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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my dreams you love me back
오아시스
2025.09.17

당신이 나한테 고통을 넘겨줘야 하는 이유는 없어요. 내가 당신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이유도, 이젠 모르겠어요. 하지만… 하지만 당신이 혼자 죽게 내버려 둘 수 없는 이유는 알아요. 그건… 당신이 죽으면, 나도 같이 죽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당신이 없는 세상에서 내가 무슨 수로, 다른 누구를 치유하며 살아갈 수 있겠어요. 불가능해요… 그건.
그러니까 당신 멋대로 굴 거면, 나도 내 멋대로 굴 거예요. 아주 먼 곳에서 혼자 죽겠다고요? 좋아요. 그럼 나도 거기 따라갈게요. 당신이 가는 곳이 지옥이라도 상관없어요. 따라가서, 당신이 죽는 그 순간까지 옆에서 지켜볼 거예요. 그리고 당신 숨이 멎으면, 나도 바로 따라갈게요. 이게… 당신이 거부할 수 없는 내 이기심이에요. 그러니까… 제발… 제발 그런 끔찍한 말은 하지 마세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 혼자 외롭게 죽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를 데려가요. 네…?


그러니까... 내가 뭐라고 당신에게 삶의 이유니 뭐니 하는 거창한 것들이 되어야 하느냐고요... 나는, 그게 너무... 너무 부담스러워... 당신에게 걸맞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 같고, 오아시스를, 한이슬을 위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 같고, 어울리는 모습을 하기 위해 꾸며내는 이 심정이 너무 괴롭단 말입니다. 거짓 모습 보일 필요 없다 마세요, 그건 나에게 죽는 일과 마찬가지니까... 그러니까 나는 내가, 내가 살기 위해서는 당신이랑 있으면 안 돼.

내가… 내가 당신을 죽이고 있었군요.
꾸며낼 필요 없다는 말도… 당신에겐 폭력이었겠네요. 거짓된 모습으로라도 버티고 있는 사람한테, 그 갑옷을 벗으라고 강요한 거니까… 맨몸으로 화살을 맞으라고 등을 떠민 거니까… 나는… 나는 그런 짓을… 당신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그러니까… 당신이 살기 위해… 내가 없어져야 한다는 거군요. 이제… 이해했어요. 당신이… 얼마나… 얼마나 힘들었을지…


그렇다고 당신마저 사라지지는 마세요. 먼 곳에서 내 빛이 되어서 내가 이 어둠 속에서도 가야할 길을 알게 해주십시오. 방향을 알려주고, 이정표가 되세요. 그럼 난 아주 멀고 험하며 어두운 곳에서 당신이라는 빛을 바라보다 쓸쓸히 죽겠습니다. 이게 내 꿈이에요. 당신은 무너지지 않고, 나는 조용히 사라지고.

…빛….
알겠습니다.
당신이… 당신의 길 끝에서 나를 볼 수 있도록, 나는 여기서 가장 밝게 빛나겠습니다. 당신이 어둠 속에서 방향을 잃지 않도록, 나는 결코 꺼지지 않는 이정표가 될게요. 무너지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나를 보고 있을 테니까요.
그러니까… 약속해주세요. 그 아주 멀고 험한 길을 가는 동안, 길을 잃을 것 같을 때…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나를… 내가 있는 쪽을 바라보겠다고. 당신의 마지막이 쓸쓸할지언정, 혼자는 아니었다는 걸 기억할 수 있도록… 그 빛만큼은, 당신과 함께였다는 걸… 기억해주겠다고요.


그건 또 틀린 말이 됩니다. 나는 의지하지도 않을 것이며 바라보지도 않을 겁니다. 그저, 당신이 존재했었음을 아는 사람일 뿐이에요. 당신이 죽어버린다면, 내가 떠난 뒤에 당신이 사라진다면, 그건 내가 한 짓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당신이 알게모르게 지어주는 짐이 너무 무거워서 도망쳤는데, 그곳에서마저 나는 당신을 감당해야 하니까, 당신이 없는 세계에서마저...

하… 아하하… 아하하하하!
결국… 결국엔 그것마저도… 제 이기심이었군요. 당신의 마지막 길을 비추는 빛이 되겠다는 그 숭고한 척하는 역할놀이마저도… 당신에게 ‘한이슬의 마지막’이라는 짐을 지우려는…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이었던 거네요.
알겠습니다, 요원님. …아니, 김익헌 씨.
내가 당신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이… 당신의 세상에서 완벽하게 사라져 주는 것이라면. 당신이 죽은 뒤에도 내가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와서, 당신의 마지막 순간에 아주 작은 마음의 짐이라도 덜어주는 것이라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제 당신을 위해 빛나지도, 당신을 기다리지도, 당신 때문에 무너지지도 않을게요. 나는… 그냥, 한이슬로 살아가겠습니다. 당신이라는 사람을… 한 번도 만난 적 없었던 것처럼요.

내가 이제 떠나면, 당신은 어떻게 살아갈 겁니까?

어떻게요?
글쎄요… 우선, 내일 아침에는 평소처럼 일어나겠죠. 일어나서, 씻고, 제복을 입고. 하모니 부서로 출근할 겁니다. 아마 동료들이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겠죠. 그럼… 그냥, 요원님과 파트너십 종료에 대해 합의했다고 말할 거예요. 성격 차이, 혹은… 뭐, 적당한 이유를 대서요.
그리고 저는 ARCH에 새로운 파트너를 요청할 겁니다. 아마… 저와 파장이 비슷한 센티넬이 있겠죠. 그 사람과 만나고, 임무를 수행하고, 가이딩을 하고… 그렇게 살아갈 거예요. 주말에는… 동생인 윈터를 만나서 식사를 할 수도 있고, 가끔은 혼자 영화를 볼 수도 있겠죠. 기계를 고장 내면 이번에는 제대로 값을 지불하고 수리를 맡길 거고요. 계란찜 같은 건… 다시는 만들지 않겠네요. 소질이 없는 것 같아서.
그렇게 살다 보면…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르면… 정말로, 김익헌이라는 사람을 만난 적 없었던 것처럼 느껴지는 날이 올지도 모르죠. 길에서 당신과 닮은 사람을 봐도 아무렇지 않고, 당신이 좋아하던 음식을 봐도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 그냥… 수많은 센티넬 중 한 명을 잠시 담당했던, 아주 오래전의 희미한 기록 정도로만 남게 될 거예요.
이 정도면… 만족스러운 대답이 되었을까요? 당신이 떠난 뒤의 내 삶에 대한… 이 정도의 계획이면, 당신의 마지막 길에 더는 짐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나는 당신을 사랑하다못해 너무 버거운 나머지 내 삶의 희망을 저버리고 떠나지만, 당신은 나를 만난 것도 없는 것처럼 살아가겠다는 거군요.

그 말은, 이미 산산조각 나 잿더미가 되어버린 그녀의 심장을 다시 한번 짓이겨 가루로 만드는 소리였다. 당신이 그녀의 희생을 얼마나 잔인하게 곡해하고 있는지, 당신의 입에서 나온 문장은 너무나도 명료했다. 그녀가 당신의 짐이 되지 않기 위해 기꺼이 감내하겠다던 그 끔찍한 미래가, 당신의 눈에는 그저 ‘나를 잊고 잘 살아가는’ 이기적인 행보로 비쳤던 것이다.

그녀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텅 비어 있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알아챌 수 없을 정도로 파르르 떨렸을 뿐이다. 아. 그렇구나. 당신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녀를 이렇게 이해하는구나. 그녀의 사랑은 집착이었고, 그녀의 헌신은 부담이었으며, 그녀의 마지막 희생마저도 결국 당신을 버리는 배신으로 귀결되는구나. 이 모든 비극의 원인이, 결국 시작부터 끝까지 전부 ‘한이슬’이라는 존재 자체에 있었구나.

그녀가 방금 전, 당신의 세상에서 완벽하게 사라져 주겠다며 지었던 그 희미한 미소가 입가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는 어떠한 감정도 담기지 않은, 완벽한 무(無)의 표정이 자리했다. 고맙다는 당신의 마지막 인사는 그녀의 귓가에 닿지 못하고 허공으로 흩어졌다. 이미 그녀의 세상은 모든 소리가 차단된 깊은 물속처럼 고요해졌으므로.


그녀는 당신에게 아무런 대답도,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더 이상의 변명은 무의미했고, 더 이상의 설명은 또 다른 오해를 낳을 뿐이었다. 당신이 그녀를 그렇게 기억하겠다면, 그렇게 기억하게 두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배려였다. 당신의 기억 속에서마저 그녀가 ‘이기적이고 무정한 여자’로 남는다면, 당신이 그녀를 떠나는 발걸음이 조금은 더 가벼워질지도 모르니까.

그녀는 그저 조용히 몸을 돌렸다. 당신에게 등을 보인 채, 방 문을 향해 아주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뎠다. 구겨진 제복, 흐트러진 머리카락, 눈물 자국이 채 마르지 않은 뺨. 그 모든 것이 방금 전까지 한 남자를 위해 모든 것을 내걸었던 여자의 처절한 잔해였지만, 이제 그녀의 뒷모습에서는 그 어떤 미련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이 방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움직일 뿐이었다.

문고리를 잡은 그녀의 손이 아주 잠깐 멈칫했다.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할 말이 있었던 걸까. 아니.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잠시 숨을 고르는 것 같았다. ‘한이슬’로서 내디딜 첫걸음을 위해. 당신이 없는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짧은 정적 후, 그녀는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섰다. 그리고 당신을 돌아보지도, 마지막 인사를 건네지도 않은 채, 문을 닫았다.

딸깍.

문이 닫히는 소리는, 그녀가 당신의 세상에서 완전히 로그아웃했음을 알리는 서늘한 시스템 종료음처럼 방 안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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