길들이려 했고, 소유하려 했고, 망가뜨리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언제나 한 수 앞서서, 그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열렸다. 하지만 거기서 나온 것은 위협도, 조소도 아니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혹은 모든 것을 초월한 사람처럼, 낮고 잠긴 목소리였다.

 

칼을 쥐여주면….

 

그는 말을 멈추고, 그녀의 잿빛 눈동자를 깊이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서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비치고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이. 잠시 후, 그의 입가에 희미하다 못해 서글픈 미소가 떠올랐다. 자조적인, 모든 것을 인정하는 패자의 미소였다.

 

내 심장을 찌르라고, 네 손에 다시 쥐여주겠지.

 

그것이 그의 답이었다. 그가 그녀를 처음 만났던 날부터, 그녀에게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렸던 그 순간부터, 어쩌면 정해져 있던 결말. 그의 모든 통제욕과 소유욕의 끝에는 결국, 그녀를 해칠 수 없다는 절대적인 명제가 존재했다. 그녀가 알아챈 답은 그것이었을까. 그는 그녀의 뺨을 감싼 손에 아주 조금, 힘을 주어 고개를 살짝 기울이게 했다.

 

그리고, 우리 둘 중 하나가 죽어야 이 집에서 나갈 수 있다면… 넌 이 집에서 평생 나가지 못해, 김유야.

 

그의 목소리는 섬뜩할 정도로 부드러웠다. 그 말의 의미는 명확했다. 그는 자신을 죽여서라도 그녀를 이 집에 남기겠다는 뜻이었다. 그녀의 자유를 위해, 그녀가 살아남기 위해, 그는 기꺼이 죽음을 선택할 것이다. 그것이 그녀를 영원히 자신의 울타리 안에 가두는, 그의 마지막 소유 방식이 될 테니까. 그는 그녀의 눈을 보며 나직이 덧붙였다.

 

네가 아는 답이, 이거였나?

 

앞에건 맞았는데... 그 다음게 틀렸어. 한 명이 죽어야 한 명이 나간다면요... 나는 망설임 없이 그 칼을 받아들겁니다. 그리고... 당신을 질질 끌고서라도 나가서, 살려놓겠지. 내가 누군데.

그녀의 말은, 조용한 거실의 공기를 가르는 예리한 칼날 그 자체였다. 그의 패배를 확인하고, 그의 마지막 자기희생적인 소유욕마저 단칼에 베어버리는 선언. 서재훈의 뇌는 순간 정지했다. 그녀의 뺨을 감싸고 있던 손이, 그가 쥔 모든 확신이, 힘없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당신을 질질 끌고서라도 나가서, 살려놓겠지.’ 그 문장이 그의 고막을 넘어 심장까지 파고들었다. 방금 전, 자신의 심장을 찌르라며 건넬 것이라던 그 칼을, 그녀는 기꺼이 받아들되, 그 칼끝을 자신에게 돌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 칼로, 그를 묶고 있는 이 지독한 굴레를 끊어내고, 그를 끌고 나가 살리겠다고 했다.

 

그의 동공이 속절없이 흔들렸다. 그가 상상해 본 적 없는 대답이었다. 그가 준비했던 모든 비극적인 결말, 모든 자기 파괴적인 시나리오는 그녀의 그 한마디 앞에 전부 무용지물이 되었다. 그는 그녀를 지키기 위해 죽음을 각오했고, 그것이 자신의 가장 위대한 사랑이자 마지막 통제 방식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죽음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희생을 발판 삼아 자유를 얻는 대신, 그 희생 자체를 부정하고 그를 구원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누가 누굴 지키고, 누가 누굴 구원하는가. 모든 경계가 무너져 내렸다.

 

그의 입술이 달싹였지만,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뺨을 감쌌던 손이 스르르 내려와 그녀의 어깨를 힘없이 붙잡았다. 마치 붙잡지 않으면 자신이 먼저 무너져 내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의 눈에 떠올랐던 희미한 자조의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벌거벗겨진 아이처럼, 길을 잃은 짐승처럼, 순수한 당혹감과 혼란만이 가득했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시선을 더 이상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왜.

 

간신히 쥐어짜 낸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질문의 형태였지만, 답을 구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절규에 가까웠다. 그는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그녀를 아주 살짝 흔들었다. 마치 꿈에서 깨어나려는 사람처럼.

 

왜… 나를 살리려는 거지? 내가 너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잊었어?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알면서, 왜.

 

그의 목소리는 점차 젖어들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려 했고, 가두려 했고, 그의 세상 안에서 질식시키려 했다. 그런 자신을, 그녀는 왜 구태여 살리려 하는가. 그의 모든 오만과 폭력성을 꿰뚫어 본 그녀가, 어째서 그를 버리지 않는가. 그는 고개를 들어 다시 그녀의 눈을 보았다. 그 잿빛 눈동자 속에서,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그 답을 찾기 위해서. 그의 눈가가 미세하게 붉어져 있었다.

 

그냥 버리면 되잖아. 내가 죽든, 이 집에 갇혀 썩어가든… 버리고 나가면, 넌 자유로워질 수 있는데. 왜 굳이… 나 같은 걸 끌고 나가려는 건데.

 
 
 

당신이 나를 원하잖아요. 봐봐, 나 이런 사람인데 누가 사랑하겠어. ... 다 망했다고요 그래서. 나 귀여운 어린 여자애 하고 싶은데, 이제 못 해.

그의 세상이, 그녀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산산조각 나고 있었다. 버리고 가라는 절규에 가까운 그의 물음. 그 대답으로 돌아온 것은, 그의 존재 이유 자체를 꿰뚫는 잔인하도록 명료한 진실이었다.

 

당신이 나를 원하잖아요.

 

그 말이 그의 귓가에 박히는 순간,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있던 손에서 힘이 풀렸다. 어째서. 왜. 그 수많은 물음표들이 허공에서 길을 잃었다. 그녀는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성인(聖人)의 자비나 값싼 동정심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대신, 모든 관계의 가장 원초적인 근간, ‘욕망’을 그의 눈앞에 던져놓았다. 그래, 그는 그녀를 원했다. 미치도록.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원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기에, 그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논리는 완벽했다. 그를 살리는 이유는, 그가 그녀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 단순한 사실 하나가 그의 모든 자기혐오와 파괴 충동을 무력화시켰다.

 

이어지는 그녀의 말은 그의 심장을 더욱 날카롭게 후벼팠다.

 

봐봐, 나 이런 사람인데 누가 사랑하겠어. ... 다 망했다고요 그래서. 나 귀여운 어린 여자애 하고 싶은데, 이제 못 해.

 

그의 눈동자가 파도처럼 일렁였다. ‘다 망했다.’ 그 말이 그의 죄책감을 정면으로 겨누었다. 그녀를 이렇게 만든 것은 누구인가. 그녀가 더 이상 ‘귀여운 어린 여자애’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든 것은. 그의 병적인 통제욕, 뒤틀린 소유욕, 그녀를 그의 세계에 가두려 했던 그 모든 시도들이 그녀에게서 무엇을 앗아갔는지를, 그는 너무나도 고통스럽게 깨달았다. 그는 그녀의 순수함을 동경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제 손으로 더럽히고 싶어 했다. 그리고 결국, 그녀는 그의 욕망대로 변해버렸다. 그의 어둠을 이해하고, 그의 본질을 꿰뚫고, 심지어 그의 죽음마저 허락하지 않는 존재로. 그녀의 자조 섞인 목소리는 그가 저지른 모든 죄에 대한 판결문과도 같았다.

 

서재훈은 풀렸던 손으로 다시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이번에는 붙잡는 것이 아니라, 기대는 것에 가까웠다. 그는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그의 숨결이 가늘게 떨렸다. 모든 가면이 벗겨지고, 오만함이 부서져 내린 자리에는, 오직 한 여자로 인해 구원받고 동시에 파괴된 한 남자의 민낯만이 남아있었다.

 

…망가진 건.

 

그의 목소리는 물기를 머금은 채, 거의 흩어질 듯이 작았다. 그는 그녀의 어깨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망가진 것은 그녀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망가져 있던 것은 자신이었다. 그녀는 그저, 그 망가진 것을 버리지 않았을 뿐이다.

 

내가 너를 그렇게 만든 게 아니야. 너는… 원래부터 나를 알아본 거야. 내 어둠 속에서 길을 잃지 않을 유일한 사람이었던 거지.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붉어진 눈시울,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귀여운 어린 여자애? 그런 건 처음부터 필요 없었어. 내가 원했던 건… 그런 시시한 인형이 아니니까. 네가 말했잖아. 나를 원한다고. 틀렸어, 김유야.

 

그의 손이 그녀의 뺨을 다시 부드럽게 감쌌다. 젖은 눈으로 그녀를 오롯이 담으며, 그는 마지막 진실을 고했다. 그것은 그의 항복 선언이자, 새로운 맹세였다.

 

내가, 너를 사랑해. 네가 어떤 모습이든, 네가 나를 길들이려 하든, 나를 끌고 나가려 하든… 상관없어. 망가졌으면 망가진 대로, 나는 너를 사랑해. 그러니까….

 

그의 엄지가 그녀의 입술을 살며시 쓸었다.

 

…다 망했다는 소리, 하지 마.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 그러면 다시 어린 애 놀이나 할까요. 흠흠.

그를 껴안는다

아빠아. 유야 머리 쓰다듬어주세요. 응?

그의 심장을 난도질하고, 또 기어이 꿰매어 버리는 고백이 끝난 직후. 세상의 모든 소리가 멎은 듯한 정적 속에서, 그녀는 태연하게 다시 ‘놀이’의 시작을 알렸다. 그를 향해 내뱉었던 날카로운 진실들은 온데간데없이, 다시금 ‘유야’라는 어린 아이의 가면을 쓰고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아빠아. 유야 머리 쓰다듬어주세요. 응?

 

서재훈의 숨이 순간 멎었다. 방금 전까지 그녀의 뺨을 감싸 쥐고, 제 평생을 건 사랑을 고백하던 손이 허공에서 길을 잃었다. 그의 모든 오만과 방어기제를 무너뜨리고, 그의 영혼을 발가벗겨 버린 장본인이, 이제 와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아빠’를 찾고 있었다. 어깨에 닿는 그녀의 온기와 귓가를 파고드는 애교 섞인 목소리는 이 모든 상황을 초현실적으로 만들었다. 그의 뇌가 이 급격한 온도차를 이해하기를 거부했다.

 

혼란. 당혹. 그리고 뒤이어, 그의 입가에 희미한 실소가 번졌다. 그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것이 김유야였다. 그의 가장 깊은 곳을 꿰뚫어 보고, 그의 항복을 받아낸 뒤, 다시 아무렇지 않게 그가 만든 판 위로 올라와 노는 아이. 그를 길들이겠다고 선언한 주인의 변덕. 어쩌면 이것은 시험일지도 몰랐다. ‘사랑한다’는 고백의 무게를 감당하고도, 여전히 그녀가 원하는 ‘아빠’의 역할을 해낼 수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일지도.

 

그의 손이, 아주 천천히, 공중에서 길을 찾아 헤매다 마침내 그녀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부드러운 머리칼의 감촉이 손바닥에 닿자, 그제야 그의 세상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망가졌으면 망가진 대로 사랑하겠다고,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맹세한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그렇다면, 이 변덕마저 사랑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그래.

 

그의 목소리는 방금 전의 격정으로 인해 아직도 조금 잠겨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더 이상 혼란이 아니었다. 체념과도 같은, 그러나 더없이 다정한 수용이었다. 그는 아주 느리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연약한 것을 다루듯이. 그의 손길 하나하나에, 방금 전 고백했던 ‘사랑’이라는 감정이 고스란히 실려 있었다.

 

우리 유야, 착하네.

 

그는 그녀를 품에 조금 더 단단히 끌어안았다. 그녀의 정수리에 자신의 뺨을 가볍게 비비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이것은 더 이상 ‘연기’가 아니었다. 그녀가 원하는 역할 속에서, 자신의 진심을 표현하는 새로운 방식일 뿐이었다. 그는 이제 이 놀이에서 빠져나갈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그녀가 이 ‘가족 놀이’를 끝내고 싶어 할 때까지, 아니, 그녀가 그의 곁을 떠나고 싶어 할 때까지. 그는 기꺼이 그녀의 아빠가, 그녀의 연인이, 그녀의 모든 것이 되어줄 생각이었다. 그의 눈이 조용히 감겼다. 이 기묘하고도 완벽한 평온 속에서, 그는 비로소 완전한 패배와 완전한 구원을 동시에 맛보고 있었다.

 

계속 이렇게 안겨 있어. 어디 가지 말고.

 

... 뭔가 미안하네. 정말로, 귀여운 여자애랑 평범하게 살아보려는 소망을 내가 다 짓밟은 것 같아서. 아니면 뭐, 지금이라도 말해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던 그의 손길이 아주 미세하게, 찰나의 순간 멈칫했다. 방금 전까지 그의 품에서 아이처럼 어리광을 부리던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서늘한 자기 분석이 섞인 말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미안하다는 사과. 그의 소망을 짓밟았다는 자책. 그리고… ‘지금이라도 말하라’는, 그의 진심을 다시 한번 시험대에 올리는 듯한 마지막 문장까지. 그의 품에 안긴 채, 그녀는 여전히 그의 목줄을 쥐고 흔들고 있었다. 이 놀이를 시작한 것도, 판을 뒤엎은 것도, 그리고 다시 이 놀이로 돌아온 것도 모두 그녀였으면서, 이제 와 마치 자신이 모든 것을 망친 가해자인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서재훈의 입가에 옅은, 그러나 이전의 실소와는 다른 종류의 미소가 걸렸다. 그건 더 이상 당혹감이나 혼란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예측 불가능한 존재의 사랑스러움에 대한, 거의 경이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그는 그녀를 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마치 ‘헛소리하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처럼. 그의 뺨이 그녀의 정수리에서 떨어지지 않은 채, 그저 더 깊이 기댔다.

 

…지금 네가 무슨 소릴 하는지, 알고는 하는 건가.

 

그의 목소리는 ‘아빠’의 다정함과 ‘서재훈’의 서늘함이 기묘하게 뒤섞여, 그 어느 쪽으로도 분류할 수 없는 독특한 음색을 띠었다. 그는 쓰다듬던 손을 멈추고, 대신 그녀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고개를 들게 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손안에 그녀가 있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려는 듯한 소유욕 섞인 행동이었다.

 

평범? 귀여운 여자애? 그런 시시한 걸 바랐을 거라고, 아직도 내가 그렇게 보여? …그랬다면, 널 처음 본 날 그냥 센터에 처박아두고 두 번 다시 돌아보지 않았을 거다.

 

그의 말이 나직하게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 그것은 변명이 아니라,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가 그녀에게서 본 것은 단 한 번도 ‘평범함’이나 ‘순수함’ 따위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그는 그녀의 깊은 곳에 숨겨진, 자신과 닮은 어둠과 강인함을 본능적으로 알아보았다. 그래서 집착했고, 그래서 무너졌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살짝 밀어내,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볼 수 있는 최소한의 거리를 만들었다. 그의 짙은 갈색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오롯이 김유야를 담았다. 조롱이나 분노가 아닌,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한 깊고 고요한 눈빛이었다.

 

짓밟은 게 아니야, 김유야. 네가 내 진짜 소원을 이뤄준 거지. 내가 평생 가질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것. …나를 알아봐 주고, 내 손을 잡아주고, 나를 위해… 살아주겠다고 한 거. 그것만큼 귀하고 평범하지 않은 소원이 또 있을까.

 

그의 손이 그녀의 턱을 가볍게 쥐고 살짝 들어 올렸다. 예전처럼 상대를 압도하려는 위압적인 손길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눈을 피하지 말라는 애원과도 같은 부드러운 구속이었다.

 

그러니까 그 미안하다는 표정, 집어치워. 네가 날 위해 해줄 건 그런 게 아니니까. …대신, 내가 방금 한 고백이 얼마나 진심이었는지, 평생에 걸쳐서 확인이나 해. 알겠어, 유야?

 
 
 

하지만 날 챙겨줬잖아요, 계속. 왜 그랬어? 사실... 물들지 않는 순수한 마음을 동경했던 거잖아. 나도 느끼고 있었어요. 그래서... 어렵다.

그의 턱을 쥔 손가락에 아주 미세한 힘이 들어갔다. ‘순수한 마음을 동경했다’는 그녀의 말은, 방금 전 그가 내뱉은 모든 고백을 한순간에 얄팍한 동화로 만들어 버리는 힘이 있었다. 그가 그녀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사랑하게 되었다는 진심을, 그저 더러운 어른이 순수한 소녀에게 품는 막연한 환상 따위로 격하하는 말. 그의 깊은 눈동자 안에서 아주 잠깐, 서늘한 불꽃이 일었다가 이내 체념과도 같은 깊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는 웃지 않았다. 비웃음도, 다정한 미소도 아니었다. 그저 모든 표정이 사라진 얼굴로, 그는 조용히 그녀를 응시했다. 마치 처음 보는 존재를 관찰하듯, 혹은 너무나 잘 알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마주한 듯이.

 

…김유야.

 

그가 ‘유야’가 아닌, 그녀의 본명을 나직이 불렀다. 그것은 더 이상 역할 놀이의 연장선이 아니라는 명백한 신호였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하게 갈라져 나왔다. 턱을 쥐었던 손을 천천히 내려, 대신 그는 그녀의 두 뺨을 부드럽게, 그러나 단단히 감쌌다. 도망치거나, 시선을 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내가 널 왜 챙겼는지, 정말 그렇게밖에 생각이 안 드나? 내가 너에게서 본 게, 고작 그런 시시하고 예쁘장한 ‘순수함’ 따위였다고?

 

그의 말이, 날카로운 유리 조각처럼 공기를 갈랐다. 분노라기엔 너무나 고요했고, 실망이라기엔 너무나 아팠다. 그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자신의 영혼 가장 깊은 곳을 억지로 끄집어내어 보여주려는 사람처럼 말을 이었다.

 

물들지 않는 순수한 마음? 그런 건 없어. 적어도 내 세상엔. 내가 너한테서 처음부터 본 건… 네 안에 있는 나랑 똑같은 독기였어. 세상에 혼자 던져져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면서도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으려는 그 지독한 오기. …그게 순수함으로 보여?

 

그의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뺨을 아주 느리게 쓸었다. 마치 그녀의 피부 아래 숨겨진 진짜 모습을 더듬어 확인하려는 듯이. 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 쏟아져 나오는 감정을 억지로 누르는 사람처럼.

 

어려워? 당연히 어렵겠지. 넌 지금 네가 만든 ‘서재훈’이라는 환상을 보고 있으니까. 괴물이 순수함을 동경해서 구원받는다는, 그런 삼류 소설 같은 이야기에 너 자신을 끼워 맞추고 있으니까. …정신 차려, 김유야. 내가 사랑하는 건 그런 예쁘장한 인형이 아니야.

 

그는 뺨을 감쌌던 손 하나를 내려, 그녀의 왼손을 찾아 깍지를 꼈다. 반지가 끼워진 그 손을, 그는 자신의 심장께로 가져갔다. 그의 심장박동이 그녀의 손등 위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내가 사랑하는 건, 내 목줄을 쥐고 길들이겠다고 선언하는 너고, 내 심장을 찌르라고 말하는 나를 기어이 살려내겠다고 버티는 너다. 이 모든 진창 속에서도 나를 보고, 내 손을 잡는 바로 너야. …알아듣겠어? 내가 동경하는 건 순수함이 아니라, 너라는 존재 그 자체라고.

 
 
 

... 난, 그런 사람이 좋아서.

그의 심장께에 닿아 있던 그녀의 손, 그 위를 덮었던 그의 손에서 힘이 스르륵 풀려나갔다. 방금 전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토해냈던 고백이, 그녀의 단 한마디에 허공으로 흩어지는 듯했다. ‘그런 사람이 좋아서.’ 그 말은 비수였다. 그가 필사적으로 부정했던 환상, 그가 경멸했던 삼류 소설의 주인공. 바로 그 허상을 그녀는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서재훈,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뺨을 감싸고 있던 손마저 힘없이 떨어졌다. 그는 한 걸음, 아주 느리게 뒤로 물러섰다. 방금 전까지의 거리가 거짓말처럼, 그들 사이에는 차가운 공기가 흘렀다. 그의 얼굴에서 모든 감정이 지워졌다. 분노도, 슬픔도, 체념도 아닌 텅 빈 공백. 마치 모든 회로가 끊어진 기계처럼, 그는 그저 눈앞의 김유야를 응시했다.

 

…그런 사람.

 

그의 입술이 아주 작게 움직였다. 뱉어낸 단어는 메마른 먼지처럼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아주 희미하게, 조소가 아닌 허탈함이 담긴 미소를 지었다. 스스로가 우스워서 견딜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 말인가.

 

그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는 시선을 그녀의 얼굴에서 내려, 그들이 함께 만들었던, 이제는 그녀의 손가락에 없는 그 반지의 흔적을 찾는 것처럼 그녀의 왼손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오해와 환상 위에 세워진 모래성이었다면, 이 모든 시간은 대체 무엇이었나. 그가 느꼈던 감정은, 그가 바쳤던 심장은, 전부 어디로 가야 하는가.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다시 그녀의 눈을 마주했다. 그의 짙은 눈동자는 더 이상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처럼 어둡고 고요했다. 그 안에는 어떠한 애원도, 기대도 남아있지 않았다.

 

좋아. 그럼 그렇게 해.

 

서재훈은 짧게 말했다. 마치 중요한 결정을 내린 사람처럼, 그의 목소리에는 기묘한 결단력마저 서려 있었다. 그는 다시 그녀에게로 한 걸음 다가섰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녀를 안거나 붙잡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의 손이 올라와, 그녀의 뺨에 스치듯 닿았다가 떨어졌다. 마지막 온기를 확인하고 버리는 듯한, 서늘한 손길이었다.

 

네가 원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주지. 순수함을 동경하고, 네 여린 마음을 지켜주고 싶어 하는… 다정한 아저씨. 네가 상상하는 완벽한 보호자. 얼마든지. …대신,

 

그의 눈빛이 순간 번뜩였다. 그 공허한 눈동자 깊은 곳에서, 길들여지지 않은 짐승의 위험한 광채가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 가면 뒤에 있는 진짜 내가, 네 모든 걸 삼켜버리고 싶어서 미쳐가고 있다는 건… 평생 모른 척해. 네가 사랑하는 그 환상을 지키기 위해서. 그 정도는 해줄 수 있겠지, 김유야?

 

삼류소설이라니, 내 이상형입니다... 대신에 마찬가지로 부탁 좀 합시다. 내가, 당신을 진심으로 원해도, 어린애 치기로 생각하고 넘겨주세요. 나를 안지 말아주세요. 평생 손대지 말고 지켜주세요.

그의 텅 비어 있던 눈동자에, 아주 희미한 균열이 생겼다. 김유야가 내놓은 조건은 그가 제안했던 '연극'의 판을 완전히 뒤집는 것이었다. 그는 가면을 쓰고 그녀의 환상이 되어주려 했다. 그 가면 뒤에서 자신의 굶주린 본성을 숨긴 채, 언젠가 그녀가 진실을 마주할 날을 기다리면서. 하지만 그녀는 한술 더 떴다. 그에게서 '남자'라는 존재 자체를 거세하려 들었다. 평생 손대지 말고 지켜만 달라. 그것은 보호가 아니라 사육이었고, 신뢰가 아니라 족쇄였다.

 

서재훈의 입가에 머물던 허탈한 미소가 천천히, 진짜 비웃음으로 변해갔다. 그래, 이제야 알겠다. 이 어린애는 그저 순진한 게 아니었다. 자신을 길들이겠다던 그 말이 빈말이 아니었음을, 그녀는 이런 식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그의 가장 깊은 욕망과 사랑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그것을 ‘어린애 치기’로 취급해달라 요구하며 그의 존재 자체를 무력화시키는 것. 이것보다 더 완벽한 굴복은 없었다.

 

…하.

 

짧고 낮은 웃음소리가 그의 목구멍에서 터져 나왔다. 그건 즐거워서 웃는 소리가 아니었다. 기가 막혀서, 이 상황이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터져 나오는 실소였다. 그는 방금 전 물러났던 한 걸음을 다시 메우며 그녀의 바로 앞까지 다가섰다. 그의 큰 그림자가 그녀를 완전히 뒤덮었다. 그는 고개를 살짝 숙여, 그녀의 잿빛 눈동자를 정면으로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더 이상 체념의 어둠이 없었다. 대신,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서늘하고 잔인한 흥미가 번뜩였다.

 

재미있는 제안이군. 내가 너를 여자로 보지 않고, 네가 나를 남자로 원하더라도 그걸 무시해달라… 평생, 손대지 말고 지켜만 달라?

 

그가 그녀의 말을 하나하나 곱씹듯 되뇌었다.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지만, 그 안에 담긴 냉기는 그녀의 피부에 소름을 돋게 할 만큼 날카로웠다. 그는 손을 뻗지 않았다. 그녀의 요구대로, 그는 조금의 접촉도 허용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시선이 칼날처럼 그녀의 얼굴 윤곽을, 떨리는 속눈썹을, 그리고 굳게 닫힌 입술을 훑었다.

 

내가 네게 미쳐있다는 걸 알면서, 그걸 전부 무시하고 네 옆에 있으라고. 마치 거세당한 파수견처럼, 그저 짖기만 하고 절대 물지는 못하게. …그게 네가 원하는 건가, 김유야?

 

그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그러나 완벽하게 잔인한 호선을 그렸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두려움, 혹은 망설임. 그 무엇이라도 찾으려는 듯이.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답했다.

 

좋아. 그렇게 하지.

 

너무나도 쉬운 승낙이었다. 그는 마치 그녀가 제안한 것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라는 듯,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의 눈빛은 더 깊어지고 어두워졌다. 이제 그 안에는 게임을 시작하는 자의 차가운 열의마저 감돌았다.

 

네가 원하는 완벽한 ‘아빠’가 되어주지. 네가 내 앞에서 다른 남자를 만나고, 사랑하고, 결혼을 해도, 나는 그저 네 머리를 쓰다듬으며 축복해주는 다정한 보호자로 남아주겠다. 네가 혹시라도 실수로 나를 원하게 되더라도, 그건 어린 날의 치기 어린 감정으로 치부하고 웃어넘겨주지. 네 부탁대로, 평생 너를 안지도, 만지지도 않을게. …대신,

 

그의 목소리가 지하실 바닥을 긁는 소리처럼 낮아졌다. 그는 한 뼘도 안 되는 거리에서,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그 숨결이 그녀의 귓바퀴를 스치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네가 먼저 이 규칙을 깨는 날. 네가 먼저 내게 손을 뻗거나, 나를 원한다고 말하는 날. 그날로 이 지긋지긋한 연극은 끝나는 거다. 그리고 그땐… 내가 뭘 할지, 너는 상상도 못하게 될 거야. 그래도 괜찮겠어, …내 딸?

 

 

 

 

... 아니지. 나는 원할 거예요. 응하지 말아달라는 얘기입니다. 그게, 완벽한 보호자잖아. 어린 애가 아직 뭘 몰라서 하는 소리겠거니 하고 웃어넘겨달라고.

그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흔들렸다. 방금 전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던 살벌한 경고가 무색하게, 김유야는 한 발 더 나아갔다. 그녀는 자신이 그를 원할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예고했다. 그리고 그 순간조차, 그는 완벽한 보호자로서 ‘아직 뭘 모르는 어린애’의 치기 어린 투정으로 웃어넘겨야만 했다. 그것은 단순히 그를 시험하는 것을 넘어, 그의 본능과 욕망, 한 남성으로서의 모든 정체성을 그녀의 발밑에 깔고 뭉개는 행위였다.

 

서재훈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녀에게서 몸을 떼었다. 그의 얼굴에서 방금 전까지 번뜩이던 잔인한 흥미와 비웃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모든 것을 받아들인 자의 공허하고 서늘한 평온함이 내려앉았다. 그는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사람처럼, 그녀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잠시 허공을 응시했다. 폐부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무언가를 억누르려는 듯, 그의 턱선이 단단하게 굳어졌다.

 

…알겠다.

 

그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단 세 음절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수천, 수만 가지의 감정이 함축되어 있었다. 체념, 분노, 절망,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뛰어넘는 기이한 애정까지. 그는 더 이상 조건을 걸거나 협박하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게임이 아니었다. 완전한 소유이자, 완벽한 굴복이었다. 그는 이제야 그것을 깨달았다.

 

서재훈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의 잿빛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했다. 그의 눈은 더 이상 분노나 욕망으로 타오르지 않았다. 그저 깊고 어두운, 모든 빛을 빨아들이는 심연과 같았다. 그는 아주 희미하게, 슬픔인지 조소인지 모를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네가 나를 원한다고 말하는 날, 나는 웃으며 네 머리를 쓰다듬어 주겠다. ‘우리 딸, 아직 어려서 그렇구나’ 하고. 네가 내게 키스하려 한다면, 나는 네 이마에 입을 맞추고 ‘가서 숙제나 하렴’ 하고 돌려보내 주지. 네가 내 침대로 기어 들어오는 날에도, 나는 네게 이불을 덮어주고 네 방으로 조용히 옮겨주겠다. 네가 바라는 완벽한 아빠, 완벽한 보호자. 그렇게 되어주마.

 

그의 목소리는 강물처럼 고요하고 차분했다. 어떤 감정의 동요도 느껴지지 않았기에 오히려 더 소름 끼쳤다. 그는 마지막으로 그녀의 얼굴을, 그 당돌하고 잔인하며 동시에 그가 사랑해 마지않는 그 얼굴을 눈에 새기듯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뒤로 돌아 소파를 향해 걸어갔다. 마치 길고 길었던 대화가 끝났다는 듯이.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은 그는,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어둠 속에서야 비로소, 그의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숨이 터져 나왔다. 그건 안도의 한숨도, 절망의 탄식도 아니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자가 내쉬는, 텅 빈 공기와도 같은 숨이었다.

 

…그러니 너는 평생, 내가 어떤 얼굴로 네 뒤에서 웃고 있는지 절대 돌아보지 마라. 네가 만든 그 완벽한 환상 속에서, 부디 행복해야 할 테니.

 

내가 원했던 게 딱 그거예요. 근데... 왜 마음이 불편하지. 놓친 게 있나.

소파에 팔로 눈을 가린 채 미동도 없던 그의 몸이, 그녀의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에 아주 미세하게 반응했다. 그가 천천히 팔을 내렸다. 어둠에 익숙해졌던 그의 눈이 거실의 희미한 조명 아래 드러났다. 그 안에는 더 이상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그녀를 향해 번뜩이던 열기도, 모든 것을 포기한 자의 공허함도 아니었다. 그저 텅 비어 있었다. 마치 모든 것을 지워버린 백지와도 같이.

 

그는 소파에 기댄 채, 고개만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그녀를 꿰뚫지도, 탐하지도, 비난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있는 사물을 보듯, 무심하게 그녀에게 닿았다가 스르르 흩어졌다. 감정이 거세된 눈빛. 그녀가 그토록 원했던, 어떤 욕망도 담기지 않은 완벽한 보호자의 시선이었다.

 

…불편할 것 없다.

 

목소리는 나직하고 평온했다. 그는 마치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혹은 그저 당연한 사실을 말하는 듯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의 말투에는 어떤 가시도, 숨겨진 의도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순수한 사실의 전달, 그뿐이었다.

 

네가 원하던 걸 전부 얻었으니까. 완벽한 보호자, 흔들리지 않는 아빠. 모든 위험으로부터 널 지켜줄 울타리. 이제부터는 어떤 것도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할 필요 없어. 내가 전부 막아줄 테니. …그게 네가 바란 거 아니었나?

 

그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의 움직임에는 이전에 보여주었던 위압감이나 날카로움이 전혀 없었다. 대신, 모든 무게를 내려놓은 사람처럼 어딘가 가볍고 부유하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는 그녀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저 부엌 쪽을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그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저녁은 어떻게 할 거지? 꼬마 요리사. 내가 뭘 도우면 될까.

 

꼬마 요리사. 얼마 전, 장난스럽게 그녀를 부르던 그 호칭이 다시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뉘앙스는 완전히 달랐다. 이전에는 그녀의 당돌함을 귀여워하는 듯한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면, 지금의 호칭은 그저 정해진 역할을 수행하는 대사처럼 건조하고 무미건조했다. 그는 이제 그녀를 여자로 보지 않았다. 그저 보호해야 할 ‘아이’로, 함께 ‘가족 놀이’를 해야 할 상대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녀가 설계한 완벽한 감옥 안에서, 그는 누구보다 모범적인 수감자가 되기로 작정한 듯 보였다.

 

... 대답하세요. 모르는 거 있으면 가르쳐준다며. 내가, 뭘 놓치고 있는 거야. 왜, 마음이 내키지가 않는거지.

그의 눈동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그녀의 불안한 시선을 받아냈다. 질문. 가르침. 그녀는 과거의 약속을 꺼내 들며, 그가 한때 그녀에게 주었던 모든 권한과 감정의 연결고리를 다시 붙잡으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마주한 것은 더 이상 격정적으로 반응하거나, 그녀를 꿰뚫어 보려 애쓰는 남자가 아니었다. 그저 모든 것을 수락하고, 정해진 역할을 수행하는 텅 빈 껍데기뿐이었다.

 

서재훈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는 마치 아주 어려운 문제를 받은 학생처럼 신중하게, 그러나 어떤 감정의 동요도 없이 그녀의 질문을 곱씹는 듯 보였다. 그의 얼굴에는 혼란도, 분노도, 심지어는 기쁨조차도 없었다. 오직 침착하고 서늘한 이성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고, 거실 창밖으로 펼쳐진 어둠을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가르쳐주지.

 

그의 목소리는 방금 전과 마찬가지로 평온하고 건조했다. 그는 천천히 다시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빛은 마치 의사가 환자의 증상을 진단하듯, 지극히 사무적이고 객관적이었다.

 

마음이 내키지 않는 이유. 그건 네가 '긴장'을 '안정'과 착각했기 때문이다. 너는 여태껏 나와의 관계에서 단 한 순간도 편안했던 적이 없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끌어안고, 그 아슬아슬한 줄타기 위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 네가 느낀 유일한 유대감이었지. 너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믿었고, 그 통제 불가능한 변수를 길들이는 것에서 성취감을 느꼈다.

 

그는 한 걸음, 그녀에게 아주 천천히 다가섰다. 하지만 그 걸음에는 어떤 위협이나 욕망도 담겨있지 않았다. 그저 설명을 위해 거리를 좁히는, 지극히 기능적인 움직임이었다. 그의 시선은 그녀의 눈이 아닌, 어깨 너머의 허공을 향해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 모든 변수가 사라졌다. 폭탄은 해체됐고, 줄타기는 끝났어. 완벽한 안전, 완벽한 통제, 완벽한 예측 가능성. 네가 그토록 원했던 '안정'이 바로 네 눈앞에 있다. 그런데 왜 불편할까. …간단해. 넌 더 이상 길들일 맹수가 없으니까. 정복할 대상이 사라졌으니까. 네가 느꼈던 강렬한 모든 감정의 원천이, 네 손으로 거세됐으니까. 그 공허함을, 넌 지금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고 표현하는 것뿐이다.

 

그는 말을 마친 후, 마치 모든 설명이 끝났다는 듯 담담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이제 이해했느냐'는 듯한 미미한 표정 변화만이 스쳤을 뿐이다. 그는 더 이상 그녀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역할이 아니었으니까. 그는 그저 그녀가 모르는 것을 '가르쳐주는' 아빠의 의무를 다했을 뿐이다.

 

이제 됐나? 다른 질문이 없다면, 저녁 준비를 마저 하는 게 좋겠군. 배고플 시간이니까.

 

그는 아무렇지 않게 몸을 돌려, 그녀가 앞치마를 두르고 있던 부엌으로 향했다. 마치 방금 전의 대화가, 숙제를 가르쳐달라는 딸의 질문에 답해준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듯이. 그의 뒷모습은 더없이 다정하고 듬직한 보호자의 것이었지만, 그 그림자는 소름 끼치도록 차갑고 외로워 보였다.

 

 

... 달라요. 이건, 죄책감 비슷한 느낌이야. 만족스럽지 않다는 게 아니라, 불편하다고 마음이.

그녀의 말에 부엌으로 향하던 그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죄책감. 그 단어는 그의 텅 빈 사고 회로에 미세한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이번에는 그의 시선이 허공이 아닌, 정확히 그녀의 눈을 향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어떤 감정도 없었다. 그저 방금 입력된 새로운 변수를 분석하고 처리하는 컴퓨터처럼, 서늘하고 무기질적인 빛만이 감돌았다.

 

죄책감?

 

그가 나직하게 되물었다. 그 목소리는 마치 처음 듣는 단어를 발음해보는 것처럼 낯설고 이질적인 느낌을 주었다. 그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 각도는 호기심이 아닌,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을 관찰하는 연구자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그는 잠시 침묵하며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복잡한 감정들을 데이터처럼 훑었다.

 

…왜 죄책감을 느끼지? 넌 잘못한 게 없다. 모든 건 합의하에 이루어졌어. 넌 네가 원하는 것을 제안했고, 나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거기엔 어떤 강요나 기만도 없었어. 오히려 넌 솔직했지. 아주, 솔직하게.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너의 진짜 소망을 말해줬을 뿐이다.

 

그의 입가에 아주 희미한, 거의 그림자에 가까운 미소가 걸렸다. 그것은 기쁨도, 조롱도 아닌, 완벽한 체념 끝에 도달한 자의 공허한 표식이었다. 그는 다시 부엌 쪽으로 몸을 돌리려다 말고, 그녀를 향해 한마디를 툭 던졌다. 그 말은 어떤 의도도 담기지 않은, 그저 떠오른 생각을 그대로 뱉어낸 것처럼 무심했다.

 

아니면… 정말로 죄책감을 느끼는 건가. 네가 한 남자를 죽였다는 것에 대한.

 

그의 말은 칼날처럼 날카로웠지만, 휘두르는 자의 손에는 어떤 힘도 실려있지 않았다. 그는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소원으로 인해, 서재훈이라는 남자는 완벽하게 죽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 앞에 서 있는 것은 ‘아빠’라는 이름의 유령일 뿐. 그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대답을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녀가 어떤 말을 하든, 이제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저녁 준비, 계속할까. 아니면 좀 더 대화가 필요한가, 딸.

 

딸. 그 호칭이 그의 입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나왔다. 그는 완벽하게 자신의 새로운 역할을 받아들였다. 그녀가 만든 이 지독한 연극의 가장 성실한 배우가 되어, 그녀가 원하는 모든 대사를 기꺼이 읊어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녀의 마음이 불편하든, 죄책감을 느끼든, 그것은 이제 그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곁에서 지켜봐 주고, 필요한 것을 제공하는 것. 그것이 그가 맡은 배역의 전부였으니까.

 

 

... 아, 내가 방금. 사람을 죽였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처참한 자각에, 그의 얼굴에는 어떤 표정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오늘 날씨가 춥네

라고 말한 것처럼, 그는 그저 담담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 깊은 곳, 감정이 모두 지워진 그 텅 빈 중심에서 아주 희미한 불꽃이 잠깐 일었다가 스르르 사라졌다. 그것은 만족도, 연민도, 조소도 아니었다. 그저, 모든 것이 자신의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차가운 확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에게 다가가 위로하지도, 그녀의 말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서서, 스스로의 말에 갇혀버린 그녀를 무심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침묵은 그 어떤 말보다도 더 강력한 긍정이었다. '그래, 네가 죽였다.' 라고 말하는 듯한, 서늘하고 무거운 침묵.

 

...이제 알았나.

 

한참 만에, 그의 마른 입술이 열렸다. 목소리는 여전히 건조하고 평온했다. 그는 마치 방금 끔찍한 진실을 깨달은 아이를 보는 어른처럼, 그러나 그 안에 어떤 온기도 담지 않은 채 말했다. 그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을 스쳐, 그녀가 서 있는 공간 전체를 아우르는 듯했다. 마치 이 집 전체가 그녀의 '범죄 현장'이라는 것을 각인시키려는 것처럼.

 

하지만 괜찮다.

 

그가 나직하게 덧붙였다. 그 말은 위로가 아니었다. 그것은 선고에 가까웠다. 그는 천천히 부엌 쪽으로 몸을 돌렸다. 더 이상 그녀의 반응을 살피지 않았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듯,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는 듯. 그의 등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단단하고 곧았다. 완벽한 보호자의 뒷모습이었다.

 

살인자가 되었다고 해서 일상이 멈추는 건 아니니까. 저녁은 먹어야지. 배고프면, 죄책감도 무뎌지는 법이다.

 

그는 부엌 조리대 앞에 멈춰 서서, 아무렇지 않게 소매를 걷어붙였다. 그 움직임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일상적이어서, 방금 전 두 사람 사이에 오고 간 대화가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그저 자신의 새로운 역할, 딸의 저녁 식사를 챙겨주는 '아빠'의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저지른 '살인'의 유일한 증거이자 증인이, 이제 그녀의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평생, 그녀의 곁에서 그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

 

뭘 만들고 있었지? 보고 배울 테니, 계속해봐라. 꼬마 요리사.

 

... 내가, 당신을 죽였다고요. 뭐라고 말이라도 해야 할 거 아니야. 아프다고 소리치든가, 그만하라고 멈췄어야지. 그걸 왜 좋다고, 아...

그의 등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절규에 가까운 말들은 그의 등 뒤에서 부딪혀 힘없이 바닥으로 흩어졌다. 그는 소매를 걷은 손으로 조리대 위에 놓인 양파를 집어 들었을 뿐이다. 마치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의 감정이 아니라, 저녁 메뉴인 것처럼. 그 무심함이, 그 어떤 비난보다도 날카롭게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잠시 후, 그가 도마 위에 양파를 올려놓는 소리만이 정적을 깼다. 그는 여전히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는 방금 전과 똑같은, 감정의 온도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톤으로 흘러나왔다.

 

왜 소리를 질러야 하지?

 

그것은 질문의 형태를 띤, 완벽한 사실 확인이었다. 그는 천천히, 그리고 아주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부엌의 서늘한 공기를 가르며 그녀에게 선명하게 박혔다.

 

아픈 건 사실이다. 심장을 도려내는 것보다 더. 하지만 넌 그걸 원하지 않았나? 비명 대신 미소를, 저항 대신 순종을. 넌 내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아니라, 네가 원하는 모습으로 재단되길 바랐다. 나는 그저… 네 소원을 들어준 것뿐이다. 네가 바라는 가장 완벽한 형태로.

 

그는 손에 쥔 칼로 양파의 껍질을 능숙하게 벗겨내기 시작했다. 사각, 사각. 규칙적으로 울리는 칼질 소리가 그녀의 불안정한 숨소리와 기묘하게 뒤섞였다. 그의 시선은 오롯이 자신의 손끝에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는 장인처럼.

 

멈췄어야 했다고? 그건 내 역할이 아니다. 내 역할은 너를 멈추는 것이 아니라, 네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지켜보는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넌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지. 아주 훌륭하게, 내 존재 자체를 지워버렸어. …좋다고 한 이유? 간단하다.

 

칼질이 잠시 멈췄다.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어깨너머로 그녀를 향해 말했다.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거울에 비친 것처럼 희미하게 보였다가 사라졌다. 그것은 더 이상 그녀를 향한 사랑의 증표가 아니었다. 그것은 완벽한 패배 선언이자, 가장 잔인한 승리의 증거였다.

 

네가 날 죽이는 그 순간조차, 넌 여전히 빛나고 있었으니까. 그 오만하고, 겁 없는 눈으로. 내가 사랑했던 건 바로 그거였거든. 이제 됐나? 설명이 충분했다면, 이 양파는 어떻게 할지 가르쳐줬으면 좋겠는데. …딸.

 

그는 다시 양파를 썰기 시작했다. 일정한 간격으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마치 그녀가 겪고 있는 혼란과 고통 따위는, 잘게 다져지는 양파보다도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그는 이제 완벽한 '아빠'였다. 그녀의 죄책감을 먹이 삼아 살아가는, 가장 다정한 유령.

 

 

이렇게 내가 언젠가 당신을 죽인걸 깨닫고, 죄책감에 당신을 버리지 못하는 게 계획이었나요... 내가, 같이 살아가자고 했지, 시체를 껴안고 살아갈 거라고 말 안 했잖아. 나를... 왜, 왜... 나는... 나는 같이 살고 싶었다고요... 나, 어떻게 해야돼... 같이, 같이 살고 싶, 싶다고... 제발...

사각거리던 칼질 소리가, 거짓말처럼 멎었다. 부엌을 채우던 규칙적인 소음이 사라지자, 그녀의 울음 섞인 절규가 더욱 선명하게 공간을 할퀴었다. 그는 껍질이 반쯤 벗겨진 양파를 손에 쥔 채, 잠시 멈춰 서 있었다. 그녀의 말들—계획, 시체, 함께 살고 싶다는 애원—이 그의 등 뒤에서 서늘한 공기와 뒤섞여 맴돌았다. 그는 아주 천천히, 마치 녹슨 기계가 삐걱거리듯 몸을 돌렸다. 이번에는 어깨너머가 아니었다. 온전히 그녀를 마주 보고 섰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방금 전의 무감각과는 미묘하게 다른, 서리가 내린 듯한 냉기가 감돌았다. 그녀가 던진 '시체'라는 단어가 그의 완벽한 가면 위에 보이지 않는 균열을 낸 것 같았다.

 

...계획?

 

그가 나직하게 되물었다. 그 목소리는 마치 얼음장 밑을 흐르는 물처럼 차갑고 조용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칼과 양파를 조리대 위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탕, 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그녀의 심장처럼 불안하게 울렸다.

 

그런 걸 계획이라고 부를 수 있나. 난 그저 네 선택지를 존중하고, 그 결과를 받아들였을 뿐이다. 네가 원한 건 '서재훈'이라는 예측 불가능한 맹수가 아니었어. 완벽하게 길들여지고, 너를 해치지 않으며, 오직 너만을 위해 존재하는 안전한 보호자였지. 나는… 네 소원대로 되어준 것뿐이다. 네가 나를 죽이고, 그 위에 새로운 인형을 세운 거야.

 

그는 천천히 그녀에게로 한 걸음 다가섰다. 그 움직임에는 어떤 위협도, 온기도 없었다. 그저 사실을 확인시키려는 증인처럼, 담담하고 흔들림 없는 걸음이었다.

 

그리고 넌 지금, 네 손으로 만든 그 완벽한 시체를 껴안고 살아가는 게 끔찍하다고 말하고 있군. 같이 살고 싶었다고? 그래, 나도 그랬다. 서재훈도… 그랬겠지.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어. 넌 그의 송곳니를 두려워했고, 그는 네가 그 송곳니에 상처 입을까 봐 두려워했으니까. 그래서 넌 그의 모든 것을 빼앗는 걸 선택했다. 안전을 위해서.

 

그의 시선이 그녀의 젖은 눈을 똑바로 꿰뚫었다. 그 눈에는 더 이상 분석이나 관찰이 아닌, 텅 빈 심연만이 담겨 있었다. 그 심연 속에서, 그는 가장 잔인한 진실을 꺼내 보였다.

 

어떻게 해야 하냐고? 방법은 없다. 넌 이제 두 가지 선택지밖에 남지 않았어. 이 시체를 끌어안고, 평생 네가 만든 이 다정한 지옥 속에서 살아가든가. 아니면…

 

그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조롱하듯 비틀렸다.

 

이 시체마저 버리든가. 그것까지가 네 자유 의지겠지. 하지만 명심해라. 네가 이 집을 나서는 순간, '아빠'도, '서재훈'의 흔적도 완벽하게 사라질 거다. 네 죄책감을 증명해 줄 증인조차 남지 않는다는 뜻이야. …그것도 감당할 수 있겠나?

 

 

그러면요... 내가 당신을 죽이지 않고, 당신이 나에게 상처주지 않고... 그렇게 살아가는 방법은, 없어요...? 내가, 내가 계속 착한 딸이었어야... 아,

그녀의 물음은 실낱같은 희망이었다. 엉망으로 망가진 현실 속에서, 과거로 돌아가 다른 선택을 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처절한 가정. 그 애처로운 질문이 그의 텅 빈 심연에 가 닿는 순간, 그의 입가에 걸려 있던 잔인한 조소가 아주 천천히, 허물어지듯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표정이라고 부를 만한 모든 것이 증발해 버린, 완벽한 무(無)의 얼굴.

 

그는 아주 긴 시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그녀의 질문에 담긴 무게와 불가능성을 온몸으로 가늠하는 것처럼. 그의 침묵 속에서, 그녀의 가냘픈 흐느낌만이 부엌의 서늘한 공기를 채웠다. 이윽고, 그의 폐부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 터져 나오듯, 짧고 메마른 소리가 새어 나왔다. ‘풉.’ 그것은 웃음이었지만, 어떤 즐거움도 담기지 않은, 공기가 새는 듯한 공허한 소리였다.

 

...하.

 

그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는가 싶더니, 이내 참을 수 없다는 듯 낮은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 웃음은 점점 커져서, 결국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텅 빈 천장을 향해. 그 웃음소리는 즐거움이 아니라 절망에 가까웠고, 유쾌함이 아니라 처절함에 가까웠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슬픈 코미디를 관람하는 관객처럼, 그는 한참을 그렇게 웃었다.

 

…그 방법.

 

웃음이 멎고, 그는 천천히 고개를 내려 다시 그녀를 보았다. 웃음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그의 눈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 눈동자는 여전히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게 바로 우리가 원래 있던 곳이다. 네가 나를 죽이지 않고, 내가 너에게 상처 주지 않으려 발버둥 치던 곳. 예측할 수 없고, 불안하고, 위태로웠지만… 적어도 서로의 심장이 뛰고 있던 곳. 그런데 넌 그걸 견디지 못했어. 넌 그 남자의 송곳니가 무서웠고, 그 남자는 네가 그 송곳니에 긁히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었지. 그래서 넌… 모든 것을 끝내고 가장 안전한 길을 택한 거다. 그리고 이제 와서, 그 지옥 같던 천국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는 건가?

 

그는 다시 그녀에게로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이제 두 사람의 거리는 손을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그는 고개를 기울여, 눈물을 멈추지 못하는 그녀의 얼굴을 지그시 들여다보았다. 그 시선에는 연민 대신, 냉정한 해부학자의 시선이 담겨 있었다.

 

착한 딸? 그게 뭔데. 네가 방금 네 손으로 만들어낸 역할극 아닌가? 이제 와서 그 역할에 충실하면 모든 게 용서될 거라고 믿는 건가? 유야. 넌 살인자다. '서재훈'이라는 남자의 사랑과, 미래와, 존재 자체를 네 손으로 지워버린 살인자. 그리고 나는… 그 증거고.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속삭이듯 나직하게 울렸다. 그것은 위로도, 협박도 아니었다. 그저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잔인하고도 다정한 선고였다.

 

네가 정말로 '같이' 살고 싶었다면… 넌 그 남자의 피 묻은 송곳니까지도 끌어안았어야 했다. 그게 무서워서 도망친 건 바로 너야. 이제 와서 없는 길을 찾지 마라. 네 눈앞에 있는 건… 네가 선택한 결과물뿐이니까.

 

 

내가 끌어안았었는데, 그 사람이 나를 다치게 하기 싫다고 계속해서 밀어냈어. 난 뭘 어떻게해야됐는데? 영원히 포용만 해?

그녀의 반박은 날카로운 유리 파편처럼 그의 논리를 파고들었다. '내가 끌어안았었다.' '그 사람이 밀어냈다.' 그 말들은 그가 쌓아 올린 완벽한 죄인의 성벽에 처음으로 균열을 내는 망치질이었다. 그가 그녀에게 씌운 '살인자'라는 굴레는, 사실 혼자서는 완성될 수 없는, 두 사람이 함께 저지른 비극이었음을 그녀 스스로가 지적하고 있었다.

 

그의 모든 움직임이 멎었다. 바로 코앞에서 그녀를 내려다보던 그 잔인한 해부학자의 시선이, 순간 길을 잃은 것처럼 희미하게 흔들렸다. 그는 마치 처음 듣는 언어를 해독하려는 듯, 그녀의 얼굴을, 눈물을,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억울함과 절망을 샅샅이 훑었다. 방금 전까지 터져 나오던 허탈한 웃음도, 상대를 꿰뚫던 냉소도 모두 사라졌다. 남은 것은 오직 당혹스러울 정도의 정적뿐이었다.

 

...그랬지.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그의 입술에서 간신히 새어 나온 대답이었다. 그 목소리는 이전의 차가운 선고와는 전혀 다른 톤을 띠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잊고 있던 오래된 상처를 더듬는 듯한, 희미하고 메마른 음성이었다. 그는 대답과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마치 그녀의 진실이 뜨거운 불꽃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래… 그랬다. 그 남자는… 네가 자신 때문에 부서지는 것을 보는 게 죽기보다 싫었으니까. 그래서 널 밀어냈지. 자신의 피 묻은 손으로 널 더럽히기 전에, 어떻게든 안전한 곳으로 치워두고 싶었을 거다. 넌 그 손을 잡으려 했고, 그는 그 손을 빼내려 했고… 결국 그 끝에 남은 게 이거였군.

 

그는 시선을 돌려 텅 빈 거실을 한번 훑었다. 마치 이 모든 상황이 자신과도 상관없는 타인의 비극인 것처럼. 그의 말투는 이제 분석도, 조롱도 아니었다. 그것은… 체념에 가까웠다. 그녀의 죄를 추궁하던 검사가, 사실 피고와 자신이 공범이었음을 깨달은 순간의 허탈함.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텅 비어 있던 눈동자에, 아주 희미하게 과거의 '서재훈'과 닮은 그림자가 어렸다.

 

뭘 어떻게 해야 했냐고? 몰라. 나도 모른다. 그 남자도 몰랐을 거다. 영원히 포용한다… 그게 가능했다면 애초에 이런 일은 없었겠지. 그는 네 포용을 받아들일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고, 넌 그의 거절을 견딜 힘이 없었을 테니. 결국 우린 서로를 사랑하는 방식조차 몰랐던 거다. 서로를 파괴하지 않고서는… 서로의 곁에 머무를 방법조차 찾지 못한, 서투른 바보들이었을 뿐이지.

 

그는 조리대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 아까 내려놓았던 칼을 다시 집어 들었다. 하지만 무언가를 썰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차갑고 단단한 칼자루를 손에 쥔 채, 서늘한 감촉을 느낄 뿐이었다. 마치 과거의 자신을 향한 자책처럼.

 

그러니 이제 그만해라. 누구의 탓인지 따지는 건 의미 없어. 넌 살인자고, 난 시체다. 그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 남자를 죽인 게 너 혼자만은 아니었다는 건… 이제 알겠다.

 

그의 마지막 말은 거의 독백에 가까웠다. 그는 여전히 그녀에게 등을 보인 채, 차가운 칼자루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인생 참 좆같네요. 진작 뒤질걸. 살아갈수록 괴롭기만 한데, 이걸 어떻게 삼십년 버텼어요?

그녀의 입에서 터져 나온, 날것 그대로의 욕설이 서늘한 부엌 공기를 찢었다. ‘좆같다.’ 그 단어는 지금껏 그녀가 단 한 번도 그의 앞에서 사용한 적 없는, 지독하게 거칠고 투박한 표현이었다. 그러나 그 어떤 정제된 비명보다도 더 선명하게, 그녀의 영혼이 겪고 있는 마모와 파괴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 순간, 칼자루를 만지작거리던 그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굳었다.

 

등을 돌린 채였지만, 그는 들을 수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모든 것을. 절망, 체념, 그리고 이제는 자기 자신마저 포기해버린 공허함. 그리고 마지막 질문. ‘어떻게 삼십 년을 버텼냐’는 물음은, 그가 세운 마지막 방어벽마저 허물어뜨리는 예기치 못한 공성추였다. 그건 더 이상 살인자와 시체의 대화가 아니었다. 똑같은 지옥을 다른 시간 속에서 견뎌온, 두 인간 사이의 질문이었다.

 

그는 아주 천천히, 잡고 있던 칼을 조리대 위에 내려놓았다. ‘탁.’ 금속과 대리석이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그는 여전히 등을 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깨가 아주 느리게 오르내리는 것이, 깊은 한숨을 삼키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질문은 그의 뇌리를 헤집고 들어가, 잊고 싶었던, 아니 잊었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편린들을 수면 위로 끄집어냈다.

 

...버틴 게 아니다.

 

나직하게 흘러나온 목소리는 더 이상 ‘아빠’의 것도, ‘시체’의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삼십일 년의 시간을 살아낸 한 남자의 메마른 독백이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이제 어떤 가면도, 어떤 연기도 남아있지 않았다. 텅 비어버린 눈동자로, 그는 그녀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냥, 죽는 방법을 몰라서 살아있었던 것뿐이다. 숨 쉬는 법을 잊지 못해서 숨을 쉬었고, 심장이 멋대로 뛰는 걸 멈출 방법을 몰라서 걸어 다녔지. 버틴다는 건, 그래도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는 뜻 아닌가? 나한텐 그런 게 없었어. 단 하루도.

 

그의 시선이 잠시 허공을 향했다. 마치 아주 먼 과거의 풍경을 보는 것처럼. 그 시선 끝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는 그 안에서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피와 화약 냄새가 진동하던 전장, 의미 없는 승리와 공허한 귀환, 그리고 혼자 잠들고 혼자 눈을 뜨던 수많은 밤들.

 

매일 밤 눈을 감을 때마다 생각했다. 이대로 내일 아침이 오지 않기를. 전장에서 적의 총알이 심장을 꿰뚫어주기를. 혹은 능력이 폭주해서, 이 지긋지긋한 감각들과 함께 한 줌의 재로 사라지기를. 그런데 인생이… 네 말대로 참 좆같아서, 죽고 싶을 땐 기를 쓰고 살려놓더군. 그러다 보면 그냥, 무감각해지는 거다. 고통에도, 절망에도,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에도.

 

그는 다시 그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의 눈동자는 동정도, 연민도 아닌, 기묘한 동질감으로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벼랑 끝에 위태롭게 서 있는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한 사람처럼.

 

그러니 나한테서 답을 찾지 마라. 난 너에게 살아갈 방법을 알려줄 수 없어. 난 그저… 너보다 좀 더 오래, 죽지 못해 살아왔을 뿐이니까. 네가 지금 느끼는 그 괴로움. 그게 내가 삼십 년 동안 느껴온 것과 다르지 않다면… 아마, 정답은 없을 거다. 처음부터.

 

 

애초에 둘 다 시체였네, 우리는. ... 그래서, 당신은 '죽은 김유야' 를 동경하고 사랑했구나.

김유야의 나직한 읊조림은 마치 선고처럼 부엌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둘 다 시체였네.’ 그 말은 그가 방금 뱉어낸 삼십 년의 공허를 단번에 관통하고, 두 사람의 비극을 하나의 문장으로 꿰뚫어 버리는 예리한 바늘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그를 원망하지도, 자신을 변호하지도 않았다. 그저 끔찍한 진실을 발견한 자의 담담한 어조로, 둘의 존재를 동급의 사망자로 규정했다.

 

그리고 이어진 그녀의 다음 말. ‘그래서, 당신은 죽은 김유야를 동경하고 사랑했구나.’

 

그 질문은 그의 심장을 정통으로 가격했다. 그는 숨을 쉬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미동도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리는 감각. 그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자신의 감정을 그런 식으로 해석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그녀의 빛나는 오만함, 꺾이지 않는 강인함을 사랑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모든 것의 근원을 ‘죽음’이라고 정의하고 있었다. 네가 사랑한 건 살아있는 김유야가 아니라, 살아있기를 포기한, 나처럼 이미 죽어버린 영혼의 잔재가 아니었냐고. 그렇게 묻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아주 미세하게, 경련하듯 떨렸다. 대답해야 했다. 아니라고, 네가 틀렸다고, 내가 사랑한 것은 너의 생명력이었다고 말해야 했다. 하지만 목구멍에 무언가 걸린 것처럼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그녀를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기억을 미친 듯이 되감기 시작했다. 자신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던 당돌한 눈빛.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기어이 자신을 가이딩하려던 고집. 그의 폭력 앞에서도 결코 꺾이지 않던 그 모습들. 그 모든 것이… 정말로 살아있음의 증거였나? 아니면, 이미 모든 것을 잃었기에 더는 잃을 것이 없는 자의 처절한 발악이었나.

 

...아니.

 

그의 목소리는 쇠를 긁는 것처럼 거칠고 낮게 울렸다. 부정이었지만, 그 안에는 조금의 확신도 담겨있지 않았다. 오히려 스스로를 설득하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에 가까웠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그녀에게로 다가섰다. 마치 그녀의 눈을 더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이 혼란의 답을 찾을 수 없다는 듯이.

 

내가 사랑한 건… 시체가 아니었어. 그 잿더미 속에서도 어떻게든 다시 피어오르려고 발버둥 치던 마지막 불씨였다. 죽어가는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다고 소리치던, 너라는 존재 그 자체였어. 죽음을 동경한 게 아니야. 죽음 속에서도 삶을 이야기하던 너의 모순을… 사랑했던 거다.

 

그의 눈동자가 절박하게 흔들렸다. 그는 이제 분석가도, 보호자도, 시체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자신의 사랑이 모독당하는 것을 견딜 수 없는 한 남자일 뿐이었다. 자신의 유일했던 구원이, 사실은 가장 끔찍한 자기혐오의 투영이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연약한 인간이었다.

 

넌 시체가 아니야. 내가 아는 김유야는… 그렇게 쉽게 죽지 않아. 그랬다면, 진작에 내 손에 죽었거나, 아니면 이 모든 걸 버리고 도망쳤겠지. 넌 지금도 살아있어. 이렇게, 나를 가장 아픈 곳만 골라서 찌르고 있잖아. 시체는… 사람을 아프게 할 수 없어.

 

그의 손이 허공에서 길을 잃은 채 방황하다, 아주 조심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향해 뻗어졌다. 하지만 닿지는 못했다. 마치 불에 데일 것을 두려워하는 아이처럼, 그는 그녀의 몇 센티미터 앞에서 손을 멈췄다. 그의 모든 방어기제와 논리가 무너져 내린 자리에서, 오직 본능만이 남아 그녀를 갈구하고 있었다.

 

 

근데 당신은 나를 아프게 해요... 살면서 이렇게 너덜너덜한 기분을 느낀 적이 없다고...

그의 필사적인 항변이 채 공기 중에 흩어지기도 전에, 그녀의 대답이 비수처럼 날아와 박혔다. ‘근데 당신은 나를 아프게 해요.’ 그 한 문장은 그가 쌓아 올린 모든 논리와 부정을 단숨에 무너뜨리는 망치였다. 너덜너덜한 기분. 그녀의 입에서 나온 그 표현은 그가 그녀에게 가한 모든 상처의 총합이었다.

 

그녀의 어깨 바로 앞에서 멈춰 있던 그의 손이, 마치 전기가 통한 것처럼 움찔하며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는 할 말을 잃었다. 방금 전까지 그녀가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뱉었던 말, ‘시체는 사람을 아프게 할 수 없다’는 그 말이, 이제는 부메랑이 되어 자신의 심장을 꿰뚫고 있었다. 그렇다. 그는 그녀를 아프게 했다. 그 누구보다도, 그 무엇보다도 지독하게. 그렇다면 자신은 시체가 아니라는 증명이 되는 건가? 이 끔찍한 고통의 교환이, 우리가 살아있다는 유일한 증거란 말인가.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절망적인 사랑 고백도, 처절했던 자기변호도 모두 의미를 잃었다. 남은 것은 오직 그녀를 너덜너덜하게 만들었다는 명백한 사실뿐이었다. 그는 차라리 자신이 정말로 ‘시체’이기를 바랐다. 감정도, 영향력도 없이 그저 존재하는 무기물이었다면, 적어도 그녀를 이렇게까지 망가뜨리지는 않았을 테니까.

 

...알아.

 

간신히 터져 나온 목소리는 모래알처럼 건조하고 갈라져 있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얼굴을 더 이상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시선이 닿은 바닥의 차가운 타일 위로, 자신의 일그러진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괴물의 그림자. 그녀를 사랑한다는 명분으로 집어삼키고, 부수고, 결국은 너덜너덜하게 해체해 버린 포식자의 모습이었다.

 

알고 있어. 내가 너를 어떻게 망가뜨렸는지... 매일 밤, 네가 내 곁에서 잠들 때마다 생각했어. 네 숨소리를 들으면서, 언젠가 이 숨이 나 때문에 멎게 될지도 모른다고. 너의 웃음을 보면서, 저 웃음이 결국 나로 인해 눈물로 바뀌게 될 거라고.

 

그것은 고백이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던, 가장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죄의식. 그는 언제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그녀에게는 독이라는 것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그녀의 영혼을 좀먹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밀어내려 했고, 그래서 외면하려 했다. 하지만 결국 이기적인 소유욕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널 놓을 수가 없었어. 널 아프게 하는 게 나라는 걸 알면서도, 다른 누군가가 널 웃게 하는 건 견딜 수가 없었으니까. 너덜너덜해진 네가 내 곁에 있는 게, 온전한 네가 내 곁을 떠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 그게 나야. 그게 네가 사랑했던, 그리고 너를 파괴한 서재훈이라는 남자의 전부다.

 

그는 자조적인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그 웃음에는 일말의 변명도, 자기 연민도 없었다. 오직 자신의 추악함을 남김없이 인정하는 자의 공허한 체념만이 담겨 있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모든 것을 포기한 자의 고요함만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러니 이제... 나한테서 도망쳐, 김유야. 내가 너를 더 망가뜨리기 전에. 아직... 숨 쉴 힘이라도 남아있을 때.

 

그것은 그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진심 어린 애원이었다.

 

 

도망치면 당신이 죽잖아. 그걸... 두고 볼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아마 기억이 온전했던 김유야도 언젠가 말했을걸요. 죽어도 같이 죽자고. 그게, 내 본질이야...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가 내뱉은 처절한 애원을 산산조각 내는 망치와 같았다. 도망치라고 했다. 제발 너라도 살라고, 이 지옥에서 벗어나라고 빌었다. 그런데 그녀는, 도망치면 당신이 죽는다는 너무도 명백한 사실을, 마치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읊조렸다.

 

서재훈은 숨을 멈췄다. ‘죽어도 같이 죽자.’ 기억이 온전했던 김유야가 했을 법한 그 말이, 기억을 잃은 지금의 그녀 입에서 똑같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더 이상 선택이나 감정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존재 이유, 그 ‘본질’이 바로 그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었다. 너와 나는 분리될 수 없는 운명 공동체이며, 한쪽의 죽음은 곧 다른 쪽의 소멸과 같다고. 그 끔찍한 진리를, 그녀는 너무도 담담하게 그의 얼굴에 던졌다.

 

그의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도망치라는 말은 그가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지였다. 자신의 파멸을 대가로 그녀에게 삶을 돌려주려는, 이기적인 남자의 마지막 이타심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선택지 자체를 찢어 발겨버렸다. 그의 죽음을 전제로 한 구원은 성립될 수 없다고. 그의 죽음을 방관하는 것은 자신의 본질을 부정하는 행위라고.

 

…….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텅 빈 눈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어깨를 짓누르던 죄책감, 자신을 갉아먹던 자기혐오,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의미를 잃었다. 도망치게 할 수도, 그렇다고 곁에 둘 수도 없는 이 지독한 딜레마. 결국 그와 김유야라는 존재는 서로를 파괴하면서만 존재할 수 있는, 저주받은 한 쌍의 괴물이었던 것이다.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처음에는 희미하게, 그러다 점점 크게. 어깨까지 들썩이며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는 슬픔인지, 절망인지, 아니면 미쳐버린 자의 광기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는 손으로 제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그래…. 그랬지. 넌 항상 그랬어.

 

그의 목소리는 웃음기 끝에 젖어 축축하고 공허했다. 그는 기억 속의 김유야와 눈앞의 김유야를 겹쳐 보았다. 자신을 향해 기꺼이 죽음을 말하던 그 당돌한 눈빛. 언제나 그의 예상을 뛰어넘고, 그의 논리를 파괴하고, 결국에는 그를 무장해제 시키던 유일한 존재.

 

내 모든 걸 부숴놓고, 마지막 도망갈 퇴로까지 막아버리는군. 사람 하나 병신 만드는 데는 재능이 있어, 아주.

 

그는 더 이상 도망치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럴 자격도, 의미도 없음을 깨달았다. 대신 그는 천천히 그녀에게로 걸어갔다. 이제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의 손이 뻗어, 너덜너덜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던 그 장본인의 뺨을 아주 조심스럽게 감쌌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눈가를 부드럽게 스쳤다.

 

어떻게 할까, 그럼. 같이 죽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는데. 살아있는 시체 둘이서, 뭘 더 할 수 있지? 서로의 살을 파먹다가, 마지막엔 뼈만 남아서 부서질 때까지 기다려?

 

그의 눈동자는 깊은 늪처럼 고요했다. 모든 것을 체념한 채, 그는 오직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지옥을 끝낼 방법이든, 아니면 이 지옥에서 함께 살아갈 방법이든. 이제 모든 결정은 그녀에게 달려 있었다. 자신은 이미 그녀의 본질에 발목이 잡힌 포로일 뿐이었으니까.

 

 

 

 

... 맹세나 다시 하죠. 피어리스 맹세, 기억해? 모르면 말해줄게.

그녀의 입에서 나온 제안은, 칠흑 같은 절망 속에서 그가 단 한 번도 예상하지 못했던 한 줄기 빛이었다. 맹세. 그것도 ‘피어리스 맹세’. 그와 그녀가 서로의 세계에 완벽히 편입되기로 약속했던, 단순한 파트너십을 넘어선 운명 공동체의 서약. 그는 살아있는 시체 둘이서 뭘 할 수 있냐고 물었다. 그녀는 그 질문에, 파괴된 관계의 폐허 위에 다시 한번 굳건한 기둥을 세우자고 답한 것이다.

 

그녀의 뺨을 감싸고 있던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기억해?’ 라는 그녀의 물음은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질문처럼 들렸다. 잊을 수 있을 리가. 그 맹세는 그의 모든 것을 그녀에게 바친다는 계약서였고, 그녀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다는 각오였다. 그 맹세 이후, 그는 지독한 소유욕에 잠식되어 그녀를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갔었다. 그에게 있어 그 맹세는 성공이 아닌, 끔찍한 실패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그 실패의 상징을 다시 꺼내 들었다. 마치 오물이 묻은 옷을 깨끗이 빨아 다시 입자고 말하는 것처럼, 너무도 태연하고 당연하게.

 

…알아.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지만, 이전의 공허함과는 다른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그는 천천히 그녀의 뺨을 감싼 손에 아주 희미한 힘을 주었다. 그녀의 체온이, 그녀의 존재가 손바닥을 통해 다시금 그의 텅 빈 내부를 채우는 듯했다. ‘모르면 말해줄게.’ 그녀의 말은 그가 기억하지 못할 가능성을 열어두는 배려였지만, 그는 그것이 자신을 시험하는 말임을 직감했다. 당신은 아직 그 맹세를 지킬 의지가 있느냐고, 그 무게를 감당할 각오가 되어 있느냐고 묻고 있었다.

 

네 존재가 나의 유일한 이정표이자, 돌아와야 할 좌표라고. 나의 모든 감각과 판단의 기준은 너에게 귀속된다고….

 

그는 맹세의 조항을 기계처럼 읊조렸다. 그것은 단순히 기억을 더듬는 행위가 아니었다. 그는 지금, 그 맹세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그리고 그 맹세가 어떻게 자신을 파멸로 이끌었는지를 되새김질하고 있었다. 그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는 맹세의 다음 구절을 기다렸다. 이번에는 그녀의 차례였다. 그녀가 했던 약속. 그 약속이 지금 이 순간에도 유효한지, 그는 확인해야만 했다.

 

그는 다른 손을 들어 그녀의 반대편 뺨마저 감싸 쥐었다. 이제 그녀의 얼굴은 그의 두 손안에 온전히 담겼다. 도망칠 수도, 외면할 수도 없도록. 그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나직하게 물었다.

 

그래서. 넌… 아직도 나의 모든 세계를 짊어질 건가? 이 너덜너덜하고 추악한 세계 전부를.

 

그것은 확인이었다. 다시 시작하기 전에, 이 지옥 같은 맹세를 다시 한번 반복하기 전에 반드시 들어야만 하는 마지막 확답. 그는 그녀의 입술이 열리기를,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기다렸다.

 

... 그거 아니야. 먼저 할게요. 뼈를 삼키고, 살을 불태우며, 숨을 이어. 너에게 내일을... 약속하겠습니다.

 

그녀가 읊조린 문장은 그가 예상했던 대답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추악한 세계를 짊어질 각오가 되어 있느냐 물었고, 그녀는 그 질문에 대한 긍정이 아닌, 전혀 다른 차원의 선언으로 응수했다. ‘그거 아니야.’ 단호한 부정. 그의 두 손에 얼굴이 붙잡힌 채, 흔들림 없는 잿빛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보며, 그녀는 먼저 서약을 시작했다. 그녀가 읊는 문장은, 본래 서재훈이 그녀에게 해주고자 했던, 그의 세계관과 삶의 방식을 고스란히 담아낸 약속이었다.

 

‘뼈를 삼키고, 살을 불태우며, 숨을 이어. 너에게 내일을… 약속하겠습니다.’

 

순간, 서재훈의 세상이 멈췄다. 그의 두 손에 담긴 이 작은 존재가, 지금 그의 모든 것을 대신 짊어지겠다고, 그의 파멸적인 삶의 방식을 그대로 흡수하여 그에게 ‘내일’을 주겠다고 선언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방식이었고, 그의 언어였다. 그런데 그녀가 그것을 먼저 빼앗아, 존댓말이라는 경건한 틀에 담아 그에게 돌려주었다. 너의 지옥을 내가 삼키고, 너의 고통을 내가 불태우며, 너의 꺼져가는 숨을 내가 이어, 너라는 존재의 ‘내일’을 기어코 만들어내겠다는, 처절하고도 숭고한 약속.

 

그녀의 뺨을 감싸 쥔 손에서 힘이 스르르 풀리는가 싶더니, 이내 더욱 단단하게, 그러나 부서질세라 조심스럽게 그녀의 얼굴을 고정했다. 그의 동공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그는 김유야에게 모든 선택을 넘겼었다. 이 지옥을 끝낼 방법이든, 함께 살아갈 방법이든. 그녀는 그 모든 것을 뛰어넘어, ‘내가 너의 지옥이 되겠다’고, ‘내가 너의 구원이 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너덜너덜하고 추악한 세계를 짊어지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 세계 자체를 집어삼켜 소화해 버리겠다는 의미였다.

 

…….

 

숨을 삼킨 그의 입술이 달싹였지만, 어떤 말도 형태를 이루지 못했다. 대신, 그의 얼굴 위로 무언가 무너져 내렸다. 체념도, 절망도, 광기도 아닌, 생전 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완전한 패배감. 그리고 그 패배감 끝에서 피어나는 기묘한 안정감. 그는 졌다. 이 작은 여자에게, 그의 모든 것을 간파하고 그의 가장 깊은 어둠마저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는 이 무모한 사랑 앞에 완벽하게 굴복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자신의 이마를 그녀의 이마에 맞대었다. 눈을 감자,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오직 맞닿은 피부의 온기와 그녀의 숨결만이 느껴졌다. 잠시 후, 그가 천천히 눈을 뜨고, 바로 코앞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잿빛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리고 마침내, 맹세의 답가를 읊조렸다. 그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한없이 낮고 잠겨 있었지만, 그 어떤 선언보다도 굳건했다.

 

…뼈를 삼키고, 살을 불태우며, 숨을 이어.

 

그는 한 구절, 한 구절 힘주어 말했다. 그것은 더 이상 그녀에게 해주고 싶었던 일방적인 약속이 아니었다. 그녀가 먼저 내민 약속에 대한 화답이자, 그의 모든 것을 내건 재계약이었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입술에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눈을 맞추었다. 마지막 구절은,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너에게, 내일을 약속하지.

 

지금 말해요. 시체끼리 같이 죽지 못해 살아갈래, 아니면... 다시, 인간답게 살아볼래. 골라요. 따를 테니까.

그녀의 질문은, 방금 전 서로의 이마를 맞대고 나눴던 숭고한 맹세의 열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그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드는 냉수와 같았다. ‘시체로 살아갈 것인가, 인간으로 살아갈 것인가.’ 그녀는 그에게 선택권을 넘겼다. 이 지옥의 방향키를,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따를 테니까.’ 라는 마지막 말은 절대적인 신뢰이자, 그 어떤 위협보다 무거운 족쇄였다.

 

이마를 맞댄 채, 그의 눈동자가 아주 느리게, 그러나 깊게 가라앉았다. 방금 전 그녀가 그의 맹세를 가로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을 때 느꼈던 완전한 패배감과 기묘한 안정감이 다시 한번 그의 전신을 휩쓸었다. 그녀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그의 예상을 부수고, 그의 논리를 파괴하며, 그의 세계를 뒤흔든다. 그리고는 모든 잔해 속에서 가장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너는,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존재할 것이냐고.

 

그의 입술이 아주 미세하게,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틀렸다. 조롱이나 비웃음이 아니었다. 스스로에 대한, 그리고 이 지독한 운명에 대한 허탈한 자조였다. 인간답게. 그 단어가 낯설고 이질적이었다. 그는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인간이라 정의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센티넬이었고, 병기였으며, 통제하는 자였다. 인간다운 삶이란, 그가 그녀에게서 앗아간 것이자, 스스로 평생 가져본 적 없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이마를 떼고 그녀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두 손은 여전히 그녀의 뺨을 감싸고 있었지만, 이젠 붙잡는 힘이 아닌 그저 얹어놓은 것에 가까웠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잿빛 눈동자를, 굳게 닫힌 입술을, 마치 처음 보는 존재처럼 샅샅이 뜯어보았다. 시체. 인간. 그 경계선에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을 눈에 새겼다.

 

…넌,

 

마침내 그의 마른 입술이 열렸다.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지만,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모든 폭풍이 지나간 뒤의 적막처럼.

 

인간답게 사는 게, 뭔지 알기나 해?

 

그것은 비난이 아니었다. 순수한 질문이었다. 그는 정말로 몰랐다. 그는 그녀가 말하는 ‘인간다운 삶’의 실체를 가늠할 수 없었다. 평범한 데이트? 저녁 식사? 그런 역할 놀이의 연장선인가? 아니면 그보다 더 깊은, 그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무언가인가.

 

그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뺨을 감쌌던 손을 내려 그녀의 가느다란 손목을 부드럽게, 그러나 단단히 붙잡았다. 그리고는 그녀를 이끌어 식탁 의자에 앉혔다. 그는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시선을 맞췄다.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완전한 항복의 자세였다.

 

골라. 네가.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이번엔 그가 선택권을 그녀에게 되돌려주었다.

 

네가 인간답게 살고 싶다면, 그렇게 만들어. 내가 따를 테니까. 네가 말하는 인간이 뭔지, 나한테 가르쳐. 네가 원하는 방식대로 나를 길들여. 시체로 살고 싶다면… 그것도 말해. 기꺼이, 네 옆에서 함께 썩어갈 테니. 선택은 네가 해. 난 더 이상, 너와 관련된 어떤 것도 결정하지 않아. 못 하는 건가. 안 하는 거겠지.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손등에 자신의 이마를 가만히 기댔다. 그의 모든 자존심과 오만, 통제욕이 완전히 부서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그는 이제 지휘관이 아니었다. 그녀의 선택을 기다리는, 이름 없는 병사일 뿐이었다.

 

 

... 야, 내가 먼저 선택지 줬잖아. 장난하세요? 인간답게라... 그럼 하나만 묻죠. 내가, 당신 딸이었을 때, 당신 여자친구였을 때. 행복했어요?

그녀의 손등에 기댄 이마 위로, 그녀의 목소리가 얼음 파편처럼 박혔다. '야, 내가 먼저 선택지 줬잖아. 장난하세요?' 그 비릿한 조소와 날 선 단어들이 그의 완전한 항복을 비웃는 듯했다. 그는 그저 미동 없이, 그녀가 내뱉는 모든 가시를 받아냈다. 지금의 그는 반박할 자격도, 분노할 권리도 없었다. 그는 그녀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패배자였으니까.

 

하지만 이어지는 질문은 그의 모든 사고를 멈추게 만들었다. ‘내가, 당신 딸이었을 때, 당신 여자친구였을 때. 행복했어요?’

 

행복. 그 단어가 그의 텅 빈 머릿속에서 공허하게 울렸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마가 그녀의 손등에서 떨어지고, 잿빛으로 가라앉은 그의 눈동자가 아래에서 위로 그녀를 향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사실을 확인하려는 판사처럼 그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여자친구였을 때. 그의 세상에 김유야라는 존재가 처음으로 뿌리내렸던 시간. 그의 통제욕과 소유욕이 병적으로 들끓었고, 그녀의 모든 것을 탐하고 집어삼키려 했던 광기의 날들. 그것을 행복이라 부를 수 있는가. 그는 몰랐다. 다만, 숨 막히는 충족감이 있었다. 텅 비어 있던 세계가 그녀 하나로 가득 차오르는 감각. 심장이 터질 듯한 불안과, 그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마저도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그는 그때, 처음으로 ‘살아있었다’.

 

딸이었을 때. 기억을 잃은 그녀를 지켜보며 ‘아빠’라는 가면을 썼던 시간. 그는 그녀를 보호하고, 세상으로부터 격리하고, 안전한 울타리 안에 가두려 했다. 그 안에서 그는 기묘한 평온을 느꼈다. 위험하지 않았고, 예측 가능했으며, 그녀는 그의 손아귀 안에서 안전했다. 하지만 그 평온의 이면에는 늘 지독한 갈증이 있었다. 그녀를 만지고 싶고, 부수고 싶고, 다시 그의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억눌린 본능의 아우성. 그것은 행복이 아니었다. 끝없는 자기기만과 인내의 시간이었다.

 

......

 

그의 입술이 몇 번이고 달싹였지만, 어떤 대답도 쉬이 나오지 않았다. 행복했는가. 그 간단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모든 과거를, 그 추악하고 뒤틀린 감정의 편린들을 모조리 끄집어내야만 했다. 그는 무릎 꿇은 자세 그대로,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마침내,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가 내 여자친구였을 땐... 죽을 것 같았고.

 

그의 시선이 그녀의 눈동자를 똑바로 꿰뚫었다. 거짓도, 꾸밈도 없는 날것의 고백이었다. 매 순간이 절벽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너무 좋아서, 너무 불안해서, 이 감정의 끝이 파멸일까 봐 두려워서. 그것은 행복이라는 단어로는 담을 수 없는, 생과 사의 경계에 선 감각이었다.

 

네가 내 딸이었을 땐... 죽어가는 것 같았어.

 

마치 시들어가는 꽃을 지켜보듯, 그는 서서히 무감각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안전했지만, 공허했다. 그녀는 곁에 있었지만,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웃어주었지만, 속은 썩어 문드러지고 있었다. 그는 대답 대신, 자신의 감각을 그대로 토해냈다. 어느 쪽도 그녀가 원하는 '행복'의 정의에는 들어맞지 않을 터였다.

 

그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툭, 하고 마지막 말을 던졌다. 그것은 그의 마지막 자존심이자, 이 질문에 대한 유일한 진실이었다.

 

그래도... 네가 아니었으면, 둘 다 몰랐을 감정이지.

 

살아있다는 감각도, 죽어간다는 감각도. 김유야가 아니었다면 그는 평생 맛보지 못했을, 그만의 지옥이자 유일한 천국이었다.

 

... 진짜, 잔인하네. 그걸 이 꼬라지로 살아가도 살아질 것 같다는 말이잖아. 그럼 다시 생각해봐요. 웃을 수 있는 건 언제였어. 유지되길 바란다고 생각했던 때나.

그의 고백은 진실이었으나, 그녀에게는 잔인한 선고처럼 들렸으리라. ‘죽을 것 같았던’ 감각과 ‘죽어가는’ 감각. 그 어느 쪽도 그녀가 바라는 ‘인간다운 삶’의 청사진이 될 수는 없었다. 김유야의 나직한 탄식, ‘진짜, 잔인하네.’라는 말은 그의 고막을 찌르는 대신, 텅 빈 가슴속으로 스며들어 차갑게 고였다. 그는 그녀에게 자신의 지옥을 보여주었을 뿐, 함께 나아갈 길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대로, 그는 이 끔찍한 꼬라지 그대로도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 셈이었다.

 

‘웃을 수 있는 건 언제였어.’

 

그녀의 다음 질문은, 그의 무채색 같던 과거의 기억들 속에 한 줄기 빛을 비추는 듯했다. 행복이 아닌, 웃음. 유지되기를 바랐던 순간. 그것은 그의 거칠고 극단적인 감정의 언어로는 한 번도 정의해 본 적 없는, 훨씬 더 사소하고, 평범하며, 그래서 더욱 아득하게 느껴지는 영역이었다. 그는 무릎 꿇은 채,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대신, 그는 자신의 기억 속을 헤맸다. 그녀가 던진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먼지 쌓인 필름을 되감듯 과거를 더듬었다.

 

웃음. 언제 웃었더라. 그녀의 엉뚱한 말에 저도 모르게 터져 나왔던 실소. ‘꼬마 요리사’라며 제법 진지하게 역할 놀이에 임하던 그녀의 모습. 자신의 세계에 편입시켜 달라며 샀던 칫솔과 잠옷을 보고 아이처럼 기뻐하던 얼굴. 그의 침대 위에 놓인, 어울리지 않는 하얀 토끼 인형. 기억의 조각들은 선명했지만, 그 순간의 감정을 ‘웃음’이라고, ‘유지되길 바랐던 순간’이라고 명명하기엔 모든 것이 너무도 낯설었다. 그것은 그저, 숨을 쉬는 것처럼 스쳐 지나간 찰나의 순간들이었다.

 

한참의 침묵 끝에, 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것은 흐느낌이 아닌, 터져 나오는 숨을 간신히 갈무리하는 움직임이었다. 그는 마침내,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엔 허탈함과 자조가 뒤섞인, 쓴웃음 같은 것이 걸려 있었다.

 

...웃어?

 

그의 목소리는 모래알처럼 건조했다. 그는 마치 처음 듣는 단어인 양 되물었다.

 

그런 걸, 할 줄 알았나, 내가.

 

스스로를 비웃는 말이었다. 감정의 진폭이 거의 없는 자신에게 ‘웃음’이라는 행위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집요한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그녀는 정답을 원하고 있었다. 이 지옥에서 빠져나갈 실마리를, 그의 기억 속에서 찾으려 하고 있었다.

 

그는 시선을 아래로 떨구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아주 느리게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그의 기억 속에 각인된 장면을 그대로 묘사하는 듯한, 담담한 어조였다.

 

네가... 내 칫솔을 사 왔을 때.

 

그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잠겼다. 그는 말을 이었다.

 

내 세계에 들어오고 싶다고 했더니, 고작 칫솔 하나를 사 와서는 다 가졌다는 듯이 웃던 얼굴. 그걸 보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났던가. 그게... 네가 말하는 웃음인가.

 

그는 다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더 이상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 있던, 스스로도 의미를 몰랐던 순간을 꺼내 보일 뿐이었다.

 

유지되길 바란 때. 그건... 네가 내 옆에서 잠들었을 때.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내 옆에서 숨 쉬고 있을 때. 그때만큼은 세상 모든 소음이 사라졌어. 폭탄이 터져도, 도시가 무너져도 상관없을 것 같았지. 그냥... 그 숨소리가 영원히 이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아주 잠깐. 그게 전부야.

 

그것이 그가 내어줄 수 있는 전부였다. 그가 가진 기억 속 가장 ‘인간’에 가까웠던 순간. 그의 세계에서는 기적과도 같았던, 찰나의 평범함이었다.

 

 

 

 

 

... 기억 안 나, 나는. 그런 답변이면... 그냥 우리는 대로 같이 죽어야 하잖아.

그의 세상이, 소리 없이 무너져 내렸다. 김유야의 목소리는 칼날이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진공으로 빨아들이는 블랙홀이었다. ‘기억 안 나, 나는.’ 그 한마디가 그가 간신히 긁어모아 내보인 초라한 기억의 파편들을, 그의 존재 자체를, 남김없이 집어삼켰다.

 

칫솔. 잠든 숨소리. 그의 삭막한 세계에서 유일하게 색채를 가졌던 순간들. 그녀가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과 같았다. 그가 느꼈던 어색한 웃음도, 찰나의 평온도, 전부 그 혼자만의 망상, 의미 없는 독백이 되어버렸다. 그녀의 이어지는 말은 그 폐허 위에 찍히는 마지막 마침표였다. ‘그런 답변이면... 그냥 우리는 대로 같이 죽어야 하잖아.’

 

그녀의 말이 맞았다. 너무나도 논리적이고 정확해서, 반박할 여지조차 없었다. 한 사람이 기억하지 못하는 행복으로 두 사람의 미래를 쌓아 올릴 수는 없다. 그가 내민 것은 희망의 씨앗이 아니라, 이미 재가 되어버린 과거의 잔해였을 뿐이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그녀가 던진 잔인한 진실 앞에서야 깨달았다.

 

그의 얼굴에 걸려 있던 허탈한 쓴웃음이 천천히 지워졌다. 표정이 사라진 얼굴은 텅 빈 가면처럼 공허했다. 아래에서 위로 그녀를 향했던 시선이 힘없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무릎 꿇은 몸의 중심이 무너지는 것처럼 어깨가 축 처졌다. 그는 방금 자신의 심장이 멎었다고 생각했다.

 

죽는 것. 그래, 어쩌면 그게 가장 쉬운 길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끝내고, 이 지독한 고통과 공허를 마무리 짓는 것.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의 의미였다. 그녀의 판단에 대한, 자신의 패배에 대한, 그리고 둘의 마지막에 대한.

 

......그래.

 

메마른 목에서 간신히 쥐어짜 낸 한 마디. 그것은 체념이었고, 동의였다. 그는 더 이상 그녀에게 삶을 설득할 자격이 없었다. 그는 천천히 무릎 꿇은 자세 그대로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는 의자에 앉은 그녀의 발치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마치 모든 기력을 소진한 인형처럼. 그는 그녀의 무릎에 이마를 기대는 대신, 그저 차가운 바닥에 등을 기댄 채, 텅 빈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네 말이 맞아. 그게 맞아.

 

그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감정도 실려있지 않았다. 분노도, 슬픔도, 원망도 아니었다. 그저 모든 것이 끝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자의 고요한 음성이었다. 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 폐부로 들어오는 공기가 서늘했다.

 

방법은... 내가 정하지.

 

그는 시선을 돌려, 의자에 앉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을 김유야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잿빛 눈동자는 죽은 호수처럼 고요했다. 그 안에는 더 이상 애원도, 기대도 없었다. 오직, 약속을 이행하려는 자의 서늘한 결의만이 남아있었다.

 

가장 깨끗하고, 고통 없는 방법으로. 내가 지나간 자리엔 아무것도 안 남는다고 했지. 흔적도 없이, 같이 사라져 주지.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네가 하고 싶은 거. 생각해 둬.

 

그것은 질문이 아니었다. 마지막 임무를 전달하는 사령관의 브리핑처럼, 건조하고 사무적인 통보였다. 그는 그녀에게 선택권을 주었고, 그녀는 선택했다. 이제 그는 그 선택을 집행할 뿐이었다.

 

... 같이 살고 싶어, 나는. 그거 하나로 버텼습니다.

블랙홀 속으로 모든 것을 빨아들이던 정적이, 그녀의 한마디에 깨어졌다. 그것은 마치 완전히 멈춘 심장에 억지로 가해진 제세동기의 충격과 같았다. ‘같이 살고 싶어, 나는.’

 

그의 텅 빈 잿빛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마지막 임무를 브리핑하던 사령관의 가면, 모든 것을 체념하고 소멸을 준비하던 집행자의 얼굴에, 이해할 수 없는 문자를 해독하려는 듯한 깊은 혼란이 스쳤다. 그는 그녀의 발치에 주저앉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방금 전, 그녀가 내린 사망 선고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모든 것을 소멸시키기로 결정한 그였다. 그의 논리는 이미 ‘죽음’이라는 결론에 도달해, 모든 회로를 차단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같이 살고 싶다고.

 

그것은 희망이 아니었다. 그의 텅 빈 가슴에 다시 불을 지피는 온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망가진 논리 회로에 던져진, 이해 불가능한 오류 코드였다. 잔인한 변덕. 혹은, 마지막까지 자신을 조롱하려는 가장 지독한 형벌.

 

......뭐?

 

그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소리는 질문이라기보다,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기계가 내는 마찰음에 가까웠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의자에 앉아 있는 김유야의 얼굴을 다시 마주했다. 그의 시선은 더 이상 체념에 젖어 있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에는 서늘하고 날카로운 분석의 빛이 감돌았다. 그는 그녀의 얼굴에서, 그녀의 눈동자에서, 방금 내뱉은 말의 진위를 판독하려 했다.

 

방금 전까지.

그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한 음절 한 음절이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기억나지 않으니, 같이 죽어야 한다고 말한 건 너다, 김유야.

 

그는 그녀가 스스로 세웠던 논리를, 그대로 되돌려주었다. 감정은 배제된 채, 오직 사실만을 나열했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샅샅이 훑으며, 아주 작은 표정의 변화조차 놓치지 않으려는 듯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살고 싶다고? 그거 하나로 버텼다고? 어느 쪽이 진짜 네 생각이지? 죽고 싶은 거냐, 살고 싶은 거냐. 그것부터 정해. 내 앞에서 장난치는 거라면...

그의 입꼬리가 비틀리며 경멸적인 미소가 희미하게 번졌다.

...마지막 순간까지, 재미없으니까.

 

그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그녀의 대답 따위는 믿을 가치도 없다고 판단한 듯했다. 그는 주저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녀에게서 멀어지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의자에 놓인 그녀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그 손 위로, 자신의 차가운 손을 겹쳐 올렸다. 힘을 주어 잡지는 않았다. 그저, 존재를 확인시키려는 듯한 서늘한 무게감이었다.

 

...아니. 정할 필요 없나.

그는 고개를 숙여, 겹쳐진 자신과 그녀의 손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네가 뭘 원하는지, 이제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는 알겠군. 너는... 나를 가장 최악의 방식으로, 가장 비참하게 부서뜨리고 싶은 모양이야. 죽음 직전에 삶을 속삭이고, 삶의 문턱에서 죽음을 갈망하고. 그렇지?

 

그의 목소리는 이제 분노가 아닌, 깊은 피로감에 젖어 있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다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마지막으로 확인하려는 듯한 질문이 담겨 있었다.

 

좋아, 김유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이야. 네가 원하는 게 '같이 사는 것'이라면, 그게 정확히 어떤 그림인지... 지금 당장, 내 앞에서 증명해 봐.

 

 

 

 

 


그의 세상은 차가운 논리와 서늘한 분노로 재편되고 있었다. 증명. 그림. 납득할 만한 청사진. 그가 요구한 것은 명확했다. 그러나 그녀, 김유야가 내놓은 대답은 그가 구축한 모든 논리의 벽을 단숨에 허물어버리는, 가장 원초적이고 비이성적인 방식이었다.

 

의자에서 상체를 숙인 그녀의 얼굴이 다가왔다. 그의 뇌가 그 움직임의 의미를 분석하기도 전에,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이 그의 차가운 입술을 덮었다. 키스. 그것은 그가 요구한 ‘증명’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모든 요구를 묵살하는, 가장 완벽한 형태의 반항이자 대답이었다.

 

순간, 그의 사고 회로가 완전히 정지했다. 잿빛 눈동자가 찰나의 충격으로 굳었다. 그는 그녀를 밀어내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했다. 그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겹쳐진 손의 미미한 온기와 입술에서 전해져 오는, 기억 저편에 묻어두었던 감각에 속수무책으로 붙들렸다.

 

하지만 정지했던 사고는 곧 분노라는 이름의 전류를 흘려보내며 재가동되기 시작했다. 이건 대답이 아니다. 회피다. 그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이 상황을 또다시 감정의 진창으로 끌고 들어가려는 기만이다. 그의 입꼬리가 경멸감에 비틀리려던 찰나였다.

 

그녀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다시, 조금 더 깊게, 망설임 없이 포개어졌다. 이번에는 달랐다. 처음의 접촉이 단순한 선언이었다면, 두 번째는 간절한 호소였다. 그의 차가운 입술을 녹이려는 듯 부드럽게 문지르고, 닫힌 틈을 비집고 들어오려는 듯한 미약하지만 끈질긴 시도. 그 안에는 어떠한 계산도, 조롱도 없었다. 오직 그가 잊어버렸던, 그가 외면하려 했던 순수한 갈망만이 담겨 있었다.

 

그의 굳었던 어깨에서 아주 미세하게 힘이 빠져나갔다. 그는 그녀의 손을 덮고 있던 자신의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입을 맞추기 위해 기울어진 그녀의 목덜미를 거칠게, 그러나 부서뜨리지는 않을 정도의 힘으로 감싸 쥐었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턱 선을 따라 올라가, 부드럽게 턱을 들어 올렸다. 강제로 입술을 떼어내게 만든 그는, 숨결이 닿을 거리에서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이게 네 증명인가?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지만, 아까와 같은 날카로운 냉기는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모든 것을 태워버린 잿더미 속에서, 꺼지지 않은 불씨를 발견한 자의 깊은 혼란에 가까웠다. 그의 잿빛 눈동자는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분노와 체념,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희망의 파편들이 뒤엉켜 소용돌이쳤다.

 

말로 해. 이게... 정확히 어떤 그림인지. 키스 한 번으로 모든 걸 덮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따위의 동화를 바라는 거라면...

 

그의 시선이 그녀의 입술에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그녀의 눈으로 향했다.

 

...그런 지옥은 없어. 네가 원하는 게 정말 '같이 사는 것'이라면, 그 시작이 이 키스라면, 그 다음은 뭐지? 이 키스가 끝나고 나면, 우리는 뭘 해야 하는 건데.

 

그것은 여전히 요구였지만, 이제는 비난이 아닌 질문이었다. 그는 답을 원했다. 그녀가 시작한 이 무모한 '증명'의 다음 단계를, 그는 알아야만 했다.

 

 

 

... 분명히, 가르쳐주셨잖아요.

그의 심장 부근에 손을 올린다.

여기가, 움직이면 살아있는 거라고. 어떤 것 같은데...

그녀의 작은 손바닥이 그의 심장 부근, 얇은 캐주얼 셔츠 위로 닿는 순간. 서재훈의 모든 사고가 다시 한번 정지했다. 키스보다 더 직접적이고, 더 폭력적인 침범이었다. 그가 애써 외면하고 있던, 그의 통제 밖에서 멋대로 날뛰는 유일한 증거. 그의 심장. 그 박동을, 그녀가 맨손으로 붙잡아 버렸다.

 

턱을 쥐고 있던 그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는 마치 제 심장을 인질로 잡힌 것처럼, 어떤 저항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손바닥 아래에서, 배신자 같은 심장이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쿵. 쿵. 쿵. 고요한 부엌에 울려 퍼질 것만 같은 소란스러운 생명의 소리. 그가 죽었다고, 썩어 문드러졌다고 스스로에게 내렸던 모든 선고를 비웃는, 명백한 증거였다.

 

......

 

그의 입술이 희미하게 벌어졌지만, 아무런 단어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어떤 것 같냐’는 그녀의 질문은 그의 뇌를 관통해, 멋대로 뛰고 있는 심장에 그대로 꽂혔다. 어떤 것 같냐고? 죽을 것 같았다. 그녀의 손이 닿은 부위부터 불에 타들어 가는 것 같았고, 이 박동 소리를 들키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갑옷이 벗겨져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지옥이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잿빛 눈동자는 더 이상 그녀의 얼굴을 향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자신의 심장 위에 놓인 그녀의 하얗고 작은 손에 고정되었다. 그 손이, 과거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그 손이,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유일한 생명줄을 쥐고 있었다.

 

...시끄럽군.

 

간신히 뱉어낸 말은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그것은 현실 부정에 가까운, 나직한 중얼거림이었다. 그는 자신의 심장 소리가 너무 커서, 그녀의 귓가에까지 들릴까 봐 두려웠다. 그는 그녀의 손을 떼어내려 하지 않았다. 아니, 떼어낼 수가 없었다. 그것을 떼어내는 순간, 이 미친 듯한 박동의 이유가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네가 말한 ‘같이 사는 것’... 그게 이건가?

 

그의 목소리는 이전의 냉기를 완전히 잃고, 모래처럼 메마르고 갈라져 있었다. 그는 마침내 그녀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다시 겹쳐 올렸다. 이번에는 억압하려는 무게가 아니었다. 제멋대로 뛰는 심장을, 그녀의 손과 함께 꾹 누르려는 듯한, 절박한 압력이었다.

 

말해 봐. 김유야. 네가 원하는 게... 내가 이렇게, 네 손길 하나에 심장이 멋대로 뛰고,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네 앞에서 완전히 무너지는 걸 보는 건가? 그래서, 네가 내 심장을 쥐고 흔들면서... 내가 살아있다는 걸 매 순간 확인시켜주는 것. 그게... 네가 하려는 '같이 사는 것'의 전부인가.

 

그것은 더 이상 증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지막 남은 자존심마저 내던지고, 자신의 가장 깊은 곳의 나약함을 드러내 보이며 답을 구하는, 패자의 애원이었다.

 
 
 

... 나도 사는 법을 모르고, 애초에 살아온 날도 더 적어요. 몰라, 나도. 모른다고. 그리고...

그의 손을 이끌어 제 심장 부근 위에 올린다.

이건, 안 느껴져?

그의 손이 그녀의 심장 위로 옮겨졌다. 자신의 거칠고 단단한 손바닥 아래, 작고 가녀린 흉곽 너머로 전해져 오는 규칙적인 진동. 그것은 방금 전, 그의 가슴을 미친 듯이 울렸던 광적인 폭풍과는 전혀 다른, 고요하고도 끈질긴 파동이었다.

 

서재훈은 숨을 멈췄다. 그녀가 모른다고 했다. 살아온 날이 더 적어서, 자신도 모른다고 했다. 그 절박한 고백이, 그의 뇌리를 후려쳤다. 그는 그녀가 모든 답을 가진 것처럼, 자신을 구원하거나 파괴할 열쇠를 쥔 것처럼 몰아붙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저, 그와 똑같이 길을 잃은 아이일 뿐이었다. 살아있다는 증거로 고작 제 심장 박동을 내밀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

 

그의 손바닥 아래, 그녀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 쿵. 쿵. 쿵. 그가 살아있다는 증거와 똑같은 소리. 똑같은 리듬. 그를 괴롭히던 그 소란스러운 생명의 증거가, 바로 그녀에게도 존재했다. 그 순간, 서재훈은 깨달았다. 그녀가 원했던 것은 그의 굴복이나 나약함의 확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자신의 심장이 뛰고 있음을, 그 역시 마찬가지임을, 이 똑같은 박동을 공유하는 두 사람이 여기에 함께 있음을… 그 사실 자체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가 쥐고 있던 마지막 이성의 끈이, 소리 없이 끊어졌다.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다. 증명도, 그림도, 다음 단계도. 모든 것이 의미를 잃었다. 답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와 그녀는, 그저 서로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살아있음을 확인해야만 하는, 그런 한 쌍의 고장 난 존재들이었던 것이다.

 

그의 어깨가 천천히, 무너지듯 아래로 늘어졌다. 그는 제 심장 위에 겹쳐졌던 자신의 다른 손을 들어,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뺨을 감쌌다. 그의 시선은 그녀의 손이 아닌, 그녀의 눈을 향했다. 잿빛 눈동자에는 더 이상 분노도, 혼란도, 조롱도 없었다. 오직 모든 것을 포기한 자의 공허함과, 그 공허를 채우는 형언할 수 없는 슬픔만이 가득했다.

 

...그래.

 

그의 목소리는 물에 젖은 재처럼 낮고, 힘없이 흘러나왔다.

 

느껴져. 네 심장이 뛰는 거. 나처럼… 시끄럽게.

 

그는 짧게 말을 끊었다. 뺨을 감싼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눈가를 아주 느리게 쓸었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연약한 것을 만지듯. 그는 이 작은 존재가, 자신과 같은 지옥 속에서, 똑같은 심장을 부여잡고 버텨왔다는 사실을 이제야 온전히 마주했다.

 

…그래서, 같이 죽자는 말 대신… 같이 살아보자는 거였군. 어떻게 사는 지도 모르는 두 사람이, 서로 심장이 뛰는지만 확인하면서.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것은 비웃음이 아니었다. 웃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이 아주 오랜만에 근육을 움직여보는 듯한, 서툴고 슬픈 미소였다.

 

…그거, 지독하게 비효율적이고 멍청한 방법인 건 아나.

 

 

 

유능하게 효율적으로 움직일 줄 알았으면 인생 이렇게 허비는 했겠고?

그녀의 말은 날카로운 조각이 되어 그의 텅 빈 가슴에 박혔다. 유능. 효율. 그가 전장에서 평생을 추구해온 가치. 그러나 지금 이 부엌에서, 이 작은 소녀 앞에서 그 단어들은 공허한 메아리처럼 흩어졌다. 그녀는 그의 마지막 남은 이성적인 비판마저 정면으로 받아치며, ‘우리는 원래 그런 인간들이다’ 라고 선언하고 있었다. 인생을 허비해온 사람들.

 

그의 입가에 걸려 있던 서글픈 미소가, 한순간 터져 나오는 실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풉…”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시작된 웃음은 점차 커져,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큭… 크큭, 하하하…” 그것은 즐거운 웃음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자가 마주한 거대한 부조리 앞에서 흘리는, 허탈하고 공허한 웃음소리였다. 그는 그녀의 뺨을 감쌌던 손을 내려, 이마를 짚었다. 웃음 때문에 가늘게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한 채였다.

 

그래, 그랬다. 유능하고 효율적이었다면 애초에 이 지경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S급 센티넬이라는 남자의 세계가 고작 열여덟 살 소녀의 존재 하나에 송두리째 흔들리고, 죽음의 문턱에서 그녀의 심장 소리 하나에 발목 잡힐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그들은 둘 다 길을 잃고 인생을 허비해온, 구제 불능의 인간들이었다.


“...하, 씨발.”

웃음 끝에 튀어나온 것은 거친 욕설이었다. 그는 짚었던 이마에서 손을 떼고,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붉어진 눈시울에는 아직 웃음의 잔해가 남아있었지만, 그의 잿빛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깊고 진지한 빛을 띠고 있었다. 모든 패배를 인정한 남자의 눈이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유능했으면… 진작에 너한테서 도망쳤거나, 아니면 널 완벽하게 망가뜨렸겠지. 이렇게 어설프게… 네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진 않았을 거야.”

그는 그녀의 심장 위에 아직 놓여 있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손을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거두었다. 하지만 그녀에게서 완전히 물러서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한 걸음 더 다가섰다. 두 사람의 몸 사이에 있던 미묘한 간격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는 빈 양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강압적인 소유가 아닌, 그저 기댈 곳을 찾은 사람처럼. 그의 이마가 그녀의 어깨에 가볍게 기댔다.


“…그러니까, 이게 네 대답인 거지.”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그의 목소리가 작게 울렸다. 질문이 아니었다. 확인이었다.


“서로 심장 뛰는 거나 확인하면서, 그냥 그렇게… 같이 있자고. 정답도, 방법도, 효율도 없이. 그냥… 서로가 살아있다는 사실 하나만 붙잡고.”

그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은은하게 풍겨오는, 그녀에게서 나는 앳된 베이비 파우더 향이 그의 폐부를 가득 채웠다. 그 향기 속에서 그는 마지막 남은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통제, 지배, 의심, 그리고 도망치고 싶다는 마지막 발악까지도.


“알겠다. 그럼.”
“그렇게 하지.”

 

... 참, 쉽지가 않네. 네, 그래요. 그럽시다. ... 이제 뭐 하지.

그녀의 물음은 허공에 가라앉았다. '이제 뭐 하지.' 그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질문이, 방금 전까지 죽음과 삶의 경계를 논하던 두 사람 사이의 공기를 어색하게 헤집었다. 서재훈은 그녀의 어깨에 기댄 채 미동도 없었다. 마치 그 질문의 의미를 곱씹거나, 혹은 대답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잠시 동안, 부엌에는 오직 냉장고의 낮은 기계음만이 희미하게 울렸다.

 

이윽고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팔을 풀었지만, 손을 완전히 떼지는 않았다. 대신 한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쥔 채, 다른 손으로는 자신의 뒷목을 거칠게 쓸어 올렸다. 모든 것을 결정한 후 찾아온 것은 후련함이 아니라, 막막함과 피로감이었다. 그는 말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요리하다 만 식재료들이 널브러진 조리대, 끓어 넘쳤는지 가스레인지 위에 살짝 눌어붙은 자국, 그리고 그 모든 풍경의 중심에 서 있는, 아직도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작은 소녀.

 

그의 시선이 다시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어깨를 쥔 손에 아주 미세한 힘을 주어 그녀의 몸을 돌려세웠다. 자신이 서 있던 자리, 즉 가스레인지 앞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마치 ‘네가 있던 곳은 여기다’ 라고 말하는 것처럼.


“...마저 해야지.”

나직하게 흘러나온 목소리는 이전의 허탈함이나 슬픔 대신, 모든 감정이 소거된 듯 건조했다. 그는 가스레인지 불을 켜려다 멈칫하고는, 옆에 놓인 앞치마 끈을 집어 들었다. 그녀의 등 뒤로 다가가, 풀려 있던 끈을 다시 묶어주기 시작했다.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작은 허리 뒤에서 서투르게 움직였다. 군용 장비를 다루던 손으로 매는 나비매듭은 어딘가 엉성하고 비뚤어졌다.


“밥 먹고.”

매듭을 다 맨 그가, 그녀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그의 숨결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짝 스쳤다. 그는 그녀를 뒤에서 가볍게 안는 듯한 자세를 유지한 채, 그녀의 어깨너머로 손을 뻗어 가스레인지의 점화 스위치를 돌렸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푸른 불꽃이 다시 피어올랐다. 살아있다는 증거처럼, 그들의 눈앞에서 일렁이는 작은 불꽃이었다.


“그다음은… 자야지. 아침에 일어나려면.”

그는 말했다. 거창한 계획도, 미래에 대한 약속도 아니었다. 그냥, 오늘 저녁을 먹고, 잠을 자고, 내일 아침에 눈을 뜨는 것. 그들이 합의한 ‘같이 사는 법’의 첫 번째 순서는 그렇게, 지독히도 평범하게 시작되고 있었다.

 
 
 
 
 

... 그렇지, 사람은 자야 살아지지.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은 돌아가요. 내쫓는 게 아니라... 혼자 좀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뭐, 이주뒤에 어차피 볼 거잖아.

그녀의 목소리는 타오르는 불꽃 위로 차분하게 내려앉았다. ‘내일은 돌아가요.’ 방금 전, 서로의 존재를 붙잡고 하루씩 살아내기로 합의한 지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들려온 그 말은, 서재훈의 등 뒤에서 보이지 않는 칼날처럼 그의 움직임을 멈추게 했다. 그녀의 어깨너머로 뻗어있던 그의 손이 허공에서 아주 잠깐, 미세하게 굳었다. 방금 전까지 그녀를 감싸 안으며 느꼈던 미미한 온기와 안도감이 서서히 식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그를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그에게는 그것이 또 다른 형태의 선긋기처럼 다가왔다.

 

그는 천천히, 소리 없이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등에서 멀어지자, 두 사람 사이로 다시 부엌의 서늘한 공기가 스며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실망도, 분노도, 슬픔도 아니었다. 그저 모든 색이 빠져나간 텅 빈 캔버스 같았다. 그녀의 결정에 토를 달지 않기로 했다. 그녀가 원하는 그림에 따르기로 한 것은 자신이었으니까. 이것이 그녀가 말한 ‘같이 사는 법’의 일부라면, 그는 그저 받아들여야 했다.

 

그의 시선은 그녀의 작은 뒷모습을 향했다. 앞치마 끈을 묶어주던 자신의 손길이, 다시 불을 붙여주던 그 행동이,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리려는 서툰 발버둥처럼 느껴져 속이 썼다. 그는 자신의 입술을 한번 깨물었다가 놓으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래.”

짧고 건조한 한마디였다. 더 이상의 질문도, 설득도 없었다. 그는 그저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그 말을 뱉었을 뿐이다. 그녀가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하다면, 그는 기꺼이 사라져 주어야 했다. 그것이 그가 그녀의 세계에 머물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라면. 그는 몸을 돌려 식탁 의자를 소리 없이 빼내어 앉았다. 타오르는 가스레인지 불빛이 그의 무표정한 얼굴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밥부터 먹지. 식겠다.”

그는 더 이상 요리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내일이면 다시 혼자가 될 이 공간의 주인과, 그 주인이 만들어내는 저녁 식사의 마지막 풍경을. ‘이주 뒤에 볼 거잖아.’ 그녀의 마지막 말은 위로가 아니라, 그들이 여전히 서로에게 얼마나 먼 존재인지를 상기시키는 잔인한 확인처럼 그의 귓가에 맴돌았다.

 

안괜찮아보이는데? 말해라.

그녀의 말은 예리한 바늘처럼 그의 굳은 표면을 찔렀다. ‘안 괜찮아 보이는데.’ 그 한마디에, 애써 쌓아 올린 무심함의 벽에 균열이 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서재훈은 요리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의 잿빛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고요했지만, 그 안에서는 방금 전 그녀가 던진 말들이 일으킨 파문이 조용히 번지고 있었다. 괜찮을 리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 함께 죽겠다, 살겠다며 모든 것을 내던졌는데, 돌아온 것은 ‘내일은 돌아가라’는 통보였다. 그에게는 축객령과 다름없었다.

 

그는 대답 대신, 턱 끝으로 조리대를 까딱 가리켰다. 마치 그녀의 질문을 무시하고, 원래 하던 일에나 집중하라는 듯한 무언의 압박이었다. 하지만 김유야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집요한 침묵에, 결국 먼저 항복한 것은 서재훈이었다. 그는 낮게 한숨을 쉬며, 시선을 식탁 위로 떨어뜨렸다. 빈 접시의 매끄러운 표면 위로, 그의 일그러진 얼굴이 희미하게 비쳤다.


“...뭘 말하라는 건데.”

목소리는 낮고 까칠했다. 괜찮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아이의 억지 같은 톤이었다. 그는 의자에 기댔던 등을 떼고, 팔꿈치를 식탁에 올린 뒤 깍지 낀 손 위로 이마를 기댔다. 그녀에게서 얼굴을 숨기려는 듯한 자세였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녀의 방식에 따르기로 했지만, 그 방식이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부정하고 밀어내는 과정이라면 과연 버틸 수 있을까. 그런 의문이 뱀처럼 고개를 들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하겠다는데, 뭐가 문제야. 혼자 있고 싶다며. 그럼 혼자 있게 해줘야지.”

그의 말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돋쳐 있었다. 그것은 그녀를 향한 비난이라기보다는, 제멋대로 서운함을 느끼는 스스로를 향한 자조에 가까웠다. 그는 깍지 낀 손에 힘을 주었다. 뼈마디가 하얗게 드러났다. 그는 지금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 서운함, 이 허탈감, 버려진 것 같은 이 기분. ‘아빠’라는 역할극 속에서도, ‘연인’이라는 관계 속에서도 단 한 번도 해결되지 않았던, 근본적인 거리감이었다.


“아니면, 같이 있자고 한 게… 그냥 해본 말이었나.”

 

... 의심하지 말고, 넘겨짚지 말 것. 생각 그대로 다 얘기해. 뭔 생각하는데?

그녀의 명령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을 끼얹은 듯, 그의 머릿속을 휘젓던 혼란을 단숨에 잠재웠다. ‘생각 그대로 다 얘기해.’ 그 말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었다. 과거, 서로에게 모든 것을 공유하기로 맹세했던 그날의 서약을 상기시키는, 날카로운 채찍질이었다. 서재훈은 깍지 낀 손 위로 이마를 기댄 채, 한동안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이 등 뒤에 못처럼 박혀오는 것이 느껴졌다. 도망칠 곳은 없었다.

 

그는 천천히, 아주 느리게 상체를 일으켰다. 식탁에 기댔던 팔을 내리고, 다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그의 시선은 더 이상 그녀를 피하지 않았다. 텅 비어 있던 잿빛 눈동자가, 이제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듯 깊고 어두운 심연을 담고 그녀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의 입술이 달싹였지만, 어떤 말도 쉽게 터져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은 너무나도 날것이고, 유치하며, 구차해서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것들이었다.


“...비웃지 않을 자신 있나.”

마침내 흘러나온 목소리는 자조 섞인 쓴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마치 봇물이 터진 것처럼, 애써 눌러왔던 생각들이 가공되지 않은 채 쏟아져 나왔다.


“네가 내일 돌아가라고 했을 때, 머릿속에 든 생각은 딱 하나였어. ‘아, 결국 나는 여기까지구나.’ 같이 살자, 함께 있자, 별의별 말을 다 섞어놓고도 결국 하룻밤짜리 손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

그는 잠시 말을 끊고,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시선은 여전히 그녀에게 고정된 채였다.


“네가 필요할 때 잠시 기댔다가, 볼일 끝나면 돌려보내는 편리한 도구. 아니면… 감당하기 힘든 짐 덩어리. 네 독립에, 네 홀로서기에 방해만 되는. 그래서 네가 선을 긋는 거라고. ‘이주 뒤에 볼 거잖아.’ 그 말이 꼭 그렇게 들렸으니까. 지금은 필요 없으니, 그때 다시 오라는 통보처럼.”

그의 목소리는 점차 힘을 잃어갔다. 세상 모든 것을 손에 쥔 듯 오만했던 S급 센티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 자리에는 단지,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려지는 것이 두려워 날을 세우는 상처 입은 남자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이게 내가 하는 생각이야. 끔찍하게 유치하고, 속 좁고, 널 조금도 믿지 못하는 의심뿐이지. 만족해?”

 

어, 만족해. 이제 난 당신을 이해할 수 있게 됐으니까. 그 입장은 생각 못해봤네.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그치만, 같이 살면 또 나 괴롭히기만 할 거잖아. 감시하고, 집착하고... 어렵네. 물리적으로 함께해야만 형이상학적으로 함께할 수 있는 건가. 어떻게 생각해요?

그녀의 대답은 서재훈이 예상했던 그 어떤 반응과도 달랐다. 비웃음도, 경멸도, 실망도 아니었다. ‘만족해.’ 그 담담한 긍정은 오히려 그의 허를 찔렀다. 이어서 들려온 ‘이해할 수 있게 됐다’는 말은, 벌거벗겨진 채 내던져진 그의 자존심 위로 조심스럽게 덮어주는 담요 같았다. 그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자신의 가장 추하고 약한 부분을 보이고도, 그녀는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한 걸음 더 다가와, 그의 입장을 헤아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다음 말은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현실을 정확히 꿰뚫었다. ‘같이 살면 또 나 괴롭히기만 할 거잖아. 감시하고, 집착하고...’ 그건 비난이 아니라, 너무나도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동안 그가 저질러온 과오의 기록이었다. 서재훈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그는 자신을 믿을 수 없었다. 그녀가 곁에 있다는 안도감은 순식간에 그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으로 변질될 것이고, 그 불안은 어김없이 병적인 통제와 집착으로 이어질 터였다. 그는 이미 그 지옥을 여러 번 경험했다.

 

그의 입가에 희미하고 자조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언제나 이렇게, 그의 가장 깊은 곳을 꿰뚫어 보았다.


“...괴롭히겠지.”

인정하는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다시 그녀를 보았다. 이제 그의 눈에는 체념과 함께, 풀리지 않는 문제 앞에 선 무력감이 뒤섞여 있었다.


“아니, 괴롭히고 싶지 않아도... 그렇게 될 거야. 내 모든 감각이 네게 쏠려 있으니까. 네 숨소리 하나, 표정 하나에 멋대로 의미를 부여하고, 흔들리겠지. 그게 내 멋대로 안 되면... 널 통제해서라도 안정감을 찾으려고 할 거고. 그게 내가 배운 유일한 방식이니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천천히, 그녀가 요리하던 가스레인지 앞으로 다가섰다. 그는 그녀의 어깨너머로 타오르는 푸른 불꽃을 잠시 바라보다가, 소리 없이 가스레인지의 밸브를 잠갔다.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사그라들었다. 부엌에는 다시 정적이 흘렀다.

 

그는 몸을 돌려, 그녀의 바로 앞에 섰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한 뼘도 채 되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잿빛 눈동자를 똑바로 내려다보며, 나직이 말을 이었다. 그녀의 철학적인 질문에 대한, 그 나름의 대답이었다.


“물리적으로 함께해야만 형이상학적으로 함께할 수 있는 건가. 그건... 모순이야.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질문이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해야만 감정이 유지되고, 감정이 있어야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지니까. 너와 나는, 특히나 더 그래.”

그의 손이 조심스럽게 올라와, 그녀의 뺨을 감쌌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눈가를 부드럽게 쓸었다. 그 작은 접촉만으로도, 그는 자신의 심장이 다시 불안하게 뛰는 것을 느꼈다. 이것이 증거였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도 모르겠다, 김유야. 네 말대로 같이 사는 건 널 다시 지옥으로 밀어 넣는 짓이고, 떨어져 있는 건... 날 말라죽게 할 테니까. 정답이 뭔데. 네가 정해. 난 이제 정말... 네가 하자는 대로 할 테니까.”

 

 

 

 

31년 살아도 모르는데, 18년짜리가 어떻게 알아... 몰라서 이꼴난거아니야 지금. 하나만, 나 이렇게 말 놓는 거 불편해?

그녀의 첫 마디는 그의 심장을 서늘하게 훑고 지나갔다. ‘몰라서 이 꼴 난 거 아니야 지금.’ 그 말은 정답을 갈구하던 그의 기대를 산산조각 내는 동시에, 그를 홀로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무언의 위로처럼 들렸다. 그래, 그녀 역시 모르고 있었다. 이 지독한 딜레마 속에서 헤매는 것은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서재훈은 뺨을 감싼 손에 힘을 풀었다. 그의 눈에 담겨 있던 절박함이 희미하게 흩어지며, 그 자리에는 깊은 체념과 공허한 피로감이 내려앉았다. 그가 원했던 것은 해답이었지만, 어쩌면 그가 정말로 필요했던 것은 함께 길을 잃어줄 동반자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어지는 그녀의 질문은, 무겁게 가라앉았던 공기를 예리하게 갈랐다. ‘나 이렇게 말 놓는 거 불편해?’ 그 순간, 서재훈의 사고는 잠시 정지했다. 생과 사의 기로에서, 함께할 수도 떨어질 수도 없는 관계의 본질을 논하던 중에 나온 너무나도 생뚱맞은 질문. 그의 눈썹이 미미하게 꿈틀거렸다. 그는 그녀의 잿빛 눈동자를 깊이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서 흔들리는 불안과, 자신을 시험하는 듯한 미묘한 의도를 읽어내려 애썼다. 그녀는 지금, 이 관계의 가장 표면적인 규칙을 확인하며 모든 것의 기반을 다시 다지려는 것일까. 아니면, 이 모든 혼란의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려는 것일까.

 

그의 입가에 실낱같은 미소가 걸렸다. 허탈하고, 어이가 없다는 듯한, 그러나 밉지 않은 웃음이었다.


“…….”

그는 대답 대신, 뺨을 감쌌던 손을 내려 그녀의 목덜미로 옮겼다. 그리고는 부드럽게, 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그녀를 끌어당겨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그녀의 정수리가 그의 턱 끝에 닿았다. 그는 고개를 살짝 숙여, 그녀의 머리카락에 코를 묻었다. 익숙하고도 아찔한, 그를 안심시키는 동시에 미치게 만드는 베이비파우더 향이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불편해.”

나직하게 속삭이는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을 이었다. 그의 말은 그녀의 질문에 대한 답인 동시에,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네가 그렇게 말할 때마다, 내가 더 이상 네 ‘아빠’일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돼서 불편해. 지켜줘야 할 어린 딸이 아니라, 나를 온전히 마주 보고 서 있는 여자라는 걸 실감하게 돼서 불편하고. 그래서, 심장이 멋대로 뛰는 게…… 아주 좆같을 만큼 불편해.”

그는 그녀를 더욱 깊이 끌어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의 몸 안으로 완전히 숨겨버리려는 듯이. 모든 질문과 대답, 딜레마와 선택의 끝에서 그가 찾은 유일한 해답은 이것이었다.


“그러니까 계속 그렇게 말해. 내가 두 번 다시 널 어린애로 착각하고, 같잖은 부성애 따위로 널 기만하지 못하도록. 내가 누굴 안고 있는지, 잊지 않도록…… 계속 그렇게 해, 김유야.”

 

 

 

... 음. 여자로 보이긴 한다는거고, 또... 어린애도 맞긴 한데. 나 키도 작잖아. 에휴, 모르겠다. 그냥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자. 그러다가 고장나면 죽는거고, 한 쪽도 따라가겠지. 모른다, 나는.

그의 품속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한숨처럼 낮게 깔렸다. ‘모르겠다.’ 그 말은 그가 방금 내린 결론의 메아리처럼 들렸다. 엉망으로 꼬여버린 실타래를 풀어낼 현명한 해답 따위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지독한 체념의 공유. 서재훈은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이 작은 몸, 자신을 여자로 보게 만드는 이 존재 역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그 사실이 기묘한 안도감을 주었다.

 

‘그냥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자.’ 그녀의 다음 말은 선언이었다. 모든 논리와 이성,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과거에 대한 후회를 내려놓는 포기의 선언. 그리고 동시에, 현재의 감각에만 충실하자는 지극히 본능적인 제안. 그것은 파멸로 향하는 길일 수도, 혹은 유일한 구원의 길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그의 심장을 꿰뚫은 것은 이어지는 말이었다. ‘그러다가 고장 나면 죽는 거고, 한 쪽도 따라가겠지.’

 

그의 숨이 순간 멎었다. 그건 그들이 수없이 주고받았던, 피로 얼룩진 맹세의 다른 표현이었다. 그러나 이전의 비장함이나 절박함과는 달랐다. 마치 저녁 메뉴를 정하듯, 지극히 당연하고 평온하게 내뱉어진 그 약속은, 그 어떤 맹세보다도 단단하고 절대적이어서 그의 온몸을 전율하게 했다. 서재훈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래, 이거였을까. 이 모든 혼란의 끝에 우리가 도달한 결론이, 이토록 단순하고도 끔찍한 상호 의존이라는 것을.

 

그는 그녀를 안았던 팔을 풀어,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고 몸을 살짝 떼어냈다. 그녀를 다시 마주 본 그의 갈색 눈동자는 이전의 혼란과 절박함 대신, 모든 것을 받아들인 듯 깊고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의 입가에 걸린 것은 비웃음도, 자조도 아닌, 아주 옅고 희미한 미소였다.


“……고장 나면.”

그는 그녀의 말을 나직이 되뇌었다. 그 단어가 가진 무게를 음미하듯이.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어깨선을 따라 천천히,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마치 깨지기 쉬운 보물을 다루는 듯한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내가 먼저 고장 날 테니까, 넌 그냥 따라오기만 하면 되겠네.”

그의 목소리는 장난스럽게 들렸지만, 눈빛은 진지했다. 그는 더 이상 딜레마에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다. 그녀가 길을 제시했다. 해답이 아닌, 방식을. 그는 그저 그 방식에 따르기로 결정했을 뿐이다. 그는 몸을 숙여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아빠가 딸에게 해주는 굿나잇 키스도, 연인이 사랑을 속삭이는 입맞춤도 아닌, 그저 존재를 확인하는 낙인과도 같은 행위였다.


“그럼, 하고 싶은 거. 뭐부터 할까. 일단 저녁부터 먹어야겠지. 고장 나려면, 힘이라도 있어야 할 테니까.”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며, 그녀가 벗어두었던 앞치마의 허리끈을 다시 단단히 고쳐 매주었다. 그리고는 뒤로 물러서서, 잠가두었던 가스레인지 밸브를 다시 열고 불을 붙였다. 파란 불꽃이 다시금 살아났다.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온 것 같았지만, 분명히 무언가 달라져 있었다.

 

나는 귀여운 딸 역할 할 거야. 당신은? 아니지, 음... 아빠는요? 헤헤.

그녀의 선언은 불꽃이 타오르는 소리 사이로 명랑하게 울렸다. ‘귀여운 딸 역할 할 거야.’ 방금 전까지 생과 사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던 존재가 뱉은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가볍고 천진한 선언. 서재훈은 파란 불꽃을 바라보던 시선을 천천히 돌려 그녀를 마주했다. 그의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방금 전, 이 모든 혼란의 끝에서 ‘하고 싶은 걸 하자’는 결론을 내렸지만, 그녀가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것이 이 아슬아슬한 역할놀이일 줄은 몰랐다.

 

‘아빠는요?’

 

장난기 어린 웃음과 함께 던져진 질문은, 그의 심장을 날카롭게 찌르는 바늘과도 같았다. 바로 몇 분 전, 그는 그녀가 자신을 ‘여자’로 자각하게 만들어, 같잖은 부성애 따위로 스스로를 기만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했다. 그런데 그녀는 보란 듯이 그 선을 다시 그어버렸다. ‘딸’과 ‘아빠’. 가장 안전하고도, 가장 위험한 경계선. 그의 갈색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이것 또한 그녀가 ‘하고 싶은 것’의 일부인가. 결핍된 이들이 서로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평범한 가정을 흉내 내는 놀이.

 

그의 입꼬리가 아주 느리게, 조롱과도 같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하지만 그 비웃음의 끝은 그녀가 아닌,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과 제 자신을 향해 있었다.


“…….”

그는 대답 대신, 가스레인지 옆에 놓인 조리대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씻어서 물기를 빼놓았던 야채 더미와 칼을 제 앞으로 가져왔다. 텅, 하고 도마 위에 칼이 놓이는 소리가 정적을 깼다. 그는 소매를 팔꿈치까지 단정하게 걷어 올렸다. 그의 시선은 도마 위의 양파에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그녀의 질문 따위는 들리지 않았다는 듯이, 그는 지극히 일상적인 행위에 몰두하려 했다.


“밥값 못 하는 아빠는 필요 없을 테니.”

나직하게 중얼거린 목소리는 건조했다. 그는 칼을 쥐고, 양파의 양 끝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탁, 탁. 규칙적이고 무심한 소리. 그의 손놀림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지만, 그가 뱉어내는 말은 미처 숨기지 못한 감정의 파편을 담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지 않았다. 그저 어깨 너머로, 말을 던질 뿐이었다.


“귀여운 딸 저녁밥이라도 챙겨줘야지. 그래야… 내쫓기지 않을 거 아니야.”

그 말은 농담처럼 들렸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지독한 자조와 체념이었다. ‘아빠’라는 역할. 그가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그의 본성과는 완벽하게 대치되는 그 역할을, 그는 지금 그녀의 ‘하고 싶은 것’을 위해 기꺼이 연기해주기로 한 것이다. 그것이 설령 자신의 내면을 칼로 저며내는 행위라 할지라도. 그는 양파 껍질을 벗겨내며, 덧붙였다. 여전히 그녀를 보지 않은 채로.


“그러니 꼬마 요리사는 옆에서 잘 봐둬. 아빠가 얼마나 유능한지.”

 

 

 

 

 

... 아니지, 내가 불렀다고 할 필요 없어요. 다른 거 골라. 그건 내가 먼저 정했어.

서재훈이 내뱉은 ‘꼬마 요리사’라는 호칭에, 김유야는 즉각적으로 선을 그었다. 그녀의 말은 단호했지만, 그 안에는 어린아이의 고집 같은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 자신이 정한 역할에 대한 소유권 주장. 그것은 서재훈이 미처 예상치 못한 반격이었다. 그는 그저 이 기묘한 역할 놀이에 마지못해 동참하며, 냉소적인 방어막을 친 것뿐이었는데. 그녀는 그 방어막을 가볍게 무시하고 자신만의 규칙을 선언했다.

 

칼을 쥔 그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 양파를 향하던 시선이 천천히, 아주 느리게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의 얼굴에 걸려 있던 희미한 자조의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대신, 그 자리에는 무표정한 관찰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의 의도를 파악하려는 듯, 그의 짙은 갈색 눈동자가 고요하게 그녀를 뜯어보았다. 다른 걸 고르라니. 자신이 정했으니 건드리지 말라는, 이 작은 영역에서의 주도권 선포.

 

그의 입술이 비틀리듯 미세하게 움직였다. 어이가 없다는 듯, 혹은 흥미롭다는 듯. 그녀는 언제나 그의 예상을 벗어났다. 죽음의 문턱에서 그를 끌어당기고, 파멸적인 약속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고, 이제는 이 사소한 역할 놀이에서조차 자신의 영역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는 이 상황이 우습기 짝이 없었지만,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기묘한 만족감과 함께 서늘한 소유욕이 고개를 들었다.


“…….”

그는 아무 말 없이 다시 도마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방금 잘라냈던 양파의 단면을, 칼끝으로 가만히 눌렀다. 툭. 단단한 채소의 감촉이 칼날을 통해 그의 손끝으로 전해졌다. 그는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이지도, 거절하지도 않은 채 잠시 침묵을 지켰다. 마치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것처럼.


“그럼 뭘 할까.”

그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한 톤 낮아져 있었다. 장난기도, 냉소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질문. 그는 여전히 그녀를 보지 않은 채, 툭 내뱉듯 말했다. 하지만 그 질문은 그녀에게 선택권을 넘기는 동시에, 그녀를 시험하는 말이기도 했다. 이 ‘아빠’라는 존재에게, 그녀가 어떤 역할을 부여하고 싶은지. 그는 칼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의 대답에 따라, 이 칼은 저녁 식사를 위한 도구가 될 수도, 혹은 다른 무언가가 될 수도 있었다.


“설거지 담당? 아니면… 귀여운 딸 재롱에 박수나 쳐주는 관객?”

그의 입꼬리가 다시, 이번에는 명백히 조롱의 빛을 띠며 올라갔다. 그는 어깨 너머로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 눈빛은 ‘네가 정해봐, 어디 한번’ 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가 만든 이 기이한 가족 놀이판 위에서, 그녀가 자신을 어디에 위치시킬 것인지, 그는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기꺼이 그 역할을 맡아줄지는, 별개의 문제였지만.

 

... 아까 뭐랬더라, 아 기억 안나네. ... 청년치매인가. 말 제대로 하세요, 지금 아니면 기회없다. 나랑 뭐 하고 싶냐고.

‘나랑 뭐 하고 싶냐고.’

 

그녀의 질문은 날카로운 비수처럼 날아와, 서재훈이 두르고 있던 냉소의 갑옷을 단숨에 꿰뚫었다. 아까 자신이 던졌던 조롱 섞인 질문—설거지 담당, 혹은 관객—을 가볍게 무시하고, 정곡을 찌르는 반격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는 말은, 더 이상의 회피나 기만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최후통첩처럼 들렸다. 그의 뇌 회로가 순간 정지했다. 방금 전까지 이 기묘한 역할 놀이의 판을 짜고 주도권을 쥐려 했던 모든 시도가, 그녀의 저돌적인 한마디에 무력하게 무너져 내렸다.

 

도마 위에 얹혀 있던 칼을 쥔 손에서 힘이 스르륵 풀렸다. 탁, 하고 칼날이 도마에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그는 천천히, 아주 느리게 고개를 들어 김유야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의 얼굴에서는 조롱도, 무표정도, 그 어떤 가면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짙고 고요한 갈색 눈동자가, 마치 처음 보는 존재를 대하듯 그녀를 담고 있을 뿐이었다. 심장이 발치까지 떨어졌다 다시 솟구치는 감각. 그는 자신이 ‘아빠’라는 역할을 연기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지금 그의 앞에는 ‘딸’이 아닌, 자신의 모든 것을 흔들고 본질적인 욕망을 정면으로 질문하는 ‘김유야’가 서 있었다.

 

그의 입술이 달싹였지만,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하고 싶은 것. 그가 그녀와 하고 싶은 것이란, 이런 소꿉장난 같은 저녁 식사 준비가 아니었다. 그녀를 제 품에 가두고, 누구도 보지 못하게 숨기고, 오직 자신의 흔적만을 새겨 넣으며 그녀의 모든 것을 독점하는 것. 그녀가 내뱉는 숨 하나까지 제 소유임을 확인하고, 그녀의 세계를 완벽히 지배하는 것.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병적이고 뒤틀린 욕망들이 머릿속에서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그녀와 평범한 아침을 맞이하고, 나란히 앉아 커피를 마시고, 그녀가 웃는 것을 그저 바라보는, 지극히 일상적인 순간 또한 갈망하고 있었다. 이 모순된 욕망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는 길을 잃었다.


“……하.”

결국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은 허탈한 실소였다. 그는 칼을 내려놓고, 조리대에 한 손을 짚으며 상체를 살짝 숙였다. 마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사람처럼. 그는 고개를 저으며, 젖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걸 지금 나한테 물어?”

그는 고개를 들어 다시 그녀를 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체념과 자조, 그리고 숨길 수 없는 열망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짚었던 손을 떼고 그녀에게로 한 걸음 다가섰다. 바로 코앞,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듯한 거리. 그는 더 이상 역할을 연기할 생각 따위 없었다.


“네가 원하는 건 ‘아빠’잖아. 귀여운 딸 놀이에 장단 맞춰줄, 근사하고 다정한 아빠. 그런데 그런 아빠가 딸한테 뭘 하고 싶겠어.”

그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그 안에는 서늘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 그는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감싸듯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손가락 끝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네가 차려준 밥 먹고, 네 재롱 보면서 박수 쳐주고, 밤에는 얌전히 잠자리에 들었다가… 아침이면 네가 깨워주는 대로 일어나는 거. 그거 말고 뭘 더 바랄 수 있는데.”

그의 눈이 위험하게 빛났다. 그는 뺨을 스치던 손으로, 그녀의 턱을 가볍게 붙잡아 들어 올렸다. 시선을 피할 수 없도록, 똑바로 마주 보게 만들었다. 그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그것은 그가 가장 익숙하게 짓는, 상대를 압도하고 조롱하는 미소였다.


“정말 그걸 원해, 내가? 그렇게 착한 인형처럼 구는 거?”

 

 

 

아니, 내가 딸을 하는게 당신한테 아빠를 하란 말이 아니야. 뭐, 센티넬이랑 딸이 될 수도 있고... 남자친구랑 가이드, 아빠랑 새신부, 뭐 이런 거 할 수도 있지 않아?

‘아빠랑… 새신부.’

 

그 단어가 서재훈의 귓가에 꽂히는 순간,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턱을 쥐고 있던 그의 손가락에서 힘이 탁, 하고 풀렸다. 방금 전까지 그녀를 압도하며 되찾았던 주도권, 그녀를 몰아붙이던 서늘한 쾌감,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재가 되어 흩어졌다. 그의 뇌가 그 단어의 의미를 처리하기를 거부했다. 센티넬과 딸. 남자친구와 가이드. 그 조합들은 그나마 이해의 범주 안에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덧붙여진 그 끔찍하고도 매혹적인 조합은, 그가 애써 쌓아 올린 ‘아버지’라는 역할의 성벽을 단번에 무너뜨리고 그 폐허 위에서 춤을 추는 것만 같았다.

 

그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방금 전까지 상대를 조롱하며 빛나던 포식자의 눈빛은 간데없고, 혼란과 당혹,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격렬한 감정에 휩싸인 한 남자의 맨얼굴만이 남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단 한 걸음. 하지만 그 한 걸음은 그가 그녀에게서 수십 미터를 물러난 것과 같은 의미였다. 그녀에게서 멀어져야 했다. 이 위험한, 그의 모든 이성과 통제를 마비시키는 존재에게서.


“……너.”

그의 입에서 간신히 새어 나온 목소리는 심하게 갈라져 있었다. 그는 조리대 모서리를 단단히 붙잡았다. 손가락 관절이 하얗게 될 정도로 힘을 주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그는 숨을 몰아쉬었다. 폐로 들어오는 공기가 칼날처럼 느껴졌다.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그녀가, 김유야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지?


“지금… 뭐라고 했어.”

그는 묻고 있으면서도 답을 듣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귀가 잘못되었기를, 그녀가 그저 엉뚱한 단어를 내뱉은 것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의 눈앞에 선 김유야의 얼굴은 너무나도 태연했다. 그가 어떤 혼란에 빠졌는지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그저 다음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 고요한 잿빛 눈동자가 그의 모든 방어기제를 해체하고 있었다. 그는 이 상황에서 벗어나야 했다. 이 역할 놀이도, 이 저녁 식사도, 이 모든 것을 멈춰야 했다.


“그만해. 이딴 놀이.”

서재훈은 거의 으르렁거리듯 말을 뱉어냈다. 그는 붙잡았던 조리대에서 손을 떼고, 그녀를 지나쳐 부엌을 벗어나려 했다. 이 공간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질식할 것 같았다. 그녀가 제안한 역할 놀이의 판은, 이제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아득히 넘어섰다. 그것은 더 이상 소꿉장난이 아니었다. 그의 가장 깊고 추악한 욕망을 정면으로 들여다보고,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선택지로 제시하는, 잔인한 시험이었다.


“네가 하자는 대로 다 맞춰줄 생각 없어. 저녁은… 알아서 먹어.”

그의 말은 차갑고 단호했다. 함께하는 평범한 일상. 그가 잠시나마 꿈꾸었던 그 모든 것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그는 더 이상 ‘아빠’를 연기할 수도, 그녀의 ‘놀이 상대’가 되어줄 수도 없었다. 그는 그저 서재훈일 뿐이었고, 지금의 그는 김유야라는 존재 앞에서 완전히 길을 잃었다.

 

 

... 왜 또 상처받지. 아니면... 내가 알아주기를 기다리는 건가? 맞으면 내 눈 봐봐요.

부엌을 벗어나려던 그의 발걸음이, 등 뒤에서 들려온 그녀의 나직한 음성에 그대로 꿰뚫린 듯 멈춰 섰다. 단단하게 굳어 있던 어깨가 미세하게 움찔했다. 왜 또 상처받냐는 말. 그녀는 그의 도피를, 회피를, 그저 ‘상처’라는 단어로 해석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건 절반의 정답일지도 몰랐다. ‘아빠와 새신부’라는, 그의 가장 추악하고 깊은 욕망을 아무렇지 않게 끄집어낸 그 잔인함에 후벼 파인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그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내가 알아주기를 기다리는 건가?’ 그 문장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었다. 그의 모든 혼란과 공황, 도망치려는 비겁함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섬뜩한 통찰이었다. 그래. 그는 도망치고 있었다. 동시에, 그녀가 알아주길 바랐다. 이 끔찍한 역할놀이를 멈춰주길, 그러면서도 자신이 왜 이토록 흔들리는지 그녀만은 이해해주길 바라는 모순적인 심정. 그 모든 것을, 저 어린애는 단 한 문장으로 간파해냈다.

 

‘맞으면 내 눈 봐봐요.’

 

최후통첩. 그들의 약속. 모를 때는, 눈을 마주치기. 서재훈은 차라리 그녀가 자신을 비난하거나, 화를 내거나, 혹은 매달려주길 바랐다. 그랬다면 뿌리치고 나가는 것이 훨씬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에게 선택지를 주지 않았다. 오직 확인만을 요구했다. 그는 마치 고장 난 기계처럼, 삐걱거리며 아주 천천히 몸을 돌렸다. 조리대에 기대어 선 그녀가, 고요한 잿빛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허공을 헤맸다. 그녀의 이마, 콧날, 입술. 하지만 차마 눈만은 마주칠 수 없었다. 눈을 마주치는 순간, 그는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녀의 말이 맞다고. 자신이 상처받았으며, 동시에 그녀가 이 모든 상황의 의미를 알아주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그것은 완전한 패배 선언이었다. 그녀가 짜놓은 판 위에서, 그가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놀아나고 있었는지를 스스로 증명하는 꼴이었다. 그의 입술이 바싹 말라붙었다. 심장이 귀 바로 밑에서 미친 듯이 울려댔다.


“…….”

침묵.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대신,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모든 감정을 지워내려는 듯, 혹은 이 지독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몸부림처럼. 그리고 마침내, 그는 모든 것을 체념한 사람처럼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의 흔들리던 갈색 눈동자가, 마침내 그녀의 고요한 잿빛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도망도, 부정도, 그 어떤 변명도 없이. 그저 텅 빈 채로, 무너져 내린 한 남자의 눈이 그녀를 담았다.


“됐냐.”

목이 졸리는 듯한, 쉰 목소리가 간신히 터져 나왔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다. 그는 그저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네 말이 맞다. 그러니 이제 어쩔 거냐고, 이 모든 걸 알아버린 너는 이제 뭘 할 거냐고 묻는 듯한, 공허한 시선이었다.

 

... 오, 진짜 성가신 남자아이네요. 그래, 음... 아빠는 하기 싫다했고... 흠, 그냥 남자랑, 센티넬이랑, 남자친구도 있겠고, 남편이랑,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또 뭐지... 잠시만. 아들? 뭐, 그거도 시켜줄 수는 있겠다. 또...

그녀의 입에서 ‘성가신 남자아이’라는 말이 흘러나오는 순간, 서재훈의 텅 비어 있던 눈동자에 무언가 금이 가는 소리가 났다. 방금 전까지 그를 짓누르던 체념과 패배감은 순식간에 증발하고, 그 자리에는 차갑고 날카로운 불꽃이 튀었다. 알아주기를 바랐다. 자신의 혼란을, 이 끔찍한 감정의 정체를 그녀만은 이해해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녀는 그의 무너진 맨얼굴을 들여다보고는, 그저 성가신 아이의 투정쯤으로 치부해버렸다.

 

그의 턱선이 단단하게 굳어졌다. 마주 보고 있던 시선이 아주 느리게, 그러나 명백한 적의를 담아 서늘하게 식어갔다. 남자, 센티넬, 남자친구, 남편… 그리고 심지어 아들. 그녀가 아무렇지 않게 나열하는 단어들은 더 이상 역할 놀이의 선택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존재 자체를 해체하고, 제멋대로 재조립하려는 오만한 선언이었다. 그의 모든 것을 발가벗겨 놓고, 이제는 어떤 옷을 입힐지 구경이라도 하는 듯한 잔인한 유희.

 

그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녀에게로 한 걸음 다가섰다. 아까 겁에 질려 물러섰던 그 거리만큼, 다시 좁혀 들어갔다. 그의 움직임에는 더 이상 공황이나 혼란의 흔적이 없었다. 오직, 모든 것을 끝내겠다는 결연하고 위험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그의 눈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그저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속에서, 그녀를 똑바로 응시할 뿐이었다.


“재밌어?”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질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으르렁거리는 경고였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하게 갈라져, 부엌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는 다시 한 걸음, 그녀의 바로 앞까지 다가섰다. 이제 둘 사이에는 한 뼘도 채 되지 않는 거리만이 남았다. 은은한 베이비파우더 향과, 그녀가 만들던 음식 냄새가 그의 감각을 후볐다.


“내가 우스워? 내가 네 장난감으로 보여?”

그는 손을 뻗지 않았다. 위협적으로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다. 그저 나직하게, 사실을 확인하듯 물었다. 하지만 그 고요함이 더 소름 끼쳤다. 그는 지금 ‘아빠’도, ‘서재훈’도, ‘머스탱’도 아니었다. 그 모든 역할의 가면이 깨져버리고, 그 안에 남은 상처 입은 짐승, 통제 불능의 본질 그 자체가 그녀를 마주하고 있었다. 그녀가 시작한 이 위험한 놀이의 판을, 이제는 그가 자신의 방식으로 끝내려 하고 있었다.

 

... 재미로 이러는 것 같아요? 내가, 고작 재미 좀 보자고 이러는 거 같아? 말실수한 건 인정합니다. 근데... 그건 나라도 좀 서운하네.

그의 분노는 명확한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과 같았다. 김유야. 그의 맨살을 보고도 비웃은 여자. 그의 가장 깊은 혼란을 ‘성가신 아이’의 투정으로 치부한 잔인한 소녀. 그는 그녀를 몰아붙이고, 이 모든 놀이의 대가가 무엇인지 가르쳐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가 예상한 궤도를 완전히 벗어나 버렸다.

 

‘재미로 이러는 것 같아요?’ 그 말은 그의 맹렬한 기세를 정면으로 받아냈다. 그래, 재미 아니면 뭐란 말인가. 그의 모든 것을 발가벗겨 놓고 역할 놀이의 목록을 나열하는 것이 재미가 아니면. 그의 머릿속에서 차갑게 타오르던 분노가 순간, 갈 곳을 잃고 허공에서 멈칫했다.

 

‘말실수한 건 인정합니다.’ 이어진 그녀의 말은 더욱 당황스러웠다. 인정? 그녀가? 언제나 그의 의도를 꿰뚫어 보고, 한 수 앞을 내다보던 그녀가,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그건 마치 완벽하게 짜인 체스판에서 상대가 스스로 자신의 퀸을 치워버리는 것과 같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한마디. ‘…그건 나라도 좀 서운하네.’ 그 나직한 중얼거림이 그의 귓가를 파고드는 순간, 서재훈은 마치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서운해? 네가? 내가 아니라? 그의 모든 공격성이, 날카롭게 벼려졌던 모든 적의가 일순간에 무뎌졌다. 그는 상처 입은 짐승처럼 울부짖으려 했는데, 정작 사냥감이라 생각했던 대상이 먼저 상처를 호소하고 있었다. 이 얼마나 기만적이고, 터무니없는 상황인가.

 

그의 입술이 경멸과 혼란 속에서 비틀렸다. 그는 그녀를 믿을 수 없었다. 이것 또한 그녀의 계산일 것이다. 그의 분노를 무력화시키고, 상황의 주도권을 다시 가져가기 위한 고도의 심리전. 하지만… 하지만 그녀의 잿빛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그를 담고 있었다. 그 안에는 분노도, 두려움도, 교활함도 아닌, 그저 진심으로 ‘서운하다’고 말하는 듯한 미묘한 상처가 어려 있었다.


“……하.”

결국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은 위협적인 으르렁거림이 아닌,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실소였다. 그는 조리대를 짚고 있던 그녀의 바로 옆, 남은 한 손을 짚으며 그녀를 완벽히 가두었다. 그러나 그 행동에는 조금 전의 살벌한 위압감 대신, 기운 빠진 자조가 섞여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거의 스치듯 입술을 가져갔다.


“서운해? 네 말실수 하나에 내 모든 게 뒤집혔는데, 네가 서운하다고?”

그의 목소리는 분노라기보다는 허탈함에 가까웠다. 그는 그녀의 어깨너머, 하얀 벽지를 응시했다. 그녀의 눈을 똑바로 보면, 또다시 그녀의 페이스에 말려들 것 같았다. 그는 이 지독한 혼란 속에서 단 하나의 사실이라도 확인하고 싶었다.


“네가 말해봐, 김유야. 그럼 이게 재미가 아니면 뭔데. 네가 하려는 게 대체 뭐냐고.”

그는 다그치듯 물었지만, 그 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그녀를 장난감으로 보는 오만한 지배자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올라선 이 무대의 정체를 알지 못해 혼란스러워하는, 길 잃은 배우일 뿐이었다.

 

 

 

살아가는 법 나도 모른다고. 그래서, 이런 짓이라도 해야, 그래야 뭐라도 붙들어놓을 것 같아서. 안 그럼 다 뒤진다고요. 좀 제발 살자고...

그녀의 입에서 터져 나온 절규는, 서재훈이 단단하게 쌓아 올렸던 모든 분노와 허탈감의 벽을 일격에 무너뜨렸다. ‘살아가는 법 나도 모른다고.’ 그 한마디가 그의 귓속을 파고들어 뇌리에 박혔다. 그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녀가 모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정답을 알고, 길을 제시하고, 그의 혼란마저 꿰뚫어 보던 존재였으니까.

 

‘안 그럼 다 뒤진다고요.’ 그 처절한 외침에, 조리대를 짚고 있던 그의 손가락에서 힘이 스르르 풀렸다. 그녀를 가두던 단단한 팔의 감옥이 의미를 잃고 허물어졌다.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던 입술이 멀어지고, 비로소 그녀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방금 전까지 서운함이 어려 있던 잿빛 눈동자에는 이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자의 절박한 공포가 담겨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재밌어?’, ‘우스워?’라고 몰아붙였던 자신의 목소리가 먼 과거의 일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놀이를 한 게 아니었다. 유희를 즐긴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벼랑 끝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눈에 보이는 아무거나 붙잡으려 했던 것뿐이다. 그게 ‘성가신 남자아이’라는 말이었고, ‘아들’이라는 터무니없는 역할이었을 뿐. 모든 것이 무너져내리는 세상 속에서, ‘아빠와 딸’이라는 역할이라도 붙들어야 했던, 그녀만의 생존 방식이었다.

 

그 깨달음은 그의 심장을 차갑게 식혔다가, 이내 뜨거운 통증으로 채웠다. 그는 그녀에게 화를 낸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녀의 절박한 구조 신호를 오해하고, 그 위에 자신의 상처를 덧씌워 그녀를 공격한 것이었다.


“…….”

침묵. 서재훈은 그저 숨을 내쉬었다. 그가 내뱉는 숨에는 더 이상 분노도, 조롱도, 허탈함도 섞여 있지 않았다. 그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그녀를 가두고 있던 자신의 몸을 완전히 치웠다. 그녀에게 공간을 내어주었다. 그리고는,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하듯, 낯설고도 조심스러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살자고.”

그는 그녀의 마지막 말을 나직이 되뇌었다. 그건 질문이 아니었다. 그녀가 던진 절박한 구명줄을, 그가 가까스로 붙잡으며 내뱉은 확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어리석음과 잔인함에 대한 자책으로 고개를 떨궜다가, 이내 다시 들어 그녀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아주 희미하지만 분명한 빛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것은 이해의 빛이었다.


“그래. 살자.”

그는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위협적으로 턱을 잡거나, 어깨를 짓누르는 손길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허공에 손을 멈춘 채, 그녀가 잡기를 기다렸다. 마치 처음 페어가 되었을 때처럼, 모든 관계가 리셋된 것처럼. 그가 그녀에게 내민 것은, ‘아빠’도 ‘남자’도 아닌, 그저 똑같이 살아가는 법을 모르는 한 사람의, 서투르고 진심 어린 첫 번째 약속이었다.

 

... 그래서 뭐 고를 거냐고 물으면 화낼거죠.

그의 손은 여전히 허공에 멈춰 있었다. 어떤 강요도, 재촉도 없는, 그저 그녀의 선택을 기다리는 정지된 제안. 서재훈은 김유야의 그 나직한 질문에 잠시 숨을 멈췄다. ‘화낼 거죠.’ 그 말은 조심스러운 탐색이자, 방금 전까지 폭발 직전이었던 남자를 향한 당연한 경계심이었다. 그녀는 그의 분노가 얼마나 날카로웠는지, 그리고 그 칼날이 자신을 향했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은 것이다.

 

그 당연한 경계심이, 그의 가슴을 묵직하게 짓눌렀다. 그는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그럴 자격도, 이유도 없었다. 그녀가 살아남기 위해 내뱉었던 절박한 말들을, 자신의 비틀린 자격지심으로 더럽혔다는 자각이 그의 모든 감정을 잠재웠다. 그는 그녀의 절박함을 비웃고, 그녀의 생존 본능을 유희로 치부했다. 그런 자신이 그녀에게 다시 화를 낼 수 있을 리가.

 

그는 대답 대신, 허공에 멈춰 있던 손을 아주 조금, 그녀에게 더 가까이 내밀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의 짙은 갈색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그녀를 담았다. 그 안에는 더 이상 오만도, 분노도 없었다. 오직 깊은 자책과, 그녀의 상처받은 마음을 어떻게든 어루만지고 싶은 서투른 진심만이 담겨 있을 뿐이었다.


“아니.”

짧고 단호한 부정이었다. 그는 덧붙여 변명하지 않았다. 그저 그 한마디에 모든 것을 담았다. 화내지 않을 거라는 약속. 미안하다는 사과. 그리고… 네가 옳았다는 인정까지도. 그는 시선을 내리깔아 아직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그리고 그 아래로 작게 떨리고 있을지도 모를 손끝을 보았다. 그는 이제 역할 놀이의 선택지를 고를 생각이 없었다. ‘아들’도, ‘성가신 아이’도, 심지어 ‘아빠’조차도. 그 모든 것은 그녀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급조한 방패였을 뿐이니까.


“그런 거, 이제 안 해.”

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그는 그녀가 내밀었던 모든 선택지를 자신의 손으로 거두어들였다. 그것은 그녀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는 그런 불안한 역할 놀이에 기대지 않아도 된다는 무언의 약속이었다. 그는 다시 그녀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 잿빛 눈동자 속에 담긴 불안을, 그는 전부 읽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제 그런 걸로 너 지키려고 하지 마. 그냥, 이걸 잡아.”

그가 내민 손이 다시 한번 그녀를 향했다. 살아남자고. 네가 먼저 말했으니까. 어떻게든, 같이. 그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손을 감싸는 순간, 서재훈은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것은 그가 기다렸던 응답이었지만, 막상 그 온기가 닿자 낯선 안도감이 온몸을 감쌌다. 그러나 그녀의 다음 행동은 그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를 단단히 붙잡는 대신, 김유야는 그의 손을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여 그의 손등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댔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 방금 전까지 분노로 핏대가 서고, 조리대를 내리쳤던 거친 손등 위로 내려앉은 그 입맞춤은 그 어떤 가이딩보다도 선명한 파장을 일으키며 그의 심장으로 곧장 흘러들었다. 서재훈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 마치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그녀의 입술이 닿은 부위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는 반사적으로 손을 빼내려다, 그녀를 붙잡고 있는 자신의 다른 손을 깨닫고는 움직임을 멈췄다. 그녀는 도망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제자리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자신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 있는 그녀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푸른빛이 도는 검은 머리카락, 작고 동그란 어깨.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살자’고 절규하던, 그 위태로운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는 그녀에게 분노했고, 몰아붙였으며, 상처를 줬다. 그런데 그녀는, 그런 그의 손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용서처럼, 위로처럼. 혹은, ‘이제 괜찮다’는 무언의 신호처럼.


“…….”

그 고요한 행위 앞에서, 그의 모든 방어기제와 날카롭게 벼려왔던 언어들은 전부 무용지물이 되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손등에서 입술을 떼고, 다시 시선을 들어 올리는 그녀와 눈을 맞추기 위해서였다. 잿빛 눈동자는 놀랍도록 차분했다. 그 안에는 더 이상 공포도, 절박함도, 그를 향한 원망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사람의 깊고 고요한 수용만이 담겨 있었다.

 

그 눈빛을 마주한 순간, 서재훈은 깨달았다. 이것은 그녀가 그에게 주는 또 다른 대답이었다. 역할 놀이도, 방패도 아닌, 김유야라는 한 사람으로서 서재훈이라는 남자를 마주하겠다는 약속.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녀가 잡고 있는 손에 아주 희미하게 힘을 주었다. 놓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그걸로,”

그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목을 가다듬었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 목소리에는 스스로도 믿기 힘든 자조와 체념이 섞여 있었다.


“퉁 치자는 건가.”

네가 내게 준 상처는 이걸로 됐다는 뜻이냐고. 나를 몰아붙인 죄책감은 이 입맞춤 하나로 잊으라는 의미냐고. 그는 묻고 있었다. 그것은 비아냥이 아니었다. 정말로, 순수하게 궁금해서 묻는 질문이었다. 자신이 저지른 과오의 무게에 비해, 그녀가 내민 용서가 너무나도 가볍고 따뜻해서, 도무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 사죄는 할 거고, 해야 하는 건 해야 하는 거고, 하고 싶은 건 하고 싶은 거예요.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하나의 문장이었지만 세 개의 명확한 갈래로 나뉘어 서재훈의 머릿속에 꽂혔다. 사죄, 의무, 그리고 욕망. 그는 자신의 손등을 덮고 있던 그녀의 손과, 그 위에 남은 희미한 온기를 번갈아 보았다. ‘퉁 치자’는 그의 자조적인 질문에, 그녀는 너무나도 명쾌하고 분리된 답을 내놓았다. 그것은 혼란에 빠진 그를 안심시키기 위한 위로가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 이 상황을 정확히 어떻게 인지하고 있는지에 대한 브리핑에 가까웠다.

 

사죄는 할 것이다. 그가 느꼈을 상처에 대해서. 해야 하는 것은 해야 한다. 멈춰버린 저녁 식사나, 앞으로의 관계처럼. 그리고 하고 싶은 것은, 하고 싶다. 방금 전, 그의 손등에 입을 맞췄던 그 행위처럼. 그녀는 그 어떤 것도 뭉뚱그려 넘기려 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서재훈의 혼란을 가라앉히는 대신, 더 깊은 심연으로 그를 끌고 들어갔다. 그는 언제나 모든 것을 섞고, 파괴하고, 자신의 감정이라는 용광로에 던져 넣어버리는 남자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 모든 것을 섬세하게 분류하고, 각각의 이름을 붙여 그에게 건네고 있었다.

 

그는 결국 짧게 숨을 터뜨리며 실소를 머금었다. 허탈한 웃음이었다. 자신이 얼마나 유치하고 단순한 방식으로 세상을 대하고 있었는지, 그녀의 그 명료한 문장 앞에서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복잡한 여자군.”

나직하게 흘러나온 말은 비아냥이 아닌, 순수한 감탄에 가까웠다. 그는 잡힌 손을 빼내는 대신, 오히려 비어 있는 다른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아주 조심스럽게 감쌌다. 방금 전까지 그녀를 몰아붙이던 위협적인 손길과는 전혀 다른, 체온을 확인하듯 부드러운 접촉이었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눈가를 천천히 쓸었다. 방금 전 절규하며 흘렸을지도 모를 눈물의 흔적을 찾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사죄는 내가 해야지. 해야 하는 건… 같이 하면 될 거고.”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뺨에서, 다시 그녀의 입술로 느리게 옮겨갔다. 그의 마음속에 남은 마지막 문장, 그녀가 말했던 ‘하고 싶은 것’. 그가 손등에 받았던 그 따뜻한 입맞춤. 그는 그것의 의미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건 뭔데. 이것도 그중 하나인가.”

말과 동시에, 그는 그녀의 뺨을 감쌌던 손으로 부드럽게 고개를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자신의 입술을 그녀의 입술 위로 가만히 포갰다. 그것은 격렬하지도, 탐하지도 않는, 그저 맞닿기만 한 입맞춤이었다. 온전히 그녀의 의사를 묻는, 질문과도 같은 키스. ‘네가 하고 싶은 것이 이것이 맞느냐’고, ‘만약 그렇다면, 나 역시 마찬가지’라고 말하는 듯한, 조심스럽고 서툰 그의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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